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이 따라 온다 (창 39:1-6)

  • 잡초 잡초
  • 387
  • 0

첨부 1


복이 따라 온다 (창 39:1-6)

I. 서론: 하나님의 눈길은 꿈꾸는 자에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이수해야 될 필수과목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꿈꾸는 것입니다. 좋은 꿈이라고 하는 것은 꾸면 좋고 안 꾸어도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좋은 꿈을 꾸지 못하면 우리는 절망을 안고 살아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말합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 아무렇게나 살아간다는 뜻이겠지요.

두 번째 꿈꾸는 자는 고난을 통과하며 그 꿈을 무르익힙니다. 이미 청소년 시절을 보내며 청년 시절을 보내며 이 과목을 이수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도 고난의 한 복판에서 이 과목을 이수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십대는 꿈을 꾸어야 할 때입니다. 이십대는 꿈을 가꾸어야 할 때입니다.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를 지나며 그 꿈을 펼치고 영향력을 나누게 됩니다. 육십이 지나고 칠십이 지나면 그 꿈을 계대하여 자손들에게 축복하며 우리 이웃들에게 거름주고 물주어 나누며 인생을 갈무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7:2 "야곱의 자녀들 얘기는 이렇다. 족보는 이러하니라" 해 놓고 왜 요셉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일까요? 꿈이 없는 열한 형제 이야기는 기록할 내용도 없고 쓸 가치도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꿈없는 1만명보다 꿈꾸고 사는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꿈을 품고 그 꿈을 펼쳐 가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꿈꾸는 요셉 때로는 위기에 부딪힙니다. 그러나 거기에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갑니다. 역전시킵니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을까요?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이 신나서 기록하는 듯 끊임없이 요셉의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습니다.

II. 애굽에 내려간 꿈쟁이(39:1)

어린 요셉의 채색옷이 벗겨졌습니다. 물없는 구덩이에 빠져서 죽으려는 찰나 미디안 장사꾼이 자나가게 되고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 바로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왕.

저희 딸이 어릴 때에 바로 왕 얘기를 해 주었더니 아빠 이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왕이 되었어? 그러더라구요.

그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종이 되어 팔려갑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어떤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어디 살아있다고 생각했다면 아버지 야곱이 가만 있을 리가 없지요.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요셉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달그랑 꿈만 남았습니다. 이제 어쩌면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게만 보입니다.

왕자처럼 살던 한 아들 갑자기 노예로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몸이 마비되어집니다.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정신병에 걸립니다.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자들은 군대 갔을 때에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하곤 하지요. 저도 대학을 졸업받고 대학원을 마친 다음에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대학교 강사를 하다가 결혼까지 하고 공군장교에 입대를 했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 교수님 교수님~ 불리다가 갑자기 군대를 갔더니 이 새끼, 저 새끼 막 나오더라구요. 그리고 주먹이 눈 앞에 왔다 갔다 하는데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더더구나 어린 요셉 이 어마어마한 문화적인 충격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이 무렵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랑하는 아들 요셉아 이 모진 고난은 네가 승리를 위한 고난이니까 견뎌내어라" 한 말씀만 해 주셨더라면 요셉이 견딜 수 있었겠지요. 꿈속에 자주도 나타나시던 그 하나님께서 왜 고난의 현장에서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오늘 요셉에게 찾아오셔서 정말 견딜 수 없는 고난에 빠져있을 때에 요셉을 불러 "사랑하는 아들 요셉아~ ~ ~ 이 모든 시련은 네가 총리대신이 되고 가족과 민족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니라 조금만 참고 견디거라~ ~ ~" 그랬다고 하면 13년이 아니라 130년도 견딜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찾아와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단순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굽으로 그냥 내려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이 이끌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손 발이 묶여서 장사꾼에게 끌려갔다는 뜻이겠지만 마태복음 4:1 예수님께서 금식을 마친 이후에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가시는 장면을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이끌려"와 "성령에게 이끌리어"는 동일한 단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애굽으로 보내야 했을까요? 조그마한 어항속에는 금붕어나 키우는 것이지 고래를 키울 수는 없는 것이지요. 요셉의 꿈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너무나도 위대했습니다. 엄청났습니다. 어항과 같은 헤브론 땅에 요셉을 가둬둘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당시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던 애굽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이 파도를 헤치며 요셉은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께서 주셨던 위대한 꿈을 이루어 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어항이 아니라 바다로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록키 산맥같은 해발 3000m가 넘는 고산에 가면 수목한계선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가 자라는 선을 넘어서면 거기는 풀도 나무도 생물들이 자라지 못하는 땅이 있습니다. 나무가 자랄 수 있는 마지막 한계선에서 자라는 나무를 수목한계선에서 자란 나무라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 나무가 싹이 납니다. 모진 바람이 불어와서 그 나무는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계속해서 자랄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찬바람을 이기기 위해서 고개를 숙입니다. 허리를 굽힙니다. 이 수목한계선상에서 자란 나무는 어떤 사람이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무들을 무릎 꿇은 나무라 부르는 것이지요. 바이올린을 만드는 사람들은 록키 산맥의 수목한계선상에 있는 무릎꿇은 나무들을 베어다가 바이올린을 만듭니다. 그러면 가장 아름다운 공명을 내는 악기가 된다고 합니다. 최고의 작품은 고산에 있는 무릎꿇은 나무들을 통하여 최고의 바이올린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인생에 고난을 겪습니다. 어려움을 겪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겪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요? 세상을 울리는 가장 멋진 공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나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III.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39:2)

