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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 (막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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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위해 오신 예수님 (막 2:13-17)

교회생활을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한번이상 교회를 통해서 상처를 받지 않으시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을때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실망하게 되면서 다양한 반응을 보게 됩니다.
우선 교회를 떠나 아예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입니다.저런 사람이 있는 교회는 안다니겠다고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교회를 떠난 그리도인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다음은 교회를 옮기는 경우입니다. 실망을 주고 상처를 준 사람가 부닥치지 않기 위해서 다른 교회를 옮겨가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상처를 안고 다른 교회를 피해가면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거기에 또 사람들이 모인 경우이기에 상처를 받을 수 잇습니다.
셋째는 교회생활은 하되 중심에 들어가지 않고 멀찍이 서서 관망하면서 구경꾼처럼 교회생활을 하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신앙이 떨어지고 생명력없는 신앙이 되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가 바라는 교회상에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교회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상들을 보면 너무 이상적이고 완전한 교회상을 갖고 잇는 경우입니다. 2천년교회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이고 온전한 교회상을 들라고 한다면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일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도 결코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의 예루살렘교회도 구제문제로 논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소개된 고린도교회,에베소교회,갈라디아교회등 많은 초대교회들이 다양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엇습니다.

교회 속에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속에 술마시고 방탕한 사람들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속에 분쟁을 일으키고 싸우는 사람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속에 도적질하는 사람들 있을 수 있습니다. 현실의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문제가 있고 죄의 문제가 있을 수 잇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무리 건강한 교회를 위해 노력하고 소원하고 기도한다고 해도 완전한 교회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가 생기고 있을때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교회 속에 다양한 죄의 문제 죄인들의 문제를 어떻게 우리는 대해야 합니까?
이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죄인들의 문제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런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십니다.예수님은 오늘 누구를 부르시고 있습니까?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교회는 누가 모이는 곳입니까? 의인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요 죄인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교회는 죄인을 부르러오신 주님처럼 죄인들을 부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지상의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요 병든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과연 불완전사람 지상교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활해야 합니까?
오늘 주님께서 죄인들을 다루는 방식의 본을 통해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다함께 본받기를 소원합니다.

1. 죄인들을 보시는 예수님

14절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예수님이 죄인된 세리마태를 보셨습니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습니다.에수님이 세리를 보셧다는 것이 중요합니다.당시에 세리인들은 유대인들이 너무나도 혐오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앞잪이가 되어서 동족인 유대인들을 괴롭힌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는 유대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면서 세금을 착취했습니다. 그래서 세리인들은 유대인들의 눈에 반역자요 반민족주의자였던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로 말을 하면 매국노인 셈인 것입니다.

당시에 정상적으로 걷는 세금 관세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정세만 해도 인두세,토지세,소득세 3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인두세는 머리 수대로 내는 세금이고 그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무조건 내야 하는 것입니다. 토지세는 갖은 토지에 따라 소득세는 12세에서 65세까지 내게 되어 잇습니다. 이것만 내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버거운 것이었는데 거기에 세리들은 멋대로 관세를 붙여서 동족을 탈취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거둔 많은 세금들은 횡령되어 세리인들이 유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유대인들은 세리라고 하면 상종을 하지 않고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들은 보지도 않고 그들이 법정에서 증인을 해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리 마태를 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정죄의 눈으로 보았지만 주님은 자비와 긍휼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심판의 눈으로 보았지만 주님은 은혜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왜 주님의 눈과 유대인들의 눈은 같은 것을 보았는데 이렇게 관점의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이것은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상황을 보아도 긍정의 시각이 있고 부정의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여러분은 어떤 관점이십니까? 정말 사람을 인간적으로 바라보면 도무지 희망이 없고 긍정하기 어려운 대상입니다. 가령 오늘 우리 앞에 마태와 같은 사람이 서있다고 가정하여 봅시다. 지금으로 말을 하면 마태는 매국노요 돈밖에 모르는 구두쇠요 동족들에게 상처를 준 몹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태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세리 마태가 성경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으로 소개하는 성경을 기록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귀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의 더러운 세리마태보다는 변화되어 귀하게 사용되어질 제자마태에게 더 관심을 두신 것입니다. 만약에 나머지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보셨다면 과연 예수님의 제자가 될만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사람의 관점과 주님의 관점을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실때의 상황에서 그들을 본다면 가장 가능성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어쩌면 가롯유다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똑똑하고 셈능력이 좋고 자기 처신에 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중은 어떻게 됩니까? 반대의 결과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를 보면 그당시로는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가능성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충동적이고 격정적이고 신뢰하기 어려운 다혈질의 사나이엿습니다. 결국 주님은 그에게 새이름을 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게바란 반석을 말씀합니다. 주님은 금방 변하고 충동적인 베드로가 반석처럼 견고하게 세워져갈 것을 기대하셧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지금 나를 보시는 주님의 관점은 어떤 모습일까요? 비록 인간적인 나는 실망스러운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은 긍정의 관점입니다. 나를 향한 기대와 목적을 갖고 주님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갖고 우리를 부르시고 바라보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서로를 바라보실때에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비록 지금 미숙하여도 장차 시몬이 게바가 되는 것러첨 세리가 마태가 되는 것처럼 변화되어질 주님의 관점을 갖으시기를 바랍니다.


