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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 (요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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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 (요 11:1-16)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주일 설교를 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지난 한달 동안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10월은 제 생애에 가장 많은 설교 일정이 잡혀져 있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정이 짜여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일정을 들여다 보면서 저 스스로도 한숨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10월을 보내지?’ 그러나 실제로 저는 10월 첫 주일 설교 외에 하루도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지내면서 제 인생에 있어서 또 한 번 주님의 다루심을 경험하였습니다.

  제가 선한목자 교회에 부임 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예수님만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제게 주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재정적인 문제도 그렇고 교회를 예수님이 이끄시는 교회로 세우는 것도 그렇고 또 성도들을 정말 예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도 그렇고. 그 어느 하나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지난 4년은 정말 주님이 하셨다는 고백 뿐입니다. 제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삶을 실제로 체험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 감격과 확신으로 저는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봄 제자훈련 세미나 때 “실제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질문을 받고 이것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질문이라고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지 못하면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부터 이것은 제 마음에 큰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는 “목사님, 피곤해 보이세요.” 였습니다. 또 신경이 예민해 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부교역자나 교우나 가족들을 힘들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사는 사람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10월 한 달 동안 모든 설교와 집회 일정을 취소시키시고 저를 병상에 묶어 놓으신 채 저를 다루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증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믿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사역은 위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 핵심 메시지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기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3절, 5절에 의하면 나사로와 그 누이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던 남매였습니다. 나사로 남매는 예수님을 정말 지극한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마다 이 가정에 머무르시면서 거기서 대접을 받으시고 위로도 받고 힘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셨던 이 가정에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가정의 기둥인 나사로가 병으로 쓰러져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문제를 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예수님은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일관된 태도를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시거나 염려하지 않으셨으며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4장에 보면 마음이 꽉 닫힌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도, 5장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보셨을 때도, 6장 5천명이 넘는 무리들을 먹이셔야 했을 때도 그러셨습니다. 주님은 그 일로 조급해 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시지 않으셨습니다. 8장 음행하다가 붙잡힌 여인을 볼 때도, 9장에서 나면서 눈먼 자를 고치실 때도 그리고 11장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보실 때도 예수님에게서는 당황함이나 두려움이 없으셨습니다. 언제나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믿으셨습니다.

사랑했던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이 예수님에게 충격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또 죽은 나사로에게 가신다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대단히 두려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돌로 쳐죽이려는 유대인들을 피하여 온 지 며칠이 되지 않은 때이기 입니다. 이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도마가 16절에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전혀 당황하시거나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감정도 없으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이르렀을 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것을 본 주변 사람들이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36절)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즉시 가시지 않은 바람에 나사로가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은 다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요단강에서 예루살렘까지는 걸어서 하루 길이 걸립니다. 예수님께서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의 말을 듣고 이틀을 더 유하신 후에 베다니로 갔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했으니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사람이 떠난 직후 나사로는 죽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이미 죽은 것을 아시고, 장례가 치러지도록 잠시 더 머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시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요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관심은 나사로의 죽음이 아닙니다. 이 일 후에 벌어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과연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상황에서 얼마만큼 믿음을 지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생각을 하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죽음도 이기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제자들에게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은 무엇이며 예수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작은 자, 믿지 않는 자, 믿지 못하는 자를 만날 때 애통하셨고 가슴앓이를 하셨습니다.
(마 6:30)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 까 염려하지 말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풍랑을 만나서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됐는데도 예수님은 왜 믿지 못했느냐고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파도를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물 속에 쑥 빠져들어가면서 비명을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할 때 베드로 손을 붙잡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보실 때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자기 종 중에 죽어가는 하인을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네 종을 고쳐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백부장이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주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사오니 지금 계시는 그 자리에서 네 종이 고침을 받을지어다 말씀만 하시면 될텐데 무엇 때문에 굳이 저희 집에 오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눅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교회에 나오면 믿는 것이지.” 아닙니다. 믿음이란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구원해 주셨고, 보혜사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두려울 것도 염려할 것도 없어집니다. 믿음은 어떠한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는 힘입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여러분, 살다가 어떤 큰 문제가 갑자기 생기면 덜컥 겁부터 나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작게 여기면 안됩니다. 왜? 그것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에 반응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우면 도와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려움이나 고통이나 필요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에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온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옵니다. 그녀의 첫 번째 간청은 필요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세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필요에 대하여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간구는 달랐습니다. 아주 냉정하게 반응하셨습니다.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지 않는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간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의 간구에 응답하셨습니다.

(약 1:6-7)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의심하는 기도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외가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에만 응답하십니다.

  저는 이번에 수술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꼭 수백 억의 재정 문제만이 아닙니다. 교회를 온전히 예수님의 교회로 세워지는 것, 성도들을 온전히 예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에 대하여 고민과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이 걱정하실까요? 아니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걱정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담낭 제거 수술을 한 후 병실에서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큰 질병은 아니었지만 장기 하나를 제거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는 위중한 병을 앓고 계신 분들이 많으신데 그 분들은 얼마나 마음이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저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증거를 찾지 말고 먼저 믿으라!’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인 줄 깨닫고 “주여 저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제가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 내용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그 예수님과 하나되는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데 그렇게 마음이 간절하고 뜨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제게도 말씀을 듣는 교우들에게도 하늘로부터 놀라운 평안이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놀라운 평안이 하늘로부터 임함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그렇죠!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면서 감격해 하다가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 꿈을 잊고 싶지 않아서 옆에서 자던 아내에게 설교 내용을 불러주어 메모를 하게 하고 아침에 보니, 찬송가 455장 내용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그 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
  주 모습 내 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
  가는 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 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받음이라 /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어떤 분들은 게시판에 올린 글을 읽고 목사님이 얼마나 설교를 하고 싶었으면 설교하는 꿈을 다 꾸었나 하셨지만, 설교하고 싶은 마음으로 꾼 꿈이 아니라 꿈을 통하여 제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믿는 자가 누리는 엄청난 평안입니다. 진실로 믿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운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평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삶의 방법입니다. 구원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면 이보다 더 무서운 율법은 없을 것입니다. 항상 기뻐해야 하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고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한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믿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슬픈 일을 만났는데 “기뻐해!”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정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언제나 기뻐진다,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그랬고 베드로도 사형 당하기 전 날 그는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왜? 믿음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도 진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믿음을 세우시려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도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예수님을 믿습니까? 어디까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믿음 없이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시험이 있고, 믿음 없이는 결코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국민일보에 이상춘(68) 장로님 기사가 실렸습니다. 장로님이 30여 년의 교정 공무원 생활을 마친 다음 다시 교도소를 찾아 재소자 전도에 헌신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7월 간암 3기라는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날 장로님은 병원을 나와 여주교도소로 향하면서 마음에 '침상에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으며 죽음과 싸우는 것보다 마지막 남은 나의 심지를 불태워보자.'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주의 뜻대로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지난 1년 동안 이상춘장로님을 통하여 엄청난 일을 하셨습니다. 많은 재소자들이 감사 편지를 보내온다고 했습니다. "장로님 덕분에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반드시 재기할께요." 하나님께서 장로님의 암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큰 증거가 있습니다. 신문 기자는 “교정 공무원 시절 굳어 있었던 그의 얼굴이 지금은 '미소 천사'로 바뀌었다.”고 신문에 썼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믿음에 대한 이보다 더 정확한 정의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굳어있던 얼굴이 미소 천사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이 없으니까. 이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누리는 복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을 받으실 때 주님은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몸이고 내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한 몸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체험을 하고 믿으려 하지 말고 먼저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하고 고백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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