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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과 삶의 전환을 통해 온전한 성도가 됩시다 (마 5: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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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삶의 전환을 통해 온전한 성도가 됩시다 (마 5:38-48)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 마음에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내 죄가 씻음 받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 됐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라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시작이고 우리는 그 아름다운 출발로부터 시작해 우리의 삶의 실제까지 이르는 새로운 목표들을 향하여 진행하게 됩니다.

이제 그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삶은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대변혁의 역사의 장에 들어섭니다.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니 생각이 달라지고, 기준이 달라지고, 기호가 달라지고, 사람을 선택하고 만나는 일도 달라집니다.
우리 삶의 무엇이든지, 즉 말하자면 직업의 선택의 기준, 직장의 선택의 기준, 이사할 집을 정하는 기준, 하다못해 어떤 옷을 입을까? 무슨 음식을 먹을까? 하는 것까지도 전 방위적인 기준이 달라짐을 봅니다.

즉,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씻음 받고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이제는 생활로까지의 온전한 전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닮아가는 주의 축복, 즉 성화의 길, 성도의 성숙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서도 우리의 뇌리에 깊이 인식되어 언제나 도전을 주고 있는 말씀중의 한 부분인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성도의 모습’을 이루고자하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눈은 눈으로, 또 이는 이로 갚으라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라 누구든지 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고 누구든지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하면 겉옷도 주고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 가고자 하면 십 리까지 가주며 또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그리고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지켜야 된다는 당위론적인 마음속의 수긍은 있으나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마음을 우리는 누구든지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주장하시는 분도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루시겠다는 주님의 의도요, 이것을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권세임을 우리는 믿기에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첫 번째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믿음은 결정적인 사고와 발상의 전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관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오른뺨 때리면 왼뺨까지 대고 오 리 가고자 억지로 원하면 오 리가 아니라 우리는 십 리까지 가주고 속옷을 송사하여 뺏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한 벌 더 줄 수 있는 마음이라는 것은 작은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큰 생각의 설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뺨 한대 맞는 것쯤이야, 또 속옷 한 벌 달라고 하지만 나는 또 여러 가지 옷이 있으니 겉옷도 또 한 벌쯤 더해줄 수 있어. 오 리 가고자 하지만 나는 힘도 남고 또 배려해서 더 가줄 수 있지.’ 라는 정도의 마음에다 남을 돕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길거리 가다보면 이런 사람 있잖아요.
"어디로 가는 데 길 어디로 가면 됩니까?" 하고 물어보면
"예, 오른쪽입니다." "왼쪽입니다." "쭉 가다가 100M쯤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지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면 충분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잠깐 저를 따라오십시오." 하고 한참 가서 "이쪽으로 가면 됩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만날 수 있습니다.

즉, 오 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십 리까지 가 줄 수 있는 사람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사람이 좀 바보 같다고 생각할 만큼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이와 같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음을 봅니다.
따라서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가지고 있는 작은 생각과 유익에 대한 개념을 넘어서서 이제 더 큰 뜻 가운데 주의 뜻을 이루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생각과 유익을 넘어서는 큰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작은 문제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 얘기하는 것 보면, 옆에서 들으려고 해서 들은 것은 아니지만 옆에 있다 보면 아주 우스운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서로 막 말로 다투는 것을 보는데 옆에서 보면 도대체 저것을 가지고 왜 다툴까?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문에 무슨 얘기가 났느니, 방송에 무슨 얘기가 있느니, 누가 옳으니, 뭐 이런 얘기하는데 하나도 안 중요해요.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누구 말이 옳은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는 말입니다.