2. 죄인들을 부르시는 예수님

14절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주님께서는 레위를 보시고 난 뒤에 그를 부르셨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레위는 많은 유대인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였을 것입니다. 누구도 만나주거나 알아주거나 불러주지 않는 왕따가 되는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불러준다는 것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입니까? 특히 죄인일때 부족할 때 나를 알아주고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값진 일입니까?

주님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그를 불렀습니다.
여기 주님은 레위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고 하시면서 주님은 초청한 그들을 향하여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레위에게 나를 따르라 불렀고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 주님의 부르심으 받은 자들입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주님을 따르라고 주님을 좇으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간단히 요약하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먼저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레위가 주님을 만나듯이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듯이 바울이 주님을 만나듯이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레위당시에는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만날 수 있엇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이 직접 우리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믿음으로 마음에 만날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고 살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만나신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레위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앗을때에 어떻게 합니까?
“일어나 따르니라”고 합니다.
즉각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순종합니다.
어떻게 레위는 주님의 부르심을 즉각적으로 따를 수 있엇을까요?

이 세상에는 3종류의 죄인이 잇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죄인이 있습니다.
다음은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알지만 남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람직한 죄인의 모습은 누구입니까?
바로 자신이 죄인인을 아는 죄인입니다. 여기에서 레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죄인이엇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난 사람 주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레위는 주님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죄인인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을 따르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레위는 세상에서 돈은 벌고 삶은 그럭저럭 보장이 되는 삶을 살앗지만 목적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루하루가 그냥 목적없이 그냥 흘러가는 세상 삶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보고 자신의 연약함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가령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돈을 목적으로 삼고 돈을 막상 벌고 보면 허무해집니다. 직장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앗는데 막상 직장을 얻고 보면 허무합니다. 마치 등산가가 정상을 목적으로 열심히 등산을 햇습니다. 그래서 산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은 허전합니다. 그렇습니다 . 우리의 인생의 삶은 의미있는 목적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의미있는 삶은은 돈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명예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권세를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의미있는 삶은 오직 주님을 따르는 삶인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길이십니다. 주님은 진리이십니다. 주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은혜받아 결단하고 주님을 믿고 따르는데 최대의 방해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님 앞에 나오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부끄럽게도 교회일 수 있습니다. 에수님당시에 종교인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 가장 주님을 방해하고 주님을 믿고 따르기로 한 사람들의 방해가 되듯이 교회 속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혹시 나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내 이웃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내가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교회에서 사람들을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에 레위와 같은 사람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람 남편을 6명이나 둔 여자가 나온다고 할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쩌면 그들의 과거를 알고 잇다면 교회 속에서 그들의 과거를 놓고 입방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역사를 잘 세워가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어쩌면 레위처럼 삶에속아도 돈에 속아서 죄를 짓고 범죄하여 실수한 인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오히려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은혜의 삶이 되어졌다면 우리의 관점과 생각을 너머서는 주님의 선의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앗습니까? 이제 주님의 은혜의 부르심에 믿음의 선한 인도를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3. 죄인들과 교제하시는 예수님

15-16절에 보면 마태의 집에 초청되어져 교제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 그의 집에 초청하여 식사대접을 합니다.
그런데 단순한 식사대접의 차원을 넘어서서 잔치를 벌렸던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라고 합니다.
그 자리에 주님과 제자들과 세리와 죄인들이 다 모여 먹으면서 교제를 갖았습니다.

우선 마태가 잔치를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감사의 축하입니다.나같은 죄인이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자신의 과거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성경에서는 식사나 만찬의 자리가 많이 소개됩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의 축하입니다. 성경에서는 마태뿐만 아니라 삭개오와 같이 오늘 사도행전의 간수와 같이 음식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을 봅니다.

두 번째는 간증을 위해서입니다.과거의 자기 친구들에게 주님을 증거하고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간증은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믿고 비밀로 하지 마십시오. 입술로 삶으로 간증하시기 바랍니다.

