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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게되는 만남의 길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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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되는 만남의 길 (막 10:46~52)

삼중고의 고통을 지니고도 삶의 정상에 선 헬렌 켈러는
“3일간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질문 앞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첫째날에는 내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 준 사람을 보고 싶다.
둘째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밤이 낮으로 바뀌는 가슴 떨리는 기적을 보고 싶다.
셋째날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들의 일상을 보고 싶다.

우리는 헬렌 켈러가 소망하는 것을 다 가지고 살고 있다. 정말 감사하다. 감사할 것이 없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일상을 보고 이해하고 싶다는 것이 보지 못하는 자의 소원이고 소원이다. 정말 본다는 것은 축복이다. 보지 못하는 삶은 제한과 고통을 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신앙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삶은 더 많은 고통을 낳고 죽음이라는 불행을 낳는다. 그러므로 육안이든, 영안이든 보게 되어야 한다.

그 보게 되는 만남의 길이 있을까?

바디매오는 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다. 그러나 여리고 길목에 선 바디매오는 보게 되었다. 여기 바디매오가 어떻게 보는 자로 다시 살아갈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가 바디매오를 외면하지 않고 만나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를 부르는 바디매오의 소리를 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여기 보게 되는 만남의 길이 있다. 마음껏 감사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마음껏 밤낮이 바뀌는 저녁 노을을 볼 수 있고 아니 인생의 운명이 바뀌는 축복의 길, 구원의 길이 있다.

첫째, 예수에 대해 듣는 일을 귀히 여기라. (막10:47上)

막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라고 하였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삶의 자리가 길가였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한 길가에 앉아있기에 들려지는 소문이 많았다. 그러나 들려지는 일 중에서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들었을 때 소리를 질렀다. 이는 듣는 말 중 예수에 관한 말보다 귀한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길가에서 듣는 소문 중 예수, 그 분에 대한 말이 제일 소망적인 말이었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삶의 초점이 있다는 말이다. 비록 삶의 자리가 먼지 나는 길가요, 초라하기 그지 없는 거지의 신분이지만 예수시라는 관한 말을 듣는 일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었다.

보게 되는 축복은 다른 것이 아니다. 듣는 일, 들어야 될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예수에 대해 들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도, 아무리 깜짝 놀랄만한 정치, 뉴스, 세계 증시 등을 많이 들어도 예수시라는 말보다 귀한 것이 아니다. 예수라는 이름 “그 이름 듣는 일”을 귀히 여기라.


둘째, 예수님께 자기를 토하여 놓으라. (막10:47下)

소경 바디매오는 막10:47下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바디매오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모양으로 업신여김을 당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진정한 긍휼이 주어지지 않았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자신의 처지를 내어놓는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함을 지른다. 그것이 기도다. 토해놓는 기도다. 부르짖는 기도는 주님의 마음을 움직인다. 삶의 상처와 아픔을 토해내는 기도는 전적인 매달림의 기도이기에 예수를 멈추어 서게 할 수 있다.

시107:6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고통에서 건지시고”
시107:13 “이에 저희가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시107:19, 23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내가 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은 보고 계시지만 내가 하나님께 토하여 내면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바른 길로 인도하고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고 위협에서 건지시고 광풍을 평정하신다. 우리는 문제를 아뢰일 때 부르짖어 토해내야 한다. 서러움도 담아, 상처도 담아서, 두려움과 괴롬을 담아서 부르짖어야 한다.

21일 특별새벽집회는 새벽을 깨우는 기도회이다. 만 가지 상한 것들을 토해내는 기도회이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 주님의 열어주시는 비밀, 그 비밀을 보는 눈일 열린다.
 

셋째, 예수님 만나는 일을 방해하는 일을 뛰어넘어라. (막10:48)

바디매오가 소리를 지른다. 사람들은 그 바디매오를 만류하였다. 막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하였다.

예수를 만나야 된다. 뜻을 세우고 나아가면 그 길을 가로막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의 능력을 사모하고 나가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 도대체 많은 사람은 무슨 자격으로 바디매오를 향해 꾸짖어 잠잠하라 하는가? 무슨 권리로 한 사람의 피를 토하는 절규를 못마땅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는 인생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칠 때 신령한 것에 귀를 열고 신령한 것을 더 알리고 기도를 시작할 때 방해자가 생긴다. 사단이 가만있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기도를 만류하고 마음 속에 작정한 신령한 계획을 그만 두게 만든다.

