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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장하는 교회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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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는 교회 (행 6:1~7)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두 가지 제도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창립하셨습니다. 이것보다도 더 좋은 제도가 있었다면 주님이 그것을 창립하셨을 터인데 지금 우리가 섬기고 있는 교회 공동체, 이것이 가장 좋은 제도라고 주님의 생각으로 세우셨고, 그 다음으로 교회를 목회해나갈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두 가지 제도가 지금까지 도움을 주어 이 땅에 이렇게 교회 공동체가 많아졌습니다. 모양과 형태는 조금씩 달라졌지만 교회는 본질적으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나 지금이나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고 교회가 쇠퇴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감소라고 우리가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지상의 교회는 우리 신앙이 질적으로도 성장하고, 또 숫자적, 양적으로도 성장하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지금 우리들이 섬기고 있는 현실의 교회로서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 오늘 성경말씀에 나타났는데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났던 일을 살펴보면 교회 본질을 파악할 수 있고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교회를 섬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단일 교회로 성경에 보면 하루에 3천 명씩 세례를 받았다고 했으니까 교인이 얼마나 많이 모였다는 것을 우리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수만 명이 될 수 있고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면서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일지라도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의 특징은 반드시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더욱 문제가 생깁니다. 다만 그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처리하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한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초대교회는 왜 문제가 생겼으며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오늘 교회의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교회를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교회에 지역 감정이 작용하였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두 파가 나타납니다. 헬라파와 히브리파입니다. 헬라파는 유대인 혈통이지만 헬라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서 살게 되는데 그 숫자가 본국에 계속 살고 있던 사람의 수와 비슷합니다. 지금도 유대 나라의 이스라엘 인구가 5백만입니다. 그런데 나가서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선 미국에만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6백만이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도 본국에 있는 사람 숫자나 헬라 문화권에서 생활한 사람들이나 비슷해서, 이 헬라파는 유대인 혈통이지만 헬라 문화권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히브리파는 전통 유대인으로 히브리 문화권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공통적 특징이 나타납니다. 편파적 감정이 매우 강한 민족입니다. 유대인들도 보세요. 성경에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상대도 안합니다. 왜? 지역감정 때문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취급도 안하며 이렇게 성경에도 수없이 많은 지역 편파적 표현이 기록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유대인 못지않게 한국 사람도 무슨 행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 지역 감정으로 나누고 개울이 하나 지나가면 이쪽저쪽 감정이 다르고 얼마나 편파적인지 모릅니다.

요즘에 다음 대통령을 뽑으려고 대선 후보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왜 당이 그렇게 많이 생겼다가 그렇게 많이 없어지느냐 말입니다. 편파를 갈라서 때려 부쉈다 다시 세웠다 하는 것은 세계에서 금메달일 겁니다. 미국에는 100년이라도 당이 두 개밖에 없는데 우리 한국은 100년에 100개가 생기고 100개 없어지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에 사람들이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머리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분도 못하게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여기 있던 사람이 저쪽 가있고, 저쪽에 있던 사람이 이쪽으로 오고,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을 만큼 편을 가르고 편을 만드는데 아주 능숙한 그런 문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파와 히브리파는 왜 교회 안에서 싸우고 어지럽게 만들었는가? 지역감정의 원인이 돈 때문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는 돈이 많아졌습니다. 교인들이 헌금을 아주 많이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로 말하면 “교인들이 모든 재산을 팔아다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을 팔아 돈 얼마를 감춰두었다가 저주를 받아서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벌벌 떨며 “저거 봐라! 돈 감춰두면 안 된다.” 그 많은 교인이 재산을 다 팔아왔으니 교회에 돈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그때는 재산을 팔아왔는데 지금은 왜 안하는가? 종말론 사상의 팽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1~2년 안에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빠른 시간에 좀 더 의롭게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싶은 그런 영적 충동으로 ‘이 재산 놔뒀다가 뭐하냐? 이제 예수님이 1~2년 안에 오시는데….’ 