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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다는 것의 의미 (요 20:1~10,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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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의 의미 (요 20:1~10,16~18)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둘이 같이 달음질 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한복음 20:1-10, 16-18

기독교를 받치고 있는 두 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고, 또 하나는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아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며칠 전에 이스라엘에서 12년 동안 성서지리를 연구했던 후배가 놀라운 소식을 이메일로 보내왔습니다. 유대 나라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의 회의록에 ‘예수라는 사람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산헤드린 6장 5절’이라고 덧붙였더군요.

그 기록에는 그분의 부활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활입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부활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을 잘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을 부활의 현장으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저와 함께 그 현장에 가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될 때 그 과정을 주의 깊게 바라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닦고 돌판 위에 누이고 머리를 수건으로 싸고 시신을 세마포로 덮고 무덤을 육중한 돌로 막는 모든 과정을 다 보았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아리마대 요셉은 부자였기 때문에 그 무덤의 돌은 장정 15명 정도가 힘을 합해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그 돌로 무덤을 막고 빌라도의 도장으로 인봉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 무덤이 로마의 소유임을 말합니다. 군인들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누가 로마를 거역하면서 그 무덤에 접근하고 시체를 만질 수 있겠습니까?

사흘 후,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날이 밝기도 전에 시체에 바를 향유를 준비해서 무덤을 향해 갑니다. 여러분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그들은 아무도 무덤에 접근할 수 없고 시신도 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향유를 바르겠다고 들고 간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남자 제자들은 왜 안 갔을까요?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 현실적이고 논리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들이 간다고 했을 때 아마도 “바보들! 가 봐도 안 되는데 왜 가!”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왜 갔을까요? 남자들은 이치를 따지지만 여자들은 마음이 있고 사랑하면 온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삭막한 세상이 아름답지요. 그런 여자들, 어머니와 아내의 헌신 때문에 우리가 성장했고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인들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이른 새벽에 무덤에 갔습니다. 오늘도 그런 헌신적인 여인들의 믿음이 이 세상을 밝게 하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줄 믿습니다.

무덤에 간 여인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무거운 돌이 마치 누가 종잇조각을 들어 던진 것처럼 멀리 던져져 있었습니다. 그 것은 사람의 힘을 초월하는 어떤 분이 개입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까요? 안 믿었을까요?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말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 해갔다!” 안 믿었습니다.

이 여인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 제자가 헐레벌떡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무덤 속에 들어가서 두 가지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세마포입니다. 세마포가 마치 사람이 자고 있는 것처럼 덮여있는데 이상하게 사람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녁에 잠을 자고 나면 잠자리가 어질러지는데 정말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면 세마포를 그렇게 정리해놓고 갔겠습니까?

그런데 수건이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고 했습니다. 이 ‘함께’라는 히브리 단어는 장소를 말하기도 하지만 모양을 말하기도 합니다. “같은 모양이 아니고”라는 뜻이 됩니다. 즉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가 놓여있는 모양과 같지 않고 이마를 쌌던 대로 있더라”는 말입니다. 사람의 머리 모양은 둥급니다. 사람은 없는데 수건은 머리를 싼 모양 그대로(roll up) 있더라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한 어떤 분의 개입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을 믿었을까요? 8절에는 “믿었다”, 9절에는 “아직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10절에는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었다면 감격이 있고 태도가 달라졌을 텐데, 이들은 그냥 덤덤히 갔다고 합니다. 8절의 “믿었다”는 것은 여자들의 말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놀라운 사실을 봤으면서도 “예수님을 도둑맞았구나!”하고 갔다는 겁니다.

여러분, 부활의 증거는 빈 무덤이 아닙니다. 세마포도 아니요, 머리에 쌌던 수건도 아닙니다. 이것을 빼놓고 어떻게 부활을 말할 수 있을까요? 장면이 또 바뀝니다. 여인은 또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제자들은 다 돌아가고 무덤이 열린 그곳에 혼자 앉아서 울고 있습니다. 여인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야겠다! 사람들에게 물어봐야지.’ 그런데 한 남자가 다가왔어요. 마리아가 그 남자를 붙잡고 “예수님 시신…”하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마리아야!”하고 불렀습니다. 마리아의 가슴이 멈췄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선생님!”하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잡지 마라. 내가 아직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못했는데, 가서 이 소식을 전해라.”

이 여인은 다시 제자들에게 뛰어갑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만났어요!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믿었을까요? 안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문을 잠그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 만나주셨을 때 비로소 부활을 믿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다 들었으나 믿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예수님이 그곳까지 가셔서 동행 하면서 만나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제자들이 만났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믿고 전하고 또 전하여 우리도 믿고 이렇게 함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사람들이 부활의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와 함께 살아계시는 하나님! 그분이 부활의 증거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성경은 왜 빈 무덤, 세마포, 수건을 부활의 증거로 채택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을 부활의 증거로 삼나?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만이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 믿음으로 부활하신 하나님이 내게 오시고 내가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서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내 아버지가 이제는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이 이제는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너희들의 아빠다, 너희들과 함께 살아가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하신 하나님,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최 씨입니다. 저는 최 씨를 참 존경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예수 믿는 날부터 새벽기도를 다니기 시작하셔서 돌아가실 때까지 새벽기도를 쉬어 본 적이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새벽기도를 한 교인입니다. 주일학교도 다니고 중, 고등부도 다니고 성경도 읽었죠. 그러나 저는 그냥 교회 다니는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16살 때, 누군가가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너 세상의 모든 욕심과 재미를 다 끊고 너를 나에게 바쳐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6살 먹은 소년이 얼마나 꿈이 많습니까! 놀고 싶은 마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 자르고 너를 나에게 바치라”고 하셔요. 그래서 저는 “못 바칩니다! 젊어서 좀 놀고 하고 싶은 것 좀 하고 늙었을 때 바치겠습니다.”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분이 저를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 겁니다. 그분이 보이지도 않고 음성이 들리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임을 제가 알아요.