보는 눈을 가지는 것은 변화다. 변화 중의 으뜸가는 변화다. 그것을 가로막는 사단은 나의 삶이 그냥 그대로 계속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알아차려야 한다. 큰 산이 가로막고 있더라도 알아차려야 한다. 방해하는 것들에 굴복하지 말자. 그것을 뛰어넘어 만남의 길로 가야 한다. 21일 특별새벽집회 기간 동안 새벽에 주님을 만나러 나올 때 이불만 차지 말라. 대문만 차지 말라.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눕자, 조금만 더’ 라는 유혹을 차 버리라. 게으르고 나태하게 만드는 영성 생활의 작은 걸림돌을 차 버리라. 새벽에 도우시리라는 시46:5의 말씀을 믿고 나오라. 그때 예수님은 나를 위해 머물러 서신다.

보라. 막10:48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방해하는 일을 뛰어넘을 때 예수는 그 자리에 서신 것이다. 예수는 돕기를 원하는 것이다. 주께 나아오는 자를 실망시키지 않고 외면하지 않는다.

 
넷째, 예수님에게 가려면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막10:50)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의 부르심의 소식 앞에 막10:50을 보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고 기록한다. 옷은 그 사람의 수치를 가리우는 것이다. 그 사람의 체온을 보호하고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밖에 출입을 할 때는 겉옷이 중요하다. 그러나 예수께로 나아가는 일을 위해 겉옷은 중요하지 않다. 바디매오는 자기를 지키려는 겉옷을 내어버렸다. 예수께 나아가는 일은 중요하다. 눈을 뜨는 인생이 되는 것이 겉옷보다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우선의 일이다. 그 일보다 다른 것이 우선이 되면 안된다.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다 사양하여 장가갔으니, 소를 샀으니 하고, 밭을 갈아야 하느니 하고 일제히 사양하고 거절한 것처럼 내 밥벌이의 수단이 핑계거리가 앞서서는 안된다. 예수를 얻으려면 삶의 장식을 버려야 한다. 등산 가기, 관광하기, 동창 만나기, 공연 구경하기, 체육관 가기, 낚시하기 등 많은 것들이 겉옷처럼 내 삶에 덮여있다. 나를 지켜주고 보호한 것처럼 나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기도 주간에는 내어버려야 한다.

바울은 빌3:7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자식을 위하여 그의 자랑스런 겉옷 같은 것을 다 해로 여겼다. 그래서 가문, 혈통, 지파, 바리새인 열심, 율법의 의, 학문 등 모든 것을 내어던졌다.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고 분토처럼 여기고 내어던졌다. 버리지 못하기에 만남의 복과 제대로 보는 복을 얻지 못한다. 버리지 못하기에 사물도 제대로 못 보고, 신령한 나라도 못보고 예수의 하시는 일도 못 본다.
 

다섯째, 예수님 앞에서 응답받기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막10:51)

아이들은 데리고 가게에 가면 아무 것이나 붙잡는다. 또 어떤 때는 이것도 만지고 저것도 만지고 하여 갖고 싶은 것을 결정하지 못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 앞에 정말 중요한 소망, 꼭 내 인생의 방향을 정한 목표를 지니고 있지 못하면 어린 아이들의 모습과도 같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는 막10:51에서 주님이 “무엇하여 주기 원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더 정확한 인생의 소원과 목표가 더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저를 구원해 주시며 소원대로 저를 곧 보게 해주셨다. 우리는 주님이 소원을 풀어주시는 분임을 안다.

어떤 인생의 목표라도 응답해 주시는 분임을 신뢰한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예수님 앞에서 “이것입니다. 이 문제가 나의 소원, 나의 목표입니다.”라고 내어놓을 삶의 한 맺힌 문제를 기도 제목으로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거짓되고 형식적인 것인지를 드러내준다. 대개의 사람들은 육안이 열려있기에 인생을 똑바로 보는 것이 주어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 교만이 예수님에게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단정을 내린다. 빛을 보고 은혜를 보고 천국을 보는 눈이 열리는 사람을 거절하고 죄된 어둠의 삶을 어둠인지 모른 체 살아가게 한다. 길가에 앉아있는 소경의 삶, 그것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눈을 뜨고 보게 되므로 겉옷이 던져지고 새로운 삶을 향해 구걸하는 여리고 길가를 떠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위선과 착각, 편견과 오만,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벗어던지고 보는 축복을 향해 예수님 앞에 서자. 봐야 되겠다는 분명한 소망과 목표를 가지고 “예수님 도와주세요.” 하고 만남의 길에 전 성도들이 따라나서자. 바로 거기에 감동과 감격, 감사와 눈물의 새 삶이 열릴 것이다. 눈이 열리므로 새로운 감동의 자리에, 감사의 자리에 서 있음을 노래하는 은혜의 11월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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