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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환상에 끌려간 사도 (행 1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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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에 끌려간 사도 (행 16:6~10)

바울 사도와 실라 두 사람이 짝이 되어 아시아 일대를 선교하다가 루스드라 지방에 와서는 큰 수확이 생겼습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젊은 청년 디모데를 동역자로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소아시아는 세 사람이 힘을 합하여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디모데를 데리고 이제 제2차 전도 여행 마지막 부분을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아시아 선교 목표를 두고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에서 큰 사건이 하나가 생깁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두니아 지방으로 가서 전도하려고 했던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도 안 됩니다.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전도 계획이 다 무산되게 되었음을 오늘 말씀에 밝혀주고 있습니다. ‘전도를 열심히 하려고 나섰는데 성령이 그것을 도와주어야지 그것을 못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면 이해가 되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지금 못하게 하시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 지역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혹은 비두니아에서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아주 분명히 터득할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정열을 가지고 하려는 하나님을 위한 선한 목표도 하나님이 하지 못하게 막으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계획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허락이 없는 것은 오히려 선교를 해치고 교회를 어렵게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선교의 길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과 좀 생활의 다른 면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하지 않는 고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이 결혼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또,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이 사업은 하나님의 계획인가, 아닌가? 어떤 때는 우리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망함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일인가?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합니다. 내가 병이 든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 죽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인가?’ 이런 것들은 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지는 하나의 영적 고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문제에 대해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일은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신다. 그래서 그만 두겠다.” 이렇게 결론을 짓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분명한 것은 이 일은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는 것을 바울의 영이 알았다는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에 대한 성경 지식은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적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뭐냐? “사람도 영적 존재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제자들에게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있느니라. 만져봐라.” 살과 뼈가 없다는 것은 영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되어있는가? 물질인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성이라는 정신세계가 그 물질과 함께 있으며 이 둘을 지배하는 힘으로 영이 함께 거하도록 우리 인간 존재는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

떻게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게 되었는가? 성령께서 내 영을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받으실 때 예수님에게도 주어진 우리와 똑같은 물질세계, 살과 뼈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고통을 당하시다가 마침내 심장이 머졌을 때 성경 말씀은 “예수의 영혼이 떠나시다.” 물질세계를 떠나셨다고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에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때부터 이 진흙은 살아있는 물질이 되었고 그 안에 영이 존재하는 이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느 때 악한 일을 하게 되는가? 악령의 지배를 받을 때입니다. 사울이 악령이 들리니까 계속해서 악한 일만 계속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고 가룟 유다는 사탄이 그 마음을 지배하니까 예수를 죽이는 일에 인신매매를 했다고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고 사는 사람들은 성령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충만해야 된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악령은 날마다 우리를 향해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 속에 간직된 하나님의 영을 몰아내고 자신의 영을 집어넣으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얼마나 간교하고 힘이 강한지 40일 금식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에게도 일대일로 다가와서 유혹을 해서 하나님의 영의 말을 듣지 말고 자기 말을 들으라고 유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예수의 영이 인도하시는 것을 잘 분별하기 어려운가? 문제는 간단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각자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 변경시킬 수 없는 뜻입니다. 내 생각에는 아무리 생각하고 연구를 해도 내가 계획한 이 일이 가장 선하고 아름답게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만들면 하나님도 좋고 교회도 좋고 이웃도 좋고 나도 좋고 다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도 아버지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이 이대로 잘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이 좀 도와달라고 하나님의 도우미 역할을 구하는 게 우리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계획이나 소원은 조금도 수정하고 싶지 않고 바꿀 이유도 없으며 그것에 대한 미련은 절대로 떨쳐 버릴 수 없고 지금까지 그것을 위해서 준비해 왔고 기도해 왔고 이것은 빛이 될 만한 일이요 선한 일이요 의로운 일이요 기쁜 일이니까 내 생각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고정 관념이 가득 차 있고 그런 사람이 성령의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마음을 열고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해야 영의 교통이 이루어지는데 내 고집과 이 고정관념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라.”