제가 한 20년쯤 전의 일인데 아직까지도 장면이 선명히 떠올라서 오늘 말씀을 드릴 수 있는데요 제가 전에 있는 교회에서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어떤 중고등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체육대회를 했는데 그 체육대회 도중에 쉬는 시간이 있었는데, 여기 제가 앉아있고 그 옆에 저와 같이 사역을 하는 부목사님이 같이 앉아계셨고요 그 옆에 집사님이 앉아계셨어요. 다 제가 잘 아는 분입니다. 제가 한 교회에 한 20여년 넘게 있다가 보니까 성도들 많지 않은 교회에 다 알죠. 그런데 두 분이 무슨 얘기를 하는데 자동차와 관련된 얘기란 말입니다. 자동차와 관련된 얘기인데 제 옆에 앉은 목사님이 자동차 운전도 오래 하셨고 고치는 것도 잘 하시고 자동차에 대해서 좀 지식이 많은 분이거든요. 그런데 그 옆에 계신 분하고 자동차에 관해서 무슨 얘기를 하다가 서로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을 얘기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고 각각 다른 주장하는 것 보니까 서로 간에 주장하는 모습이 서로 강한 의견의 관철을 원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어떤 아무런 이해도 없고 지식과 가지고 있는 상식의 자랑이겠지요. 제가 옆에 있는데 은근히 절 보는데 제가 둘 중에 어느 편이라도 편들어주기를 원하는 눈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자동차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요 또 제가 그 누구 편을 들어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그래서 편들어주면 그 사람이 판정승을 하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옆에서 계속해서 대화가 오고 가는데, 뭐 대화라기 보다는 주장이겠지요. 참 마음에 안타깝더라고요. 왜 그렇게 마음이 안타까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체육대회 다 끝나고 맨 나중에 제가 그 목사님하고 둘이 같이 있을 기회가 있었어요. 가깝게 늘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니까 뭐 이러저러한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자동차에 대해서 참 많이 아는데 나는 목사님 때문에 자동차에 대해서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기분 좋아진 다음에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아까 목사님이 그 옆에 있는 집사님하고 자동차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나는 왜 그런지 마음이 참 안타까웠어요. 나는 목사님이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전문가가 되고 교회 목회 일에 관한한은 다른 누구의 의견을 능가하는 이런 해박한 전문가가 되기를 원하지만 목사님이 자동차에 대해서 많이 몰라도 목사님은 목회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그 집사님이 하신 말 들어주고 집사님의 말, 집사님은 세상에서 살고 계시니까 세상에 대한 지식과 모든 것은 우리보다 더 나으니까 그분의 말씀을 들어주시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성경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탁월이 알아야 하고 교회 목회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이 어떤 다른 이견을 내더라도 우리의 말이 그들에게 권위로써 인정될 수밖에 없는 이와 같은 권위와 힘과 실제 능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얼른 알아들으시더라고요. 그리고 또 저하고 관계가 좋으니까 또 기꺼이 말씀을 받아주셔서 정말 마음에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요. 목사가 성경에 대해서 해박하게 알고 또 교회 목회 일에 대해서는 어떤 성도들보다 더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반복되어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합당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목사가 자동차에 대해서 모른다고 부끄러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목사가 자동차에 대해서 뭐 많이 연구를 했겠습니까? 오히려 그럴 때
"아! 그렇군요. 제가 몰랐는데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제 팬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분에게 어떤 일을 설득시킨다고 해서 그분이 저를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마음에 상심해서 마음이 서운해질 수도 있는데요.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의 본질이 아닌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서 그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말 큰마음을 가지면 별 것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나보다 상대방을 세워줌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옷 여러 벌이 있는데 속옷 뺏으려고 하는 자에게 겉옷 한 벌 더 주며 내가 입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까지도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꼭 이겨야 될 필요 없고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마음상한 소리 들었을 때, 마음 상하게 듣지 않고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다.’ 하고 상대를 이해하고 혹시 내 잘못은 없는가? 하고 돌아볼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사실 살아가면서 너무나 많은 경쟁을 거쳐야 되고, 남을 밟고 일어서야 내가 위치를 정하고 설 수 있으며, 때로는 남을 이기고 내가 일어서야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속에 살다보니까 모든 것이 너무 투쟁적이 되고, 또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너무 말하자면 전투적이 돼버린 것 같아요.
우리가 싸우지 않아도 이길 수 있고, 남에게 져주면서도 그 사람 마음을 살 수 있고, 우리가 남을 밟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세워가면서 더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유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와 같은 길을 찾으면 또 주님의 은혜로 찾아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마음을 조금만 더 키우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 오른뺨을 때려도 우리는 또 왼뺨까지 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뺨을 때리다니.” 뺨을 때려서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다른 데를 때려도 기분나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애들 그런 얘기하잖아요.
"애들 머리를 때리다니!"
이러잖아요. 머리 안 때리고 발고 차도 화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괜히 기분 나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핑계를 삼으려니까 그러는 것이지요.
"다른데도 아니고 머리를 때리다니!" 다른 데를 때려도 기분 나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이 늘 이렇게 해서 내 기분 나쁜 것을 표현하는 것인데요, 정말 우리 살아가면서 우리는 정말 더 중요한 것을 위해서 더욱 마음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한 일 년쯤 지난건지 모르겠는데 제가 몇 개 잘 보지 않으니까 본 것은 기억이 잘 나는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뉴스인지 아니면 어떤 시사프로그램인지 그런 건데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도 아직까지도 배고픈 사람이 있고 정말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지하철인데 알루미늄으로 만든 박스가 있는데 거기서 어떤 아주머니가 이렇게 간단한 음식이나 신문이나 이런 것들을 팔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카메라로 찍은 것이겠지요. 여러분들도 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허우대도 멀쩡한 젊은 사람이 옷도 남루하게 입지 않고 보통으로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 앞으로 오더니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제가 너무 배가 고파서 돈은 없는 데“ 그 꼬챙이에 달린 어묵을 가리키면서
”저거 하나만 제가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정말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저것 천 몇 백 원인데 나도 그 물건을 많이 팔지 못해서 오늘 어려운데 내가 이것을 줄 수는 없고 이 우유나 하나 먹고 가라.”고 하면서 우유를 하나 집어서 주더라고요. 주먹만 한 팩에 들은 것이 아마 우유가 값이 더 싼 것 같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참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 아주머니에게 어묵 하나 꼬챙이에 달린 것을 달라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주머니도 생활이 크게 여의치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 천 몇 백 원짜리 하나 그냥 줄 수 없는 여건인지 “내가 참 돈을 많이 못 벌어서 나도 어려운데” 하면서 우유를 하나 집어주면서 그러니까 그 사람이 우유를 하나 먹고 가더라고요.

