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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나바의 믿음(2)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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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의 믿음(2) (행 11:19-26)

  11월이 시작되었습니다. 11월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계절입니다. 우선, 점점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시기입니다. 이제 추운 겨울이 성큼 다가옵니다. 우리의 인생도 겨울이 옵니다. 늘 인생의 겨울이 가까이 오는 것을 잊지 말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해 후회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11월은 점점 연말로 가까이 가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이제 곧 한해가 마무리 됩니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한해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못 다한 일들, 부족한 일들, 아쉬운 시간들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천 년 같은 신앙의 세월에 늦은 시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시편의 저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참되고 바르게 지낸 단 하루가 우리 전체 생애를 만회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충분한 시간입니다. 무엇보다도 11월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추수감사주일에 있고, 감사의 축제가 이어집니다. 신앙생활을 요약하는 2개의 단어가 있다면 ‘은혜’와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한결같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는 끊임없이 감사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제 우리가 지난날을 돌아보며, 또 앞으로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역시 믿음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을 때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계절을 보내면서 역시 절실히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서 더욱 큰 믿음을 가져야 갑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바나바의 두 번째 믿음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위로의 믿음으로 본을 보였던 바나바에게서 발견되는 또 다른 믿음은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3가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격을 갖춘 믿음입니다. 본문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나바의 배경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스데반의 순교이후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에 모였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예루살렘교회는 바나바를 그곳으로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안디옥까지 왔습니다. 이제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함께 더욱 든든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힘들고 어려운 성도들, 고난 받고 핍박받는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러자 성도는 힘을 얻었고,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사도행전의 또 다른 획을 긋는 모범적인 교회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제 이곳에서부터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시작되면서 더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런 사건을 알려주는 말씀에서 성경은 바나바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울러 소개해 줍니다. 그 가운데 먼저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착한 사람이란 뜻은 선한 사람, 좋은 사람, 부드러운 사람이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인격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바나바는 인격적인 사람, 인격을 갖춘 사람, 인격이 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을 잘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부드러운 분이셨고,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바나바는 이런 주님의 성품과 인격을 잘 닮은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람을 보고 '착한 사람'이라 평한 곳이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과 같은 표현은 더러 있지만, 착한 사람, 선한 사람이라고 말한 곳은 아마 바나바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다. 그만큼 바나바는 인격이 돋보인 사람,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나바의 이런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믿는 자는 누구보다도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이런 주님을 닮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은 바나바와 같은 착하고 선한 사람을 찾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람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이 너무도 악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모두가 악한 모습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악한 기질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이냐 하는 논쟁이 있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처음 인간은 선하게 지어졌지만, 죄를 범한 이후 악해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간의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악해지고 있니다.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일이지만, 얼마나 사람들이 악한 모습으로 사람을 속이고 이용하고 넘어트리고 혼미케 하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모두가 양같이 순하고 착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악한 모습이 드러나 우리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이런 때 사는 우리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 선하고 착한 사람이 그리운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 믿고 인격이 달라진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그는 처음 거친 사람이었고, 분노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여전히 옛 성품 때문에 제자들 사이에서도 적이 많고, 심하게 다투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베드로가 성령을 체험하고 선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의 거친 모습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변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성품과 인격이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목적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쓰면서 우리가 달라져야 할 인격을 신에 성품에 참여하는 자의 모습으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바나바처럼 착한 사람, 선한 사람, 인격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악한 세상에서 주님을 닮은 인격자로 변해 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실력이 있는 믿음입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바나바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일 년, 그리고 큰 무리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 바나바의 성경실력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의 또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바나바는 실력 있는 사람입니다. 인격과 아울러 실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의 가르침을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진리와 성경을 알면서 성숙해져 간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바울을 실력자로 인정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바울만큼 실력 있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바울은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할 만큼 탁월한 실력자입니다. 당대 어떤 사람과 견주어 뒤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당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최고의 학부에서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이런 실력으로 기독교의 역사와 교리의 체계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과 견주어 손색이 없는 인물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도 실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도 바울과 같이 많은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바나바 서신이라고 부르는 편지인데 성경에는 없지만 그것을 보면 논리와 체계와 문체에 있어서 바울에 뒤지지 않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무리들을 가르친 것을 보면 바울과 동등한 입장에서, 아니 더 높은 위치에서 주도하고 있음을 봅니다. 실제로 성경에 바나바와 바울을 소개하는 곳에서 두 사람의 순서가 바나바와 바울로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15장 이후에 바나바가 성경에서 사라질 때까지 이어지는 것을 봅니다. 나중에는 물론 바울이 이끌어가지만, 그 전까지는 바나바가 바울보다 앞선 사람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모든 면에서 당대와 후대에 뛰어난 실력자인 바울과 견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입니다. 실력자 바나바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함께 실력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모두 교역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 길을 가는 사람은 특별한 부르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크리스천의 이름으로 모든 분야에서 인정받고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믿음은 있는데 실력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아쉬운 말은 없습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직장에서는 성실하지 못한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평가는 삶의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그곳에서 실력자가 되고, 자기 전공분야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때에, 그런 면에서 이번 수능시험에 또 기대를 걸어봅니다. 이 땅에 예수 잘 믿는 학생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자녀들도 그런 일에 인정받아야 하고, 모든 어른들이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고 지원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가운데 앞으로 이 나라와 세계를 위해 뛰어난 실력자, 인정받는 우수한 인재들이 나와야 합니다. 여기에서 정치가, 경제전문가, 예술가, 법조인, 과학자, 전문인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와 후대를 향한 이런 꿈과 비전을 갖고 기도하고, 아울러 우리 모두 실력자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영성을 가진 믿음입니다. 본문 24절에 성경은 바나바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 하더라” 이미 강조한 것처럼 사도행전에서 ‘성령’이란 말을 빼면 전개가 안 되고 해석이 안 됩니다. 그야말로 사도행전은 곧 성령행전입니다. 모든 사건, 모든 이야기, 모든 사람의 배후에 언제나 성령이 빠지지 않습니다. 바나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바나바의 모든 인격과 실력은 성령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바나바를 소개하면서 성령과 믿음을 동일하게 강조합니다. 믿음이 성령이고, 성령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곧 성령의 사람이요, 영성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나바와 같은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영성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한국기독교가 영성으로 세계와 열방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지금까지 사용하셨고, 앞으로도 이런 우리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이 세상 어떤 나라, 어떤 민족가운데 우리 한국사람, 우리 한국기독교인만큼 영성을 가진 민족이 없습니다.