지금 바울은 아주 자신만만해 졌습니다. 그 이유는 1차 전도 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냈습니다. 아주 자신감이 있고 지금의 젊은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가 협조를 하고 자기의 건강을 돌봐주는 의사 누가도 곁에 있고 불타는 사명감에 바울은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계획성 있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아시아를 점령해 나갔기 때문에 이 아시아는 완전 우리 손에 들어있다고 생각을 했고 그 거대한 계획은 다른 일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사업을 해서 돈을 벌려는 계획도 아니고 인기를 얻어서 출세하려는 그런 계획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아시아에 전하려는 가장 거룩한 목표와 그런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아시아는 정복한다. 1차 정복했다. 2차 전도여행을 떠나자.” 그래서 2차 전도여행을 잘 마무리 지으려 하는 그런 찰나란 말입니다. 이렇게 세계 선교 여행하며 돌아다니다 보면 영적 자부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옛날 웨슬레가 교통이 지금 같지 않던 시대에도 “세계는 나의 교구다.” 그러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온 세상을 복음 때문에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자만심일까, 자부심일까 이런 것이 듭니다. “세계는 내 손 안에 있다. 자신 있다. 어디서 오라고 해도 자신 있다. 내가 안 간 곳이 없지 않느냐? 땅 끝까지 이르러!” 이런 자부심이 옵니다. 지금 바울이 그 자부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냈고 나 혼자서 외롭게 다녔는데 이제는 협조자도 주변에 나타났고….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하지 말라! 아시아에서 하지 말라!”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 바울이 고집스러운 사람이라면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우리의 계획은 절대로 승리할 것입니다.” 그냥 고집스럽게 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데 바울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신다.” 사실 그때 바울의 발걸음을 하나님이 아시아로 돌렸다면 아시아의 인구가 90퍼센트가 예수님을 믿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90퍼센트가 안 믿습니다. 그때 유럽으로 바울의 발길을 옮겼기 때문에 유럽의 첫 번 교회가 빌립보 교회가 되고 유럽의 복음이 바울을 통해서 확산이 되는 바람에 유럽은 90퍼센트가 예수를 믿습니다. 이런 차이가 났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 바울을 아시아를 그만 두게 하고 유럽으로 돌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정함이러라.” 그래서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역사를 보고자 할 때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까 금방 바울에게 환상이 주어집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려면 바다를 넘어가야 합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아! 이것은 유럽으로 가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유럽으로 환상을 보고 간 것이 오늘 성경말씀이 됩니다.

사도행전에는 환상 사건이 11번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환상은 우리가 구별을 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신세계 일시적 환성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 마음에 아주 강한 집념과 애착이 있을 때는 그것이 보여지는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장례식장에서 몇 번 경험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단 말입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너 말 좀 해라! 왜 네가 이렇게 누워 있느냐?” 자기 마음의 강한 집념, 애착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그 사람이 괴성을 지르면서 나가자빠지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사진이 자신을 보고 말했다는 겁니다. 이런 환상 착각 현상이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정신세계는 피해 의식 때문에 그 충격이 병적으로 나타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신기루적 환상입니다. 이것은 저도 경험했습니다. 사막에 가면 목이 마르고 갈증이 나니까 여행자들 앞에 오아시스가 보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모래밭입니다. 모래밭인데도 맑은 호수가 출렁거리는 모습이 아주 확실하게 보입니다. “어? 저기 물이잖아?” 햇빛과 모래가 반사되면서 신기루 현상이 나타납니다. 꼭 물 같습니다. 그런데 모래밭입니다.