참 우리주변에 “요새 세상에 배고픈 사람이 어디 있느냐?” 얘기할지 모르지만, 어디가도 무료급식소 다 있고 어디가도 밥 먹을 때 다 있는데 그렇지만 정말 그렇게 배고픈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 사람도 허우대도 멀쩡하고 옷도 비교적 평범하게 입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것을 볼 때 그런 사람에게 ‘아니, 허우대도 멀쩡하고 사지 다 건강한 사람이 왜 일해서 벌어먹고 살지 왜 거기 가서 어렵게 사는 사람에게 왜 도움을 청하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 생각해 보면 저는 그 아주머니 마음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 당신이 또 당신 나름대로 말 못할 어떤 사정이 있겠지. 당신이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지만 또 그럴 사정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또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도 돈이 많지 못해서 당신한테 하다못해 천 몇 백 원짜리도 줄 수 없으니까 그저 내 능력으로 줄 수 있는 것이 그저 우유하나니까 이것이라도 들고 가쇼 하고 주는 그 마음도 저는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가운데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 이해하려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 이해하려고 작심하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 얘기하잖아요.
물고기 한 마리 주면 한 끼 먹여주는 것이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 먹여주는 것이다. 이런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너무너무 배고파서 찾아온 사람에게 “당신 그러면 안 돼. 당신 이렇게 해서 돈을 벌어 이렇게 먹고사시오. 가시오.” 하면
그 사람이 “평생 동안 먹고 살 길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것 같습니까?
마음의 분노로 말미암아 마음이 더 찌그러질지 몰라요.
배고픈 사람에게 일단 밥이라도 한 끼 주어서 정신을 차리게 된 다음에 뭘 가르치던가 말든가 해야지 그 사람이 정신이 들어서 그 말을 듣고 배우지 않겠습니까?