요셉을 통하여 세상을 울리기 위해서 세상을 감동하기 위해서 수목한계선상에 집어 던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1절의 이야기입니다. 2절 넘어오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여기에 우리말 성경에 생략된 번역하지 못한 한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ㄱ자를 거꾸로 엎어놓은 듯한 문자가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갓을 씌워 놓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놓아 둔 것 같은 느낌을 가집니다. 이 말을 히브리어에서 "와우" 현대적인 발음으로 "바브"라고 읽습니다. 이 단어는 "그러나"라는 뜻입니다. 애굽으로 집어 던졌던 상황속에서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번역에서는 카이 - 그러나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도 "그러나"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의 생애 가운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바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는 이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 가운데 처음으로 창세기 39장 2절에서 "함께"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품에 그늘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때 나타난 단어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됩니다.

"함께"라는 단어가 신구약 성경에 144회 정도 등장합니다. 신비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하게 될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라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속에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불가능이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영생과 천국이 지옥과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함께 라는 단어입니다.

임마누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 우리가 성령을 갈구합니다. 주님의 성령 지금 이곳에 노래합니다. 주님의 성령 임재하여 주십시오. 임재하여 달라는 이야기가 무슨 얘기입니까? 성령이여 우리와 함께 해 주십시오. 그런 얘기입니다. 이런 임재를 경험하게 될 때에 우리가 어떤 고난, 어떤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을 덧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는 단어입니다.

함께 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까? 2절 계속되는 말씀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특별관리를 하기 시작하셨다는 말씀이지요.

