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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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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3-26)

예수님께서 지상의 사역을 마치신 후 하나님 나라에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기념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기 “기념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말이며, 잊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신을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까지 기억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하여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 사람은 멀리 있는 것은 쉽게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비교할 때, 우리는 잘못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전지전능하시더라도 그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분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으므로 항상 이 세상의 영향을 받으며 지배를 받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만찬은 우리의 약함을 도와줍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항상 우리 마음속에서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잠재해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신 것이 성만찬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성만찬을 통해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이고, 또한 주님을 항상 가까이 두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식탁인 떡과 잔은 항상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 직감하고 체험하는 하나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직접 본 일이 없지만, 떡과 잔을 볼 때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보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연상시켜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마지막 성만찬을 나누시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면서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그리고 잔을 주면서 “너희를 위하는 내 피니 받아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 열 두 제자들은 떡을 떼고 잔을 마시는 식탁을 볼 때마다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피니 받아 마시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우리가 거룩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적인 식탁과 성만찬을 너무 구별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속에 깊이 감격하고 깨달은 사람은 가정에 돌아가서도 먹고 마시는 모든 식탁이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만찬 석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고 감사하는 삶이 신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기념의 대상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살을 찢으셨고, 새 언약을 위하여 피를 흘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이 “우리가 행하면 살리라”고 하셨다면, 새 언약은 “우리가 믿으면 살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원히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새 언약을 맺게된 근거가 예수님 보혈의 피입니다.
이런 주님을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떡과 잔을 가지고 날마다 기념하면서 잊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과 처음으로 식사교제를 나누는 것은, 한 형제와 마찬가지로 친밀한 관계가 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식사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은 밥상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행2:46절을 보면 초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식사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성만찬도 되고 애찬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날마다 우리가 평상시 가족과 함께 식사를 나누듯이 그들은 가족같은 마음으로 떡을 떼며 주님을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우리들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잊어선 안됩니다.
이 주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떡을 떼며 잔을 마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가정의 식탁까지 그대로 이어져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반복되는 아름다운 은혜가 가정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을 잊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으로 풍성하게 넘치는 가장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모임입니다.

선교사 출신 슈나이더가 1975년에 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책이 있습니다.
슈나이더는 이 책에서 신약교회의 뿌리는 성막에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출25:8절을 보면 성막을 “거할 처소”라고 했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막 즉 텐트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성전(건물)은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다윗의 아이디어인데, 그 다윗의 아이디어를 하나님은 수용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아이디어는 장막을 통한 역동성과 이동성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교회의 의미는, 다시 성막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마18:20절에서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은 그 어디든지 교회라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교회가 아닌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핍박에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워드 슈나이더는 “교회를 짓고부터 기독교의 역동성은 사라졌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건물은 부동성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150년간 교회 건물이 없었지만 가장 강력한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떡과 잔을 나누는 교제가 있을 때, 가장 강력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970년대 청년부흥을 이끈 “척 스미스의 갈보리 채풀”은 Coffee house movement를 주창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히피로 대표되는 젊은이들을 있는 그대로 교회로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이 자기 문화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새로운 교회로 만들어 구름 떼 같은 많은 미국의 젊은이들을 구원시키고 청년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적 귀결로 볼 때, 교회는 세상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있을 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문화와 구별된다는 것은 기준과 가치와 표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 거지에게 어떻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 성도는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일로 지키며 십일조 생활을 하며 삽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러면서 어떻게 그렇게 풍성하게 사느냐?”고 묻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평생을 물질적으로 평안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이것이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자꾸만 교제권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전4:9절을 보면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면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느니라”고 했고, 12절에서는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 친구가 일으켜 준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친구 없는 자의 외로움도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예배뿐만 아니라 교제를 통해 강해집니다.
그런데 마귀는 성도들의 교제를 끊게 만듭니다.
따라서 교제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을 통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의 티끌만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제권 속에 머물러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고 가정을 열어서 많은 사람과 교제를 나누며 많은 영혼을 인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성찬의 의미에 있어서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많은 이적과 가르침들이 식사 중에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식사는 먹는 것뿐만 아니라 관심과 이해 그리고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간 이 성찬을 통해 다시 한번 “주님, 식사를 통해 우리 가정을 열고 영혼을 구하는 가정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결단하며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것은 밥상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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