정말 배고픈데 배고파서 정신을 못 차리고 정신이 혼미한데 그래서 지금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내 감각도 없을 정도의 지경에서 도움을 구하는데 배고픈 것도 없을 지도 모르는 지경에서 도움을 청하는데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판단을 상실해가는 지경에 있는 사람에게 판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남의 입장을 배려한다, 남을 이해한다.’라는 것은 우리 마음이 조금 더 커지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왜 저 사람이 나에게 와서 억울한 송사를 걸고 왜 저 사람이 나에게 와서 또 나에게 무리한 부탁을 할까?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지만 또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큰 사람이 된다면 또 이해할 수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처의 범위 내에서 우리도 대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보면 다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 일입니다.
뺨을 때리다니, 속옷을 뺏어도 그냥 뺏는 것이 아니라 송사를 해서 뺏어요. 또 뿐만 아니라 오 리를 가는 것도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합니다. 이와 같이 아주 자극적인 문구를 쓰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서 정말 우리 마음을 부글부글 끓게 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배려의 심정이 있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또 모든 게 우리들에게 지경이 넓어지면 또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눈높이가 달라지면 우리가 바라보는 일과 지점이 달라지면 우리는 또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5층 꼭대기에서 보는 것과 2000m 산에 올라가서 아래를 보는 것과 전혀 달라요. 보이는 것도 틀리고 보이는 것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5층 꼭대기에서 보면 보이는 것은 저기까지 봅니다. 2000m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저 아래까지 보여요. 보이는 것도 달라져요. 눈앞에 보이는 범위도, 개수도, 모든 것도, 분량도 달라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실체가 다를 뿐 아니라 그 의미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요 앞에서 볼 때와 멀리 두고 볼 때의 그 의미가 나에게 다르게 옵니다.
‘자동차구나!’ 라고 느껴지는데 그냥 자동차라고 느껴지지 않고, 5m앞에서 볼 때와 2000m위에서 멀리 있는 자동차를 볼 때와는 그 자동차에 대한 의미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모든 일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의 지경이 넓어지고 우리 마음이 커지고 넓어지면 우리의 모든 것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관의 나하나 생각하던 것에서 또 다른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단기선교라도 자주 다녀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야, 돈쓰고 가서 선교 여행하는 거지, 무슨 선교냐? 여행하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그러다 어떤 눈에 띄는 한 가지 마음의 느낌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여러 가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이면 바뀝니다.
이렇게 살자. 동쪽으로 가자, 서쪽으로 가자.
한 문장이면 바뀌는 것 아닙니까?
서쪽으로 가던 사람이 동쪽으로 가자면 그 인생은 완전하게 바뀌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자. 한 문장이면 됩니다.
단어 하나면 우리 인생은 바뀌는 것입니다.