이런 종말론 사상의 팽배가 이런 일을 벌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신앙생활한 사람은 “마라나타” 사건이라면 누구든지 다 기억을 합니다. 저도 이것 때문에 피해가 심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 집사님, 권사님들이 술렁술렁 대고 우르르 몰려가고 분위기가 이상한 겁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종말론을 설교하고 다니는데 1988년이 예수님이 오시는 날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할 것은 빨리 정리하라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그런 소리를 들으니까 막 몰려가고 분위기가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몰려갔으면 몰려간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중에는 누군가가 제에게 와서 누구누구가 갔다고 보고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했더니 “목사님! 지금 1988년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설교를 하며 돌아다니는데 사람들이 수천 명씩 몰려다니면서 야단났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누구누구가 다 몰려갔습니다.” “권사님도 그렇게 믿으십니까?” “나도 반신반의합니다. 이게 정말인지 아닌지 그럴듯하게 말하는데….” “그럼, 그 사람이 말한 책자나 설교 테이프가 있으면 가지고 오세요.” “아, 여기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다 듣고 나서 그 다음 주일에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가고 안 가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교회 담임 목사로 여러분의 신앙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 사람은 종교 사기꾼이니까 그런 줄 아십시오. 더 이상 여기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신학적인 아무런 근거도 내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왜 1988년인가를 봤더니 시편 88편에 예수님 재림이 나와 있다고 그럽니다. 아무리 봐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가 1986년에 그런 일을 만났으니까 2년은 금방 지나갔습니다./ 1989년이 되어도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그렇게 몰려가고 교회를 어지럽힌 교인들은 목사 앞에서 회개해야 됩니다. “우리가 잘못 듣고 교회에서 괜히 술렁대고 어지럽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1992년으로 연기했다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1992년 10월 28일이 휴거 날이라고 거기에 물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으로 몰려간다고 하얀 한복들을 천사처럼 입고 밤새도록 모여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12시 “땡”하면 하늘로 휴거한다고 했는데 새벽 3시가 되도록 엉덩이가 1미터도 안 뜨는 겁니다. 난리가 난 겁니다. 그래서 허탈감에 자살한 사람도 있고 이혼한 사람도 있고 학생 한 명은 자기 아버지가 힘들게 일하시면서 의사 만든다고 버클리 대학에 보내셨는데 학교를 안가서 가정불화가 일어나고…. 그 부작용은 이루 말도 못합니다. 저는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예수님이 1992년에 오시려고 계획하셨다가도 그 놈들 때문에 더 연기하셨다고….”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도 그런 사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재산을 다 팔아온 겁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교회는 그 많아진 교회를 어디에다 쓸 것인가 말입니다. 1~2년 안에 예수님이 오시는데 대형 교회를 건축할 겁니까, 뭐할 겁니까? ‘이것을 빨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제일 잘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냐?’ 여기 보니까 과부들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혼자 사는 여인들이 돈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사회적 활동에 제한이 있어서 남편이 뭘 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누가 구제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렇게 되신 분들은 구분해 생활비를 도와주었습니다. 오늘날에는 혼자 사는 사람들이 돈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안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모아서 돈을 매일 나눠주는데, 문제는 어디서 발생했느냐 하면 분배의 공정성이 시비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헬라파에서 데모를 했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 대상에서 빠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100퍼센트가 히브리파 사람들입니다. 편견이 심한 유대인 제자들이 편견으로 일을 한 겁니다. 히브리파 사람들에게만 많이 주고 헬라파 과부들에게는 돈을 안 준 겁니다. 그러니 가만 있겠습니까? 우리 사람들은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편견은 있게 마련입니다. 제가 심방 다니면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들, 딸을 모두 엄마 자신이 낳았습니다. 그런데도 엄마 마음은 자기가 낳은 자녀들 중에도 아들을 더 좋아하는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딸 더 좋아하는 아버지가 그렇게 많습니다. 이것이 편견입니다. 자기가 낳은 자기 자녀 두 사람을 놓고도 편견이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 관계에 편견이 없겠습니까? 차이는 있지만 다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편견이 심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지금 벌어졌단 말입니다. 그래서 헬라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겁니다. “우리가 외국에서 살다 온 것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본국 교회에서마저 사람을 차별 대우 하느냐?” 하면서 막 데모를 하니까 교회는 싸움박질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이 교회는 이제 없어지든가 헬라파와 히브리파가 갈라지든가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저는 목회 생활에서 분명히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소외감 느끼는 사람들이 교회에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어떤 사람과 지나치게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게 살아가는 철학으로 저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권사님과 장로님 두 분이서 오신 겁니다. “목사님, 몇 월 며칟날 시간을 좀 비워두실 수 있습니까?” “왜 그러세요?” “특별한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사실 그 날이 제 생일날이란 말입니다. “왜 그러시는데요?” “무슨 일이 있습니다.” 