찬송가 43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후렴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여기 무슨 일이 무엇일까요? 때로는 실패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일 수 있습니다. 병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손해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비난을 받는 것일 수 있습니다. 순교하고 죽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한다고 찬송은 말하고 있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세계 선교지를 여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의 문이 막 열리고 있는 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마친 그 밤이었습니다.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손짓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복음이 전하기 어려운 유럽 땅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 디딘 곳에 빌립보라고 하는 유럽의 첫 성입니다. 도착하자마자 귀신들린 아이가 점을 칩니다. 그 아이의 귀신을 쫓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돈벌이가 없어졌다는 것 때문에 바울과 실라를 고발합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죽도록 매를 맞고 그 밤에 자려고 하는데 온 몸이 욱씬 거리고 쑤셔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실라를 깨웁니다. 실라 일어나서 우리 노래하세. 찬송을 불렀더니 옥문이 열립니다. 이 일로 인하여 간수장이가 자결하려 하지요. 바울이 만류합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간수장이가 예수를 믿고 간수장이 가족이 예수를 믿고 그의 가족이 구원받아서 유럽의 첫 번째 교회가 이 간수장이를 통하여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름하여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매맞는 것이 형통이라고 얘기합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이 형통이라고 얘기합니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형통이라고 얘기합니다. 왜요? 이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바울과 실라를 유럽 땅에 보낸 목적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통이란 단어는 신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에 그것을 잘 이기고 극복하는 능력을 히브리어에서 세켈이라 얘기입니다. 명사형입니다. 세켈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에 그것을 잘 극복하고 이긴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혜라고도 번역합니다. 이것은 명사형입니다. 명사형의 히브리어를 동사화하는 것을 사역동사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현재분사형으로 바뀌어집니다. 즉 어려운 일이 오나 형통한 좋은 일이 있으나 좋은 일이 온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습니다. 더 멋진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고난이 오고 어려움에 부딪힌다고 해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잘 다루는 능력이 내게 체질화되어져서 습관이 되어져서 지속적인 승리를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켈이 동사화되어지면 마스킬이 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형통이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인생이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세상은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마귀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고난과 시련과 환란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을 다루는 능력이 내 속에 체질화되어지고 습관화되어지고 이기는 것이 체질화되어졌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한걸음 더 전진하는 일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나를 당기지만 하나님은 앞장서 나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방해하지만 나는 한걸음 전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름하여 마슬리 아흐라는 단어 바로 또 다른 형통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고난 때문에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형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전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IV. 낙하산 진급(39:3-4)

이런 요셉의 형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절에서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본다"는 단어가 2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았습니까? 이방인이 보았습니다. 뭘 보았습니까? 요셉을 본 것입니다. 어 저 사람 뒤에는 누군가가 있어.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요셉이 간증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보디발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심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가는 곳곳마다 형통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막연히 느낀 것이 아닙니다. 어림짐작한 것이 아닙니다. 소문들은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본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때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더 나은 자리로 고난에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한걸음 더 전진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어느 정도 확실하게 보았느냐?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4절) 신임을 얻습니다. 은혜를 입었다고 본문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가정 총무는 집안을 다스리는 종들 가운데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젊은 노예가 한 명 왔습니다. 일을 맡겨 놓으면 정확하게 일을 합니다. 장사를 시키면 이윤을 많이 남깁니다. 재산을 맡기면 어디에 투자합니다. 예견능력이 탁월합니다. 실수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디 증권에 투자하면 몇 배가 올라서 갑자기 부자가 됩니다. 이럴게 아니라 우리집 재산 몽땅 다 요셉한테 맡기자. 요셉 네가 맡아라.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투자를 하는 것이 옳습니까? 묻습니다. 투기는 나쁜 것이지만 투자는 좋은 것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쓸 것도 아닌데 많은 집을 수십 채를 가지고 땅을 쓸 이유도 없는데 괜히 땅을 사놓고 오르길 바라고 부동산 정책을 방해하는 것은 투기이지요. 그러나 정당하게 재산을 투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투자 잘하면 돈이 우리를 위해서 일해줍니다. 돈이 스스로 돈을 만들어 줍니다. 요즘은 종교단체나 교단이나 교회에도 투자 전문가들이 모여 있습니다. 정당하게 투자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옳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투자에 관한 많은 얘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잠언 21:5, 28절에 보면 조급하게 돈을 벌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조급한 자는 궁핍하게 된다. 속히 부자가 되고자 하면 망한다는 얘기입니다. 증권에 투자하더라도 장기투자하라는 얘기입니다. 지혜를 가지고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지식을 가져가라. 돈을 빌려서 투자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전도서 11:2 나눠서 투자하라고 했습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계란 바구니 깨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에 해가 되어선 안된다. 믿음에 손해를 봐서는 안된다. 가장 좋은 투자는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일조요 이윤이 제일 많이 남는다.