우어 인생의 어떤 한 가지 사물을 보고 어느 날 문득 번뜩이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새로운 느낌이 있다면 그것을 통에서 우리 인생에서 새로운 방향이 설정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수많은 시간과 물질과 또 내 마음을 투자해서 어느 날 문득 내가 단어 한 개를 붙잡으면, 내가 한 줄 문장을 붙잡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 삶에 전혀 새로운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유익과 손해에 대한 생각의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작은 손해가 손해가 아니라 진정한 유익임에 결국 인생에 대한 큰 투자임을 생각하면 우리인생은 또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내 앞에 어려운 사람, 정말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징계해 버리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언젠가는 그와 나도 위치가 바뀔 수 있다, 또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든 작은 것 가지고 베풀 수 있다면 큰 것으로 나중에 돌아올 수 있다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지금 손해가 손해 아니고, 지금 유익이 유익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의외로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의외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너무나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인생 '새옹지마'라고 얘기하지요.
복인 줄 알았는데 화가 되고, 화인 줄 알았는데 그게 복이 되고, 우리 인생이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내게 이게 정말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억울한 일 때문에 큰 영화를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금 내게 주신 것의 의미와 의도를 파악해야 합니다.
내게 주신 여건, 건강, 능력, 지혜, 모든 것이 도대체 왜 내게 이것을 주셨을까를 생각하면 우리는 다르게 생각이 됩니다. 과연 이게 내게 손해라고 하나님께도 손해인가? 내게 손해라도 하나님께 손해인가를 생각하면 내가 정말 이것을 손해라고 생각해야 될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준비하고 준비해야 됩니다.
단계적인 준비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이 원하실 때 다 내려놓을 수 있고 또 다 내 것을 부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백성으로 마음의 평안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유익과 손해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면 마음도 편해지고 넓어지고 세상이 달라지는 겁니다. 가치관의 변화, 기준의 변화, 우리의 모든 방향의 변화, 생각의 전환, 우리 마음의 모든 것이 달라지면 우리는 또 달라지는 겁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정서의 기준도 전환되는 겁니다. 지금 좋다 나쁘다는 정서적기준이 언제나 영구불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특징은 기준도, 기호도, 감정도,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습니다.
내 판단과 기준이 영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제가 요즘 참 이상한 것을 한 가지 느끼는데 제가 전에는 과일 중에서 배를 좋아했습니다. 배를 먹으면 물도 많고 시원하고 배가 좋잖아요. 식사도 하셨는데 한 쪽 드시고 싶죠. 배를 좋아하는데 전에는 사과를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배도 먹기는 먹지만 배보다 사과가 좋으네요. 그래서 아침마다 제가 사과를 한 개씩 꼭 먹어요. 그리고 저녁에도 사과를 먹는데 우리 딸아이가 저보고 뭐라고 얘기 하냐면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아침사과는 금사과, 점심사과는 은사과, 저녁사과는 독사과,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녁에 사과 먹을 때마다 독사과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좀 찜찜하기는 한데 저녁에 사과를 먹으면 산도 나오고 그래서 그렇다는 뜻일 것 같은데 하여간 조그만 아이가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하여간 제가 사과가 맛있어요. 그런데 제가 도저히 그 이유를 제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 나는 전에 배를 좋아하던 사람이 왜 지금 사과를 좋아하는가?
왜 이렇게 마음이 변심되는 것일까? 내 마음의 변심을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기 뭐 생물을 전공한 분이나 또 의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으면 "아, 그건 목사님이 나이가 들어서 남자가 나이 들면 배에 어떤 성분이 있는데 그것을 좋아하는 성분보다 사과에 든 성분이 우리 몸에 필요합니다." 이렇게 설명을 하면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런 내용은 복잡해서 잘 모르고 하여간 저는 배를 좋아하던 사람이 사과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제가 저를 보니까 사람이 바뀌던데요. 달라지더라고요. 전 제가 이렇게 바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뀌더라고요. 우리의 정서와 기호도 바뀌어지더라고요.
우리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한다 하는 것은 우리가 영구히 보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기분 나쁘다는 것이 영구히 기분 나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나도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겁니다.
'나는 내 마음에 벗어나는 것 절대 못 참아!' 시간 지나면 참을 수 있습니다. 은혜주시면 그 이상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모든 내용들은 우리들에게 불가능한 내용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은혜주시고 마음 바꾸면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것도 좋아지고 싫어하던 사람도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좋아지는 겁니다.
늘 이렇게 우리 생각하거든요. 싫어하는 것이 참음의 범위가 아니라 좋아함의 범위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그 사람을 싫어했는데 그 사람을 참아줄 뿐이 아니라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을 이해할 뿐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호감을 가질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내 뺨을 때린다. 우리가 정말 용기가 있다면 "한 번 더 때려봐." 왜냐하면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풀린다면 뺨 한 대 더 맞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속에 그 정도의 여유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여러분 우리가 세상 떠날 때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때 그 음식을 꼭 먹었어야 되는데......' 그리고 죽겠습니까? 아니면 (죄송합니다.)
'내가 그때 그 백화점에서 봤던 그 옷 내가 꼭 입고 죽었어야 되는데......' 여러분 그러면서 죽을 것 같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닐 것 같습니다. 여러분 세상 떠나면서 무슨 생각하겠습니까?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셨던 그 일을 내가 그때 했어야 되는데...... 아들아, 딸아, 정말 내가 너희들 키울 때 별로 잘 못 키웠어도 그래도 나로서는 힘들여 키웠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너희들 정말 그 좋은 일 좀 해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를 생각해서 너희가 한 번 더 수고해서 그 일을 꼭 해라." 라고 유언이라도 남겨서 그 일을 하고 싶은 게 아마 우리 삶의 소원일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삶의 정말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라는 것. 우리 마음속에 더욱 더 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다보면 이제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 주님이 좋아하는 사람들, 주님이 용서하시는 사람들, 오늘 성경을 보니까 주님은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해와 모든 비를 다 동등하게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넓으신 겁니까?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은 좋고 싫은 것은 싫은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동등하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 씀을 보면 정말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써야하는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의 개념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과연 내 것인가? 하나님의 것인가?
나에게 맡겨주신 의미가 무엇인가?
어디에 사용하라는 것인가?
우리는 기호와 정서에 따라서 움직일 때가 가장 저급했던 때이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두 번째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한계선을 넘어서는 보다 적극적인 전환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너희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너의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할 수 없는 일, 내 마음에 안 드는 일, 이제까지 내가 못했던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내 변화와 전환은 내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던 한계선 자체가 깨어지는 더 큰 변화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이만큼 변화될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그 만큼 변화되는 것을 넘어서는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나 끝까지 할 거야." 라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하루하루 차근차근히 그 일을 이루어 가다보니 그 일이 이루어져 끝까지 온 것입니다.