마약 복용자 상대 연구에서 밝혀진 것이 있습니다. 왜 마약을 복용하느냐? 신기루적 환상 작용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먹고 나면 자기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이 환상 세계에서 다 이루어지는 신기루적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자꾸 마약에 빠지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환상을 뭐라고 하는가? 이것을 계시적 환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특별한 때에 특별하신 방법으로 특별한 목적을 두고 특별한 사람에게 보여주시는 영적 환상입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떨기나무 불꽃을 봤습니다. 베드로는 하늘에서 보자기에서 내려와 펴보니 각종 부정한 동물이 들었습니다. 이방인 세계 선교에 대한 환상적 계시를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요한은 밧모섬에서 장차 될 일을 계시로 적어 요한계시록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게 다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 특별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적 환상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영적 기능이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영적 기능을 통해 보여주시는 계시성의 환상! 지금 바울은 무엇을 보았느냐?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이것은 우리를 유럽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다!’ 그 환상을 보고 그렇게 깨달았기 때문에 유럽으로 곧 건너가서 유럽을 복음의 관문으로 열기 시작해서 유럽 전체를 복음으로 정복했단 말입니다. 오늘 말씀 10절까지 봤는데 11절에 배로 떠나 유럽으로 건너가서 마게도냐 땅이요 빌립보라는 첫 번째 마을에 도착하여 거기서 그 복음을 전하며 선교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 나옵니다.

바울이 이렇게 환상에 사로잡힌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환상으로 예수 믿게 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메섹 길에서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기 위해 가다가 하늘에서 비치는 강렬한 환상의 빛을 보았고 자기의 이름인 고유 명사를 불러주는 “사울아, 사울아!” 하는 이런 환상적 음성을 듣고 거꾸러진 사람입니다. 그의 성격이나 사상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나 그의 사명이나 모두 어찌나 강하고 지독한지 그렇게 거꾸러뜨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 계시적 환상을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집사님들이 물으십니다. “목사님! 나는 모태신앙으로 평생 살았는데 신비적 환상을 한번쯤 보여주실 수 있을 텐데 안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TV 보는 것처럼 앞에 나타나서 보여주신 다든지 환한 빛줄기가 나한테 비춘다든지 음성이 분명하게 들렸다든지 그런 것을 나는 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걸까요? 어떻게 그런 걸 경험하는지 목사님 좀 가르쳐주세요.” 그러면 나는 대답합니다. “나도 못해봤습니다. 그런 거 안 하면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에서 떨어지고 거꾸러지고 빛을 보고 그랬잖아요? 그런 것은 하도 악질이라서 하나님이 그렇게 때려잡아야만 거꾸러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집사님 같이 모태신앙으로 모범적인 교인을 왜 하나님이 때려잡으십니까?” 이 바울은 환상이 힘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전도를 위해서 “아시아에서 그만하라! 유럽으로 가라.” 마게도냐 사람을 세워서 환상적 계시를 줌으로 말미암아 그 환상을 따라가도록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환상을 보는 사람은 누군가? 성경에 이 환상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들은 환상을 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하게 신앙이 좋았다든지 영성 훈련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사무엘과 같은 어린 애에게 별안간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를 핍박하는 사울 같은 사람에게 별안간 길바닥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때는 무서워서 산으로 가서 숨어있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시고 어떤 때는 양떼를 몰고 자기 사업에 충성하고 있는 모세에 같은 목동에게 별안간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마음대로 정하시는 사건! 믿음이 좋아서라든가 반드시 기도를 많이 해서라든가 남보다 의롭게 살고 봉사를 많이 하고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바울도 절대 환상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주신 겁니다. 그는 공상가도 아니요 감성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지성인이요 적극적 행동파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써야할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 사람을 환상으로 때려잡았습니다. 사로잡아 지금 이렇게 역사하시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이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신비적 환상만 환상으로 생각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환상은 일상생활 가운데 우리 주변에 언제나 얼마든지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어떤 때는 꿈을 통한 계시적 환상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꿈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언성으로 하나님이 주실 때가 있는 것을 우리들도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5년 전에 제가 갈보리교회 처음 취임식 할 때 이 자리에서 “갈보리 교회 새로 오신 담임 목사님, 축하합니다.” 하면서 여러분에 저한테 꽃다발을 주셨습니다. 제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날 제가 교인들 누가 누구인지 모르잖아요?