두 달간 하나님과 지독하게 싸움을 했습니다. “나는 못하겠습니다!” 잠도 안 오고 밥도 못 먹었어요. 나중에는 완전히 환자가 되어 아버지가 병원에 데리고 가셨는데 검사 결과는 아무 병이 없다는 것입니다. 병원장님이 장로님이셨는데, “이 아이는 병은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 속에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으니 그것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십시오.”하셨어요.

나중에는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두 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는데, 성경을 읽으면 잠이 잘 온다기에 잠을 자기 위해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한 달 만에 신약성경을 10번 읽고 또 읽다보니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에 죄가 다 나오는데, 저는 저에게 한두 가지 죄만 있는 줄 알았는데 모든 죄가 제 속에 다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손을 들고 항복했습니다. 너무나 무서운 분이시기 때문에 나를 바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억울하고 분해서 밤새 울었습니다. 너무 강한 분에게 잡혀서 꼼짝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전상서’라는, 하나님께 올리는 글을 썼습니다. “이제는 제가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당신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 후 저는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었고 40년 목회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부르셨기 때문에 저를 책임지시고 저와 40년 동안 동행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모든 병을 친히 고쳐주셨고, 제가 어디로 갈지 헤매고 있을 때 갈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절망할 때 내 손을 잡고 “담대하게 일어나라”고 하셨고,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함께 그 일을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치라고 해서 바쳤더니 책임져주셨습니다.

제가 30대 목사일 때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시골출신이라서 영어를 잘못합니다. 돈도 없어요. 낙심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저를 잘 아는 선교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종이를 한 장 건네주는데, 미국 콜롬비아 신학교에서 저에게 장학금을 주겠다는 증서였습니다. 저는 그 학교에 원서를 내지 않았습니다. 전화도 한 번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에 있는 학교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학교에서 제 이름을 알고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는지. 게다가 그 장학금이 보통 좋은 게 아니에요. 공부 마칠 때까지 장학금을 주고 아파트 한 채와 생활비까지 주는 것이었습니다. 원서도 안 냈는데 합격 되고 그런 장학금까지 받아본 분이 있으면 나와 보세요!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그 학교에 갔을 때 장학금 담당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장학금이 어떻게 제에게 오게 되었습니까?” 자기도 모르겠답니다. 누가 알아요? 하나님만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만드시느라고 수고를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제가 목회와 강의로 목을 너무 많이 써서 4년 전에 목이 다 망가졌습니다. 30분 설교도 힘이 들었어요. 그런데 코스타리카에 목회자들 훈련을 위해 가게 되었습니다. 주일 3부 예배를 인도했는데 감기까지 겹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코스타리카 목사들에게 필요하면 제 목을 고쳐주시고 아니면 더 아프게 해주세요. 그러면 미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낫는 것이 하나님께 유익이면 낫게 하시고 아픈 것이 유익이면 아프게 해주세요.” 이것이 제가 기도하는 법입니다.

점심식사 시간에는 물조차 넘길 수 없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못난 것들을 주의 종으로 만들어주시고 여기까지 보내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붉고 둥근 테가 제 머리끝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겁니다. 그리고 목까지 딱 오니까 목이 시원해지기 시작합니다. 물을 삼키니 넘어가고, 밥을 먹으니 넘어갑니다. 강의를 해도 목이 괜찮아요. 그 때 하나님께서 저를 고쳐주셔서 지금도 하루 9시간 강의와 집회를 인도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기를 원하는데, 이것이 믿음입니다.

20세기의 지성이라고 하는 C.S. 루이스는 옥스퍼드 대학 2학년 때 벌써 영국의 천재로 소문이 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무 오만했습니다. 자기 머리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아버지도 배반했습니다. 그런 분이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사냥개요 나는 사슴이다.” 사냥개 하나님이 자기를 물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내가 어디로 도망가겠느냐? 나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겠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다면 훌륭한 학자로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일생을 보냈고, 그의 연설과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온 영혼이 500만 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면 여러분의 삶이 달라집니다. 질적으로 달라집니다. 가치 있는 삶이 됩니다. 여러분 능력 이상의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믿지만 마시고 하나님과 동행 하십시오.

오늘 교회에 새로 나오신 분들, 여러분을 초대하는 것은 이 교회에 나오라고 초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서 그분과 함께 살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도 부활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손을 대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질병이 낫고 여러분의 문제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꼭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초청합니다.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마음만 열면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여러분을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기다려보십시오. 하나님이 오십니다. 여러분 만나주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 의롭고 깨끗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기 때문에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주저하지 마십시오. 담대하게 나아가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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