제가 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눈앞에 이루어지는 일을 보면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처음에 여기 17년 전에 여기 딱 한 사람이-요 두 라인이면 바로 이쪽 두 번째 줄에 한 분이 예배를 드렸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매주 마다 두 분 더 오고 세 분 더 오고, 다섯 분, 열분, 스무 분, 서른 명, 이렇게 온 게 17년 동안 쌓이니까 요즘처럼 1부에서 6부까지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되더라고요. 제가 보니까 하루하루 조금 조금씩 쌓인 것이 끊임없이 쌓여져 가니까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정말 큰 차이가 나더라고요.

우리가 어느 날 문득 조금씩 조금씩, 하루하루, 날마다 날마다 우리가 변함없이 한걸음 한걸음 가게 될 때 결국 그것이 나중에 "어 저기까지 차이가 나는구나!" 라는 차이가 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가다보면 그것이 끝까지 가는 겁니다. 다만 포기하지 않고.

지난주에 제가 세 가지 말씀드렸지요. 뭐죠?
약속을 지키지 않음, 그다음 중도에 포기, 권태 이 세 가지가 사단이 우리를 시험에서 언제든지 일을 망치는 거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약속을 지키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고, 권태를 극복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것 중의 요소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끝까지 하루하루 그 일을 하다가는 겁니다.