  세계에서 새벽기도회를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여기만이 아니라 외국에 사는 한인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난번 섬기던 교회에 이런 새벽기도회가 부러워 미국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 들여다보고 간 기억이 납니다. 세계에서 철야기도회, 심야기도회를 하는 나라 오직 한국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밤이 맞도록 기도합니다. 단 몇 분이니라 몇 시간을 기도하는데 전심전력합니다. 세계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나라 우리만큼 잘 하는 민족이 또 없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온 말씀 그대로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하늘을 향해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드리는 민족입니다.

세계에서 통성기도를 우리만큼 잘 하는 민족이 또 없습니다. 외국 사람들은 기도를 이성적으로 합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때 함께 기도하질 못합니다.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여러 사람이 큰 소리로 함께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이 듣든지 말든지 크게 기도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크게 기도하면 자기는 더 크게 기도합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통성기도가 잘 되어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나라가 없습니다. 세계에서 우리처럼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민족도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무릎을 꿇지 못합니다. 소파문화를 가진 사람들이고, 다리가 길어서 앉는 것도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릎을 꿇습니다. 엘리야처럼,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자세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더 간절하고 진지한 것입니다. 세계에서 우리처럼 예배시간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민족이 없습니다. 외국에서 가서 예배를 드리면 늘 그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멘의 신앙입니다. 기도할 때, 찬양할 때,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이 모두가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성 있는 한국기독교인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고, 큰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지금 세계교회, 특히 유럽교회는 쇠퇴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교회에 노인들만 몇몇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점점 교회는 힘을 잃고 이젠 문화재가 되어가고 외국인을 위한 관광코스가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건물을 유지하기 힘들어서 임대를 줍니다. 처음에는 임대를 원하는 업종의 사람들을 골라주더니만 다급하니까 이제는 아무나 조건만 맞으면 교회당을 임대해 줍니다. 그래서 유럽 교회가운데는 교회가 술집으로도 임대해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해야 할 거룩한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차지하여 술파티를 엽니다. 특히 일 년 중에 파티나, 명절이나, 송구영신의 때에 그야말로 난리가 납니다. 교회에 분명 사람들이 북적 거리기는 하는데 그들이 모인 것은 예배 때문이 아니고, 집회나 기도회를 갖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술파티를 위해서입니다. 거룩한 교회에서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술 먹고 소리를 지르면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교회를 보면 동네마다 쉽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이렇게 연말이면 교회가 술 파티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예배당 한쪽 구석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한인교회의 성도들입니다. 눈물과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지난날을 아쉬워하며 회개하고, 앞으로 새해를 잘 보겠다고 목청을 높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거룩한 교회에 공존하는 두 그룹의 현격한 대비를 통해 지금 이 시대, 지금 우리 민족, 지금 우리의 모습을 드려다 보게 합니다. 우리처럼 영성 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영성을 통해 영광을 받으셨고, 한국기독교와 우리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당대와 후대에 길이 이어갈 모습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성입니다. 1세대 성도들이 가진 영성을 2세대가 그리고 다음세대가 계속해서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나바처럼, 스데반과 빌립과 고넬료처럼 영성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바나바의 믿음, 지난주에 위로하는 믿음에 이어 오늘은 인격을 갖춘 믿음, 실력이 있는 믿음, 그리고 영성을 가진 믿음입니다. 감사의 달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늘 감사하면서 한 주간도 바나바처럼 믿음의 길, 승리의 길을 향해 힘 있게 출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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