목사가 “제 생일이니 그 날은 안 됩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 괜찮다고 했습니다. 약속한 시간에 갔더니 몇 분이서 깜짝 생일 파티를 준비해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그날 아주 한 끼 잘 얻어먹고 선물도 주셔서 받고 “이야! 좋다! 오늘 같이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신나게 하루 저녁을 지나갔는데 그 이튿날 새벽기도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기에 참석 안한 집사님들이 “당신들 뭐야? 왜 목사님 생일파티를 다 같이 초대해서 할 것이지 이민사회에서 너희들이 목사님만 쏙 빼다가 뭐하는 거야? 너희가 교회 특권층이야 뭐야?” 그러면서 문제를 일으키는데 저는 밥 한 그릇 얻어먹고 죽을 뻔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왜 문제를 일으켰는가? 소외감 때문입니다. “나도 목사님을 위해 뭘 좀 해드리고 싶고 선물도 좀 사드리고 싶고 생일파티 해드리고 싶은데 너희들이 비밀리 목사님만 빼가서 왜 그렇게 한 거야?” 제가 그것 때문에 정말 혼났습니다. 소외감이 큰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소외감을 느낀 헬라파가 문제를 일으킨 겁니다. “우리를 왜 소외시키느냐?” 그래서 지금 야단이 났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원인 분석을 했습니다. ‘교회가 왜 이 지경이 됐는가?’ 사도들이 아주 훌륭한 원인 분석을 해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원인을 돌리기 시작하면 계속 싸움이 커집니다. 그러나 문제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면 문제 원인이 사라집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잘못이오.” 이렇게 민중 앞에 말함으로 일단 진정 국면에 들어갔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나? 사도들의 구체적 잘못은 말씀을 제쳐놨다고 했습니다.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도를 세우신 뜻은 설교, 즉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왜 안했느냐? 설교자만이 그 이유를 압니다. 설교는 아무리 잘해서 99.9퍼센트의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반드시 몇 사람은 이상한 반감을 갖습니다. 이것이 설교의 어려움입니다. 누가 설교를 해도 마찬가지 반응이 나타나는데 지금 청중들은 누구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듣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충분히 설교의 훈련을 받지 아니한 베드로나 요한 이런 사람들이 설교를 하니까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듣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설교만 하고 나면 문제가 납니다. “그것도 설교라고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귀찮아졌습니다. ‘아, 설교 못하겠다!’ 설교를 집어치워버렸습니다. 그러니 어떤 현상이 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마귀가 말하게 됩니다. 예배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 선포라고 신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저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배의 기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 선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리고, 설교 준비하기는 귀찮고, 하고 나서도 불평이 나오니까 ‘귀찮으니 그만 두자!’ 돈 나눠주고 봉사하는 일만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그 틈을 타고 마귀가 들어가 교회를 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우리가 설교를 안 해서 마귀가 틈을 탄 것이다. 사도들이 말씀을 제쳐놓은 것에서 문제가 왔다.” 이렇게 분석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언제 하느냐?” “우리가 지금까지 하던 이 많은 봉사의 직무를 맡아서 대신 해줄 사람을 뽑자.” “그게 뭐냐?” “집사다.” 그래서 집사의 사명이란? “교회에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사역의 본질을 삼는 사람이다.” 이것이 집사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집사가 되었으면 우리 교회에 문제가 없도록 어떤 문제라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 해결사로서의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 본질적 사역을 위해 지금 집사를 처음 뽑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집사들이 문제를 일으킨단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래서 집사들을 뽑아서 그들에게 지금까지 봉사하던 일을 다 맡겨준 겁니다.

그러면 사도들은 뭘 하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사도는 이래야 합니다. 저는 평생 설교를 하는 사람이지만 기도를 일주일만 쉬어도 벌써 설교가 헛갈립니다. 영적 흐름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새벽기도를 해야 되고 말씀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릅니다. 강단에서 말씀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지난주간에 저는 미국에 갔다 왔는데 외국 어디를 가든지 어쩔 수 없는 때만 빼고는 금요일 밤 비행기를 타고 틀림없이 교회에 와서 주일을 지킵니다. 금년에도 외국에 나가서 세미나, 집회 여러 가지 사역을 많이 했지만 6월 24일 한주일 밖에 안 비웠습니다. 많이 비워야 1년에 3주일 정도 비웁니다. 저의 목회 철학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의 사역자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해야 합니다. 저는 취미 활동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제가 취미활동 하는 것을 못 보셨을 겁니다. 저도 좀 끼가 있는 사람이라 뭐 하나 빠지면 아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안하는 겁니다. 월요일이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루 종일 10시간 주일 설교를 준비해 놓고 그 다음 일을 하지 아무것도 안합니다. 전무라는 말을 그 하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의 사역자는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 집사님들이 목사보다 머리가 바쁘면 그 교회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몸이 바빠야 합니다. 