저는 요즘 제가 해야 될 일이 인물을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인물을 키운다는 것은 매우 확장적인 역사입니다.
우리가 인물을 키우면 그 인물은 우리들을 더 넘어서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을 통해서 습득한 것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더 합할 테니까요. 그 다음의 인물은 그 사람을 더하여서 그 사람의 것에 자기의 것을 더하고 가다보면 점점 확장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게 역사적 발전이거든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 한계를 넘어서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꼭 내 손으로 그 일을 안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누군가의 손에서 이루어져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을 하면 우리는 누구도 세울 수 있고 누구라도 협력할 수 있고 누구라도 그 일을 점 수 있도록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나무하나 자르는 것은 단칼에 자를 수 있습니다. 톱 하나대면 단 5분이면 자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 하나 키우는 것은 수십 년, 수백 년 걸릴 수 있습니다.
자르는 것은 잠깐인데 세우는 것은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잖아요. 정말 우리의 삶 가운데 '야, 내가 일 깨트리는 것은 쉬운데 이루는 것은 너무 어렵다.' 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순간에도 내가 끝까지 버텨야지. 내가 어떻게든 끝까지 참고 이해해야지. 끝까지 그를 용납해야지. 라는 마음 가지면 우리는 우리 한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시대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크심을 보면 우리의 작은 마음이 때로는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는데 그래서 인간이 추방당했는데 그 인간하고 화해하기 위해서 인간이 값을 내야하는데 인간이 값을 낼 것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값을 내고 인간과 화해하셨단 말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탕자의 비유를 보면 이 탕자가 아버지를 강압적으로 강요해서 재산을 반분해서 나갔습니다. 다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거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나쁜 놈아!” 그리고 아마 내쫒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목을 끌어안고 울고 잔치를 베풀고 채색 옷을 입히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앞뒤가 안 맞아요. 그런데 이게 아버지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한계를 깨뜨리는 겁니다. 도저히 앞뒤가 안 맞고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얘기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이쯤하면 됐다.' 라는 것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합니까?
'여기서 부터가 출발이야.'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신이야.' 라고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 때, 그 때 우리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바꾸어야 됩니다. 그게 뭐죠?
'여기가 출발이야.'
자 따라서 합시다.
“여기서 부터가 출발이야.”
우리는 그것이 우리 헌신의 최고가 아니라 우리 헌신의 출발이란 말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하나님,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일을 이루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터 또 출발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정말 우리의 온힘이 빠지도록 우리가 더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모든 힘을 다하여 헌신의 일을 이루고 나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여기서 또 출발하겠습니다.'
우리 한계에서 비로소 출발을 새롭게 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이제까지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나의 차이가 너무 커서 하나님이 온전하심같이 너희가 온전하라
아니 뭐야 이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될 수 있겠어 하나님과 나는 큰 차이인데......
그것은 우리의 좌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하는 우리 믿음의 출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현격한 차이가 있다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결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같이 갈 수 있는 은혜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라고 하셨으니 온전함을 위한 달려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온전함같이 온전하기 위해서 목표를 정하고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제일 생각이 많아졌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온전함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을까?
아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같이 온전해지겠어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되지도 않을 일을 괜히 말씀하셔서 우리를 좌절시키려고 하신 것일까?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계를 가지고 살지 말고 항상 우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거룩과 진정성에 대한 목표와 기준을 날마다 새롭게 설정하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신앙의 자만감, 어리석은 착각으로 인해서 ‘이만하면 됐지’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향하여 끝까지 가고 또 가는 겁니다.

이미 이전 것은 이루었다함도 아니요, 얻었다 함도 아니요,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달려가는 삶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라는 것은 너희가 그 정도 하면 됐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를 위하여 달려가고 또 달려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가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기 위하여 달려가는 사명이 있고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실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말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해가 되실까요?
아버지가 있는데 역기를 번쩍 번쩍 들고 있어요. 조그만 아들이 왔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들아, 너는 이것보다 더 무거운 역기도 번쩍 번쩍 들 거야.”
그런데 아들이 보니까 “무겁네, 한 번 들어볼까?” 움직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이랬어요. “걱정 마, 너는 이것보다 더 무거운 역기도 들 거야” 그러면 아들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말도 안 돼. 나는 이거 움직이지도 않는데 내가 이것보다 더 무거운 것을 어떻게 들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버지의 말이 맞아요? 아들의 말이 맞아요?
아버지는 아들의 삶을 알고 있어요. 아버지는 아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의도도 있습니다. 아들이 자라서 힘을 기르게 되면 아버지보다 더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뜻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사랑하시고 기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은혜를 이루게 하시고 싶으신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강요나 부담을 주거나 좌절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기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 대한 기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향하여 목표를 정하고 나의 한계를 긋지 않고 ‘이만하면’ 하고 자만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주를 닮아가는, 우리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하다보면 참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분에게 어떤 말을 합니다. 그럼 이분들이 그 말을 전달하면서 어떤 일을 하는데 제가 의도했던 것을 100%발휘하고 또 그것보다 더 잘 설명하고 그 일을 해서 그 말을 전달받은 사람이 목사를 다 존경하고 흠모하고 ‘아, 정말 목사님 좋은 일 하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을 어떻게 전달했는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목사에 대해 증오심을 가집니다. 그것 참 신기하더라고요.
똑같은 엠프에서 똑같은 스피커를 통해서 똑같은 얘기가 나갔는데 그 말을 똑같이 듣고 나가서 어떤 사람은 그 말을 전달하는데 정말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고 마음이 합해지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을 가지고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에 증오심을 심어주고 불만을 심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인생이라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들려오는 얘기 믿지 않습니다.