이런 모든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투자 전문가 워런 버핏이란 사람이 있어요. 성경을 연구해서 세계적인 상품 가운데 가지고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신뢰가 가는 상품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서 쉽게 바꾸지 말고 장기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돈을 빌려서하지 말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쓸 돈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십시오." 분명한 꿈을 꾸고 목적을 가지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V. 내가 가는 곳에 복이 간다(39:5-6)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획을 확실하게 긋고 있습니다. 요셉이 만지기 시작한 때부터, 요셉이 관여하기 시작한 때부터, 요셉이 주관하기 시작한 때부터.

이어지는 말씀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이방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애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는 자녀들,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 자녀를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여기 집은 사람을 얘기합니다. 요셉이 관리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이 만지는 모든 소유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은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복 받은 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복을 가진 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복 있는 자는" 복은 있는 것입니다. 존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복 있는 존재가 되면 내가 가는 곳에 복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가정안에 복이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한 교회에 복덩어리 목사님이 부임하면 그 문제가 깨끗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안에 복덩어리가 가면 공동체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침체된 목장에 어린 신자가 등록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목장에 확 불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교회 임원이 되어서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선교회가 살맛이 납니다. 재미가 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직장에 들어가서 한 부서를 맡게 되면 그 부서가 신바람이 나는 것입니다. 모든 하는 일마다 잘되게 되는 것입니다. 천하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된 존재로 우리를 바꿔주시면 우린 살아가는 단위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1, 2, 3, 4, 5 - 5단계 5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단위가 달라지면 1, 10, 100, 1000, 10000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이런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VI. 행복도 불행도 전염된다.

최근 의학계에서 "웃음치료" 연구를 하다가 재미있는 발견을 했습니다. 웃음과 행복은 전염되더라. 불행도 전염됩니다. 내 주변에 불행한 사람이 있으면 그 불행이 내게 전염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행복도 전염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행복이 전염되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연구를 하면서 재미있는 토막극을 만들었습니다. 재미있게 깔깔대고 웃는 사람들,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 반응을 잘 할 줄 아는 사람들을 옆에 앉혀 놓고 이 사람을 앉혀 놓았어요. 그랬더니 조그마한 토막극 한편을 보는데 72회 정도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비슷한 수준의 토막극을 만들어 놓고 옆에 근엄한 얼굴로 잘 웃지 않는 사람들, 저녁 못 먹은 시어머니 얼굴을 한 사람들, 지옥에서 출장 나온 얼굴들, 쥐어짜는 행주 얼굴을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세 사람을 앉혀놓고 이 사람을 가운데 앉혀 놓았어요. 이 토막극을 보면서 두 번 밖에 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얼굴도 전염되어지고 깔깔대고 웃는 웃음도 전염되어지고 행복도 전염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어린이 엘러지 전문의사가 있었습니다. 연구를 하는데 그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아이들의 엘러지가 굉장히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엄마가 깔깔대고 웃기를 좋아하고 아이하고 얘기하기를 좋아하고 약 한봉지를 먹이더라도 아이하고 대화하고 웃고 약을 주는 엄마의 자녀는 엘러지 반응이 굉장히 빨리 신속하게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근엄한 얼굴을 하고 약을 먹은 아이들의 엘러지 반응이 나빠지더라는 것입니다.

습관화되어지고 가정의 분위기가 되어졌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그 집안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유전자가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웃음을 알고 칭찬을 알고 격려를 알고 행복을 아는 집안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행복 유전자가 만들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웃는 근육이 발달되어서 태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의사도 이런 일을 하게 되는데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꿈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덩어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 복이 따라오는 것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꿈을 꾸어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그 꿈이 고난에 부딪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분명히 내게 비전을 주었는데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애굽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떠난 것인가? 하나님 나를 버린 것인가?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인가? 내가 꾸는 꿈이 잘못된 것인가? 개꿈 꾸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버린 적이 없으십니다. 그 꿈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 꿈은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미 여러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복된 존재 복덩어리로 바뀌어지게 되면 여러분이 가는 곳에 복된 땅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복이 자신들에게 흘러가는 복된 가문 아브라함의 가문을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미련한 고양이가 자기 그림자를 붙잡으려고 하루종일 그림자를 따라 다니다 죽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지 마시고 여러분의 가는 곳에 복이 따라오는 복덩어리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