이것저것 봉사할 것은 다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집사 선택의 조건이 무엇인가? 오늘 여기 성경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안 나온 것이 하나 있는데 스데반과 일곱 집사는 다 헬라파 사람들입니다. 안디옥 사람도 여기 들어갔습니다. “당신들이 문제를 일으켰으므로 당신들의 지혜로 이 문제를 해결하라!” 그래서 헬라파 사람 7명이 집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선택하느냐? 세 가지 선택 조건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교회에 봉사하면서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그 사람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아이디어와 잔머리 굴려가면서 교회 봉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싸움이 생기는 겁니다. 기도해서 성령의 지시를 받으며 우리가 일을 해야 합니다. 제가 살던 주변의 한 교회에서 집사들이 모여 제직회라는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 제직회에서 제일 중요한 안건으로 뭐가 나왔는지 아십니까? “주일 예배 없애자.”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꼭 일요일에 드려야 하느냐 말입니다. 일요일에는 가족들과 놀러가서 시간 보내야 하는데 이민사회에서 가족들과 보낼 시간이 없으니 그렇게 일요일에 가족들과 시간 보내고 금요일 저녁에 예배드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는 없어졌습니다. 대학 교수들이 많이 나오는 교회였는데 아이디어는 아주 로맨틱하고 멋있게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금요일 따지고 일요일 따지며 그러시느냐 말입니다. 금요일 저녁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헤어져서 토요일에 주말여행을 하면 삶도 풍성하고 예배는 예배대로 드리자고 안건대로 실행하려고 해도 “뭐 이런 교회가 다 있어?” 교인이 다 떠나가 버려서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아이디어로 뭘 하려고 했다가 큰일 난 겁니다. 차라리 모르면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집사가 되라!” 이것이 첫째 조건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지혜가 동반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성령 충만이 또 교회의 문제가 됩니다. 성령이 시켜서 했다고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것도 제가 경험한 것입니다. 보통 주일 예배가 한 시간에 딱 끝나잖아요? 저 뒤에 시계가 있는데 그것을 왜 하느냐 하면 우리 목회자들이 1초 어기지 말고 딱 끝나는 시간에 정확하게 끝내기 위해서 우주 시계를 저 곳에 달아놓고 여러분은 안보고 저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설교 몇 분, 기도 몇 분 다 짜가지고 나오는데 우리 갈보리교회는 장로 제도가 없어서 이 문제가 없지만 여기에 오기 전에는 늘 주일마다 장로님과 충돌이 벌어지는 게 장로님들이 나오셔서 기도를 너무 길게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시는데 그만 하라고 잡아당길 수도 없고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기도가 빨리 끝나야만 다음 예배를 준비할 거 아닙니까?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장로님 한분이 나가서 기도를 하셨는데 24분을 하셨단 말입니다. 설교보다 더 길게 하신 겁니다. 어떻게 정확히 24분인걸 아느냐? 장로들 기도하는 시간만 재는 집사님이 따로 계십니다. 그날 저는 설교를 7분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신앙 지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보다 나이가 많으시지만 “장로님! 오늘 24분 공중 기도를 하시면 설교는 몇 분 하라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다음부터는 4분 이내로 끝내세요.” 저는 목사이니 그렇게 말씀드려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를 운영해 나가는데 계속 길게 기도하시면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장로님이 자존심이 상하셔서 “아니, 성령님께서 하시는 기도를 가지고 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저는 성령님이 인도하는 대로 2시간 설교해도 괜찮습니까?” 이것이 지혜입니다. 성령 충만은 지혜가 동반하지 않으면 문제가 됩니다. 성령이 시켰다고 마음대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집사 되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그럽니까?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성령 충만과 지혜는 공인성이 있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지 어떤 사람은 혼자 똑똑한데 교인들은 한 사람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말하는 대로 했다가는 교회 망해! 저 사람은 혼자 믿는 것처럼 항상 성령 충만하다고 그러는데 인정할 수 없어.”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온 교인들이 칭찬하고 공인성으로 인정할 만한 사람으로 하라!” 그래서 일곱 사람이 뽑힌 겁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때부터 “자, 지금까지 우리가 그 많은 일을 했는데 봉사하는 일은 집사님들이 다 해주십시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 설교하는 것에 전무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문제가 다 해결되고 오늘 성경 마지막에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여 허다한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론입니다. 이것이 교회 본질의 모습입니다.

이대로 가면 되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지 이대로 가면 항상 교회가 성장하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훌륭한 봉사와 말씀 사역을 해왔는데 앞으로 더욱 이 말씀에 기초해서 저희 목회자들은, 사도직에 있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선포에 더 많은 정열을 기울이고, 집사님들은 봉사하는 일에 더욱 성실한 청지기 사역을 하셔서, 앞으로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 확장이 온 세상에 잘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을 저희들이 조명하였습니다. 말씀  속에 나타난 교회에 대한 공동체의 진리가 저희들 마음속에 남아서 우리도 그 말씀대로 살아, 봉사와 그리고 말씀 선포가 잘 조화를 이루어 갈보리 공동체를 통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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