참 난감한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이해와 해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셨을 때 우리는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돼? 말도 안 돼.’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주님이 무슨 뜻을 가지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
나를 좌절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
나에게 힘을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
‘너는 안 돼. 그러니까 아주 처음부터 포기해.’ 그러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이 우리에게 온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부담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부담을 주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은혜를 주고,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온전함을 위해서 달려가는 우리의 삶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고, 감격이고, 은혜고, 은총이어야 합니다.
그래, 내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주님이 우리에게 온전하라고 했으니 우리에게 기대하고 또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은혜를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니 한 번 가보자.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과정 속에 어느 날 문득 넘어짐에 대해서 내 자신에게 또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삶에 깨닫는 것은 평범할 때는 일이 잘돼서 깨닫는 것은 드뭅니다.
자기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어려워보고 넘어지고 하는 순간에 깨닫는 것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각양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들을 온전케 하실 겁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보면 그렇게 마음에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이 이 분들을 어떻게 사용하실까?
어떻게 이 분들을 통해서 주의 역사를 이루실까?
하는 것에 대해서 기대가 됩니다.

저는 교회를 생각할 때 정말 하나님께서 갈릴리 한 모퉁이에서 시작해서 그 갈릴리 호수주변에서 시작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2000년이 지난 지금, 2000년 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우리에게 역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목사가 성경 말씀을 전해드리고 우리 성도들의 마음은 그 말씀을 받아
‘그래, 나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 나도 내 한계를 벗어나서 정말 누구든지 이해하고 내가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할 수 있는 거야.' 하는 마음을 2000년 전에 계신 예수님의 복음이 지금 우리들에게 전달되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가 시간과 공간의 역사를 넘어서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겁니다.

저는 분당 한 모퉁이에서 시작된, 이와 같은 작은 한정된 모임들이 우리 시대와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한 줄기의 분량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을 우리 성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 흘러갈 것인지는 주님이 아실 것이고, 우리는 가는데 까지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저는 기대가 됩니다.
교회가 기대가 되고, 우리 성도들이 기대가 되고, 한 분 한 분을 통해서 어떤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인가 기대가 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을 기대합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여호와를 기대합시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원수를 아직은 사랑하지 못해도, 오른뺨 때리면 나는 왼뺨을 아직 돌려대지 못해도, 오 리 가자는 자에게 내가 십 리를 가주지 못해도, 아직은 못해도 아직 못할 뿐입니다. 영구히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린 소망을 품고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겁니다.
어느 날 내 마음속에 도무지 현실성이 없었던 이러한 낱말들이, 어느 날 내 마음속에 너무 현실적으로 와 닿는 겁니다. 내게 너무나 기쁨으로 와 닿는 겁니다.
그리고 '아, 내가 참 그때 그랬었지.' 그러면서 나의 과거의 모습들에 대해서 내가 웃으면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때가 올 겁니다.
'내가 그때 그런 말 한 마디 듣고 왜 그렇게 마음이 볶였어. 내가 그 정도의 얘기에 왜?'
듣는 얘기에 귀가 순해지고, 마음이 순해지고, 혀가 순해지고,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순해질뿐더러 우리의 말 한 마디 우리의 모든 것들이 다 새로워질 겁니다.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과 부지런한 손과 발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이들 모두에게 진정한 섬김과 사랑의 은혜를 베풀어줄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님의 온전하심같이 우리도 한 번 온전해지기 위해서 달려가 봅시다.
어느 날 문득 그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든 교회 식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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