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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 모인 사람들 (행 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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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11월 11일입니다.
1자가 네 개나 서 있는 날입니다.
1자는 서 있어도 1자, 누워 있어도 1자입니다.
저는 이왕이면 서 있는 1자가 좋습니다.
서 있다는 말은 ‘우뚝 선다, 잘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옆의 분과“11월, 일어서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여러분 범사에 일어서는 승리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우리에게‘무엇을 믿습니까? 어떻게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사도신경대로 믿습니다’라고 답하면 가장 정확합니다.
한번 해 보겠습니다.
‘뭐 그런 걸 해느냐고’생각하지 말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 무엇을 어떻게 믿습니까?
-‘사도신경대로 믿습니다.’

☞ 같이 해보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 ”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마음으로 믿어도 입으로 고백하는‘시인’이 있어야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였음을 확실하게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사람들에게 만져진 일이 두 번이나 있었고(마28:9, 요20:17),
- 제자들에게도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나를 만져 보라”하셨고(눅24:39)
- 요한복음 20장 27절에서는 도마에게 상처를 만져 보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고전15:6)라고 했습니다.

기다리라 … 받으리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확실한 많은 증거로 다시 사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행1:3).
그리고 승천하시기까지“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중에 특별히 분부하셨던 말씀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끝부분과 사도행전 처음 부분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눅24:49)

사도행전 1장 4절에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신 명령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세력을 잡고 거주하는 곳이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가급적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야 안전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출신도 아니고, 예루살렘에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루살렘에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없는 예루살렘에 머물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시며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람산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였습니다(행1:12).
그 때 그곳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 ”(행1:6)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 주님이 세우실 나라, 회복시킬 나라 …
그 나라를 이루실 때가 이 때입니까? 이제 그 일을 하실 것입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도 간단했습니다.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
“It is not for you to know…”
이 말은 ‘너희는 알 것 없어’라는 의미입니다.
“그 때(times)와 그 시기(기한, dates)은
아버지(하나님)의 권한으로 정하는 것이니 그것까지 알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구별하신 답입니다.
»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일정과 계획을
인간이 알려 하거나, 예측하거나, 변경시키려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시간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달력이나
사람들이 계산하는 시간으로 판단하여 때를 알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데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감람산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불과 1km도 채 안되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구약 율법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안식일에 걸어도 좋은 거리를 1km도 안되게 정했습니다.
감람산에서 → 예루살렘으로 가는
1km도 안되는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죽음의 길입니다.
쉽게 기쁨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라”고 하셨기에
성령의 약속을 “기라리라”고 하셨기에
그 때 그 사람들은 말씀에 순종 아니, 복종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조롱해도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이 천국 가는 길 되신다는 믿음 하나뿐입니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믿는가?”하는 것이고
그 믿음은 “순종하는가?”하는 것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람들은 「믿었고/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락방에

13절에 보면 그들은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누가 모였습니까?
13절에 보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파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그리고 14절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아우들이 모였습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다양한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처음 사람들 … 처음 교회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신분과 성별, 출신과 직업 … 등을 초월해서 모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동생들까지도 모였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요7:3~5).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님을 보고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였던 것입니다.

처음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 …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 모였던 사람들처럼 오늘 이 세상의 교회들도 그래야 합니다.

고향 같은 사람, 수준 비슷한 사람들,
자기 좋아하는 사람끼리만 모이는 공동체는
비록 예수님 이름으로 모였다고 할지라도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는 처음 모였던 사람들처럼 신분과 성별, 출신과 직업,
빈부의 격차, 삶의 수준 … 등 모든 것을 뛰어 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증거 하는 사람들이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어떤 조건도 이유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을 믿는 증인, 약속을 믿는 사람,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그 외의 어떤 조건도 있을 수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좀더 사랑하고, 좀더 귀히 여기고,
좀더 잘 모이고, 좀더 일 많이 하라고
교구, 속회, 선교회, 팀 … 등을 구성하여 조직화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조직이/조직의 임원(회장)이/조직의 친교가
교회의 중심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도 하지만
예배 후에 친교에 더 몰두하고 관심 갖는 분들
그분들은 진정한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조직의 대표나 임원이 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 …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봉사하고 활동도 하지만
교회 밖 단체나 조직의 친교에 몰두하고
그런 조직의 대표나 임원이 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 …
교회의 집사가 되느냐, 권사가 되느냐, 장로가 되느냐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진 사람 … 그런 사람은 바람직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감투병’에 걸렸거나‘친교 과잉증’환자입니다.

친교 과잉증은 너무나 친하고 너무나 가까워서 …
똘똘 뭉쳐 있는 그들과 공통분모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만큼
특별한 관계를 이루고 지켜가는 병적 현상을 말합니다.