세번째로 마태는 더 이상 자신이 세리가 아님을 선언하기 위해서입니다.우리들은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 공적인 선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신자인 것은 숨기고 있습니다.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주님의 제자라는 것을 공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는 많은 손해를 보았을 것이지만 자기를 주님의 제자로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며 공적인 선언을 하기 의해서 잔치를 배설했던 것입니다.마태는 믿음으로 살 것을 보이기 위해서,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잔치라는 것은 원래 많은 사람에게 개방되는 것입니다. 이 잔치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마태라는 사람의 신분이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잔치에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15절에 보면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누가복음에 많은 세리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앉았다고 한 것을 보면 주로 죄인과 세리들이 그 날 잔치의 손님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말썽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유대나라뿐만 아니라 세계공통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교제를 한다, 친구가 된다, 그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영어에 친구란 말을 가리키는 단어에 “Compan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왔는데 하나는 “함께”란 뜻의 "Cum“이란 말과 다른 하나는 ”먹는다“란 뜻인 ”Panis“란 두 단어가 복합된 말입니다. 특 우정, 친구란 말은 “함께 먹는다”,  “같이 먹는다”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었으니 이것은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요 세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에도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목사가 창녀나 깡패들하고 교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가 안되겠습니까?
“가스총을 찬 목사”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서울 청량리 사창가에서 목회를 목사님의 간증집입니다. 밤에는 허리에 가스총을 차고 자율방범대장을 하기도 하면서 버림받은 창녀들을 위해서 목회를 하는 분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목회해도 문제는 없겠지만 그 때는 종교적으로 율법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문제를 삼고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6절의 내용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비록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었지만 실상은 예수님에게 대한 도전입니다.

여기에서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들은 율법에 충실하므로 그런 이유로 항상 남이 율법을 안지키는 일을 사찰하고 누가 율법을 어기면 그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일만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전혀 실수는 없었지만 인간미가 없고 자기는 늘 정당하고 다른 사람은 늘 정죄하는 그런 태도로 24시간을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리새인이라고 불리웠는데 그 이름 자체가 “분리한다”(Keep Separate)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평소의 시각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의 집에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웃고 떠들고 하는 예수님은 그들의 눈에는 마치 송충이를 보는듯이 불쾌했습니다. 그래서 이 기쁜 잔치집이지만 그들은 잔치집이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시돋힌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율법주의자들은 좋은 일에도 좋은 면을 부각시키지 않고 꼭 잘못된 점만을 꼬집어 지적하고 분위기를 뒤집어 놓는 것을 종종 봅니다. 소위 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질책을 하시고 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공격에 두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17절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각하고 계신 종교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종교관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종교관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종교관은 배타적(Exclusive)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시던 종교관은 포괄적(Inclusive)입니다. 죄인들이 모두 들어올 수 잇도록 문을 열어놓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놓앗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종교관은 정죄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종교관은 용서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종교관은 세리나 죄인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란 잣대를 정해놓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종교란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구별하는 잣대였지 자비를 베풀고 긍휼을 베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종교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까지도 끌어안고서 한 사람이라도 더 천국시민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인간이 구별한 계급이지 하나님이 구별한 계급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버림받은 그들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사랑에 용해되어 인간성이 새로워지고 삶이 새로워지고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제사의 종교, 예배의 종교로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종교는 긍휼을 베푸는 것이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고 버림받은 자들도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종교는 경건치 못한 자를 걸러내는 그물망이 아니라 경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싸안는 자비의 보자기였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였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항상 두 가지 씨앗에서 잉태되어 왔습니다. 한 가지는 구별의식이고 다른 한 가지는 차별의식이었습니다. 인간의 부끄러운 역사는 거대한 하나님의 한 가족을 항상 계급적으로 구별해왔고 차별해 왔습니다. 인종, 문화, 종교, 이념, 체제, 계급등을 두 계급으로 구분하고 우월한 쪽이 열등한 쪽을 배척하고 지배해온 역사가 인류가 걸어온 역사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정복하고 예속시키는 것이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해야 할 과제가 무엇입니까?
“배타성과 포괄성”의 문제 속에 우리는 또다른 구별의식과 차별의식으로 교회의 문턱을 높여서는 안됩니다.물론 복음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신앙의 배타성으로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이런 배타성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까?
나치가 유태인들을 종족 말살차원에서 6백만명이나 학살한 사건은 금세기의 사건이며, 350년동안 피부빛깔이 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수의 흑인을 지배해오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해방이 실현된 것은 1994년에 들어와서야 가능했습니다. 아직도 남녀차별, 사회계층의 차별, 사상의 차별로 이 인류는 고통받고 있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 배타성은 없습니까?
오늘 나의 삶에 차별의식은 없습니까? 더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고 혹시 나는 아직도 교제로부터 멀어져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하고 서로에게 아쉬움의 모습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좀 더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좀더 교제의 신앙으로 남들을 인정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가는 말

오늘도 주님은 죄인들을 바라보십니다. 자비와 긍휼의 눈으로 구원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죄인들을 자비의 음성으로 사랑의 음성으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교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과 깊은 은혜의 교제로 기쁨과 안식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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