어떤 분이 제가 별안간 당황스럽게 다가오시더니 “목사님! 제가 꿈에 목사님이 취임식 때 받으신 그 꽃다발을 저한테 주셨습니다.” “그러면 제가 뺏긴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황홀하고 감격하고 목사님이 왜 저에게 주셨을까요?” “좋은 꿈입니다. 좋은 계시가 있을 겁니다. 함부로 막 말하지 말고 가슴에 품고 가만히 계셔보세요.” 오늘 아침에 1부 예배 때 “그동안 저는 신학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 후로 신학공부해서 마쳐서 이제 다음 달부터 개척교회를 돕기 위해서 떠납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또, 제가 지금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잖아요? 말씀을 통한 계시적 환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영적 감동이 내 갈 길을 정할 수 있는 권위가 있어야 됩니다. 이게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영적 환상 계시입니다.

어떤 때는 사건을 통해서 계시적 환상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제 마음에 좀 섭섭한 일이 있는데, 교인 가운데 아주 실력이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돈도 많고 그 사람이 마음을 쓰고 움직이면 교회가 괜찮아질 일이 무지 많습니다. 그런데 안 움직입니다. 좀 얄미운 것 같습니다. 온 교회가 다 움직여서 교회 건축하자고 하는데 그 사람이 한번 내놓으면 그런 문제가 넉넉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고 선교도 그 사람이 10사람, 100사람 몫을 담당할 수 있는데도 꼼짝도 안합니다. 사업이 망했습니다. 그 사람이 뒤집어 졌습니다. “목사님, 나 지금까지 헛살았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겁날 만큼 광신도가 되어서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이제 생명까지 바칠 겁니다.” 얼마나 열심이고 뜨거운 사람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목사님, 세계 선교 여행을 다니실 때 저도 좀 데리고 다니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실 정도로 그런 사람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람은 망하는 사건이 그 사람의 계시가 되었습니다. 뒤집어지고 거꾸러졌잖아요? 사실 우리 성도들은 환상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가운데 내가 딱 붙어서 날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건들을 환상적 계시로 해석하면서 그 속에서 영적 힘을 얻어가지고 사는 그게 우리 성도들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천국을 목표로 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실적으로 말하면 천국이라고 하는 환상적 세계를 계시적으로 믿고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성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환상 속에 사는 겁니다.

1880년대 미국의 20대 중반 청년 하나가 인도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가기 위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인도의 문화를 공부하고 언어를 공부하고 ‘이만하면 내가 아시아 복음화에 공헌할 수 있겠다. 내 이 젊은 청춘을 인도에 가서 불태워 진리를 전하겠다.’ 그러니까 후원하는 사람들이 “가라! 우리가 후원해 주겠다.” 그런데 하나님이 못 가게 하셨습니다. 막아버리셨습니다. 도무지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엉뚱하게 새로운 선교지가 하나 나타났는데 한국이라는 나라입니다. 그때 그는 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도대체 지구상 어디에 붙어있는지 세계 지도를 펴놓고 들여다보면서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한 채 1884년 4월 5일 제물포 한국에 내렸습니다. 그의 소원은 인도 선교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느냐? 우리 대한민국을 찾아온 선교 사역자 가운데서 가장 큰 성과가 바로 그 선교사를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언더우드입니다.

오늘 말씀에 제가 한 가지 영적 교훈을 얻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계획한 길을 막으실 때는 반드시 다른 길을 열어주십니다. 가장 좋은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이것을 오늘 성경말씀에서 얻으셔야 합니다. ‘아! 나는 이 길이 가장 좋다고 계획을 하고 온갖 노력을 했는데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너희들 아시아에서 하지 말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환상을 주어 유럽으로 발길을 돌려 유럽이 복음화 되어서 세계 선교에 공헌을 하고 그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교회를 세워 세계 선교에 공헌을 해서 이만큼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방황하는 영혼은 오늘 말씀 속에서 계시적 환상을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계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나의 갈 길을 정하는 믿음의 권위와 능력이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져서 나의 일평생 어떤 길을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의 지시를 따라 살 수 있는 영적 권위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주간도 이러한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모든 사역 현장을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면서 분별력 있게, 그리고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교우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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