물론 지금은 네트워크 시대입니다.
혼자서 성장할 수 없고, 혼자서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든지 원만한 대인관계와
인맥관리는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기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
교회에 와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과 이웃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래 한국인들의 문화적, 정서적 특징 중 하나가 집단주의입니다.
가족주의에서 비롯된 집단주의는 지연, 어느 지역 출신이냐
학연, 어느 학교 출신이냐에 따라 더 강하게 연합되고 견고해 진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혼자 있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이런 저런 모임을 만들고 거기에 속하려고 합니다.
제일 쉽게 만드는 모임이 동창회입니다.
도민회, 군민회, 심지어 면민회도 있습니다.
하여튼 모임이 많습니다.
‘노사모’라는 모임은 워낙 유명하니 그렇다 치고
‘강사모’라는 모임도 있다고 합니다.
강원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강사모’고,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강사모’라고 합니다.
보신탕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임도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해서‘강사모’라고 합니다.
‘막사모’도 있습니다.
막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막국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런 집단주의적 인맥 형성은 부정적 폐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파워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자꾸만 확대되고 있습니다.
<조관일지음 「비서처럼 하라」p.238. 참조>

물론 교회 안에서도 친교는 중요합니다.
친교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사귐을 잘 하라고 … 그리스도의 형제 우애를 잘 나누라고 …
이왕이면 잘 모여서 기도하고 봉사하라고 …
선교회, 속회, 팀 … 등을 조직하여 활동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친교 과잉증에 이르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허물어버리게 됩니다.
너무 친해지다 보면 하지 않아도 되는 ‘깊은 이야기’도 주고받습니다.
그러다 보면 막말을 하게 되고 무례해집니다.
성경에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3:5)
신앙으로 모인 사람들이 무례하고 막말을 하면
그것은 이미 신앙적인 모임이 아닙니다.

친교 과잉증에 걸리게 되면 모인 사람들의 대화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연속극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옛날이야기, 남의 이야기 … 등으로 침이 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친교 과잉증에 걸리면 비슷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만 어울리려고 합니다.
연말이 되어 속회를 분리하여 나누면
어떤 분은 ‘나는 지금까지 모이던 우리 속도원들이 아니면(분리되면)
교회 안나오겠다’고 협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선교회, 여선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회를 다시 조직하여 나누면‘목사님, 전도사님 ~’하면서
자기 생일이 양력과 음력이 다르다고, 실제 나이가 다르다 … 고 하면서
이 선교회로, 저 선교회로 옮기게 해 달라고 전화하고/찾아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처음 모인 사람들 … 지상 최초의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신분과 사회적인 수준, 출신과 성별 … 등을 초월하여 모였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모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용납했습니다.
크지도 않은 다락방에 함께 어울려 앉았습니다.
남자와 여자,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 지역출신이 다른 사람들이,
많이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것이 처음 교회인 것처럼 오늘 여기 모인 우리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고향이 어디든, 출신학교가 어디든,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지지하는 정당이 같든 다르든,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가 같든 다르든 …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 그런 얘기 하지 마십시오.
개인적으로 여러분이 어느 정당, 어느 후보를 좋아하는 지 그것은 개인의 생각입니다
교회가 그 일에 좌우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개인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지지하는 대통령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되어야

교회는 예수 이름으로 모이고, 예수 안에서 사귀고,
예수 안에서 하나 되고, 예수 향내 풍기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먼저 믿은 것, 나중에 믿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간혹‘자기가 예수 믿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래 …’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잘 들으세요.
믿은 지 오래 되었다고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은 지 오래 되었는데 지금 별 볼일 없이 신앙생활 한다면
나중에 믿었지만 지금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래 믿었다는 것이 벼슬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먼저 온 것, 나중에 온 것 가지고 따집니다.
교회에 먼저 왔으면 얼마나 먼저 왔고,
나중에 왔으면 얼마나 나중에 왔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도 온 지 얼마 안되었습니다.
30년이 되었어요, 40년이 되었어요?
먼저 된 것도 나중 된 것도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집사, 권사, 장로가 먼저 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어떻게 신앙생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며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신앙과
교회 생활에 먼저 된 것, 나중 된 것이 얽매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서로 용납하고, 하나 되고, 귀히 여기고,
서로 덮어주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있었던 <추수감사절 찬양잔치>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지나치면 “친교 과잉증”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선교회는 배제하는 잘못을 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모여 한 마음 되고 나가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가정, 직장, 학교 … 언제 어디서든지 …
처음 예수 믿은 사람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증거 하는 삶이 되기 위해
빛도 되고 소금도 되는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이해하고, 덮어주고, 용서하고, 하나 되는 일에 …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종하고 순종하는 일에 … 열정을 다해야 합니다.

집사, 권사, 장로님들, 각 부서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 …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교회 일이기 때문에 하는 일들에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십니까?

에버랜드에 가 보셨습니까?
에버랜드가 창립된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에버랜드 사원교육을 할 때마다 나오는 한 사람의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가족들과 함께 에버랜드에 놀러온 어떤 부인이
실외에 설치된 간이 화장실 변기에 그만 반지를 빠뜨렸습니다.
부인은 발만 동동 구르며 속상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해원’대리가 망치를 가져와
간이화장실 벽과 변기를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마침내 배설물들이 바닥에 질펀하게 드러나자
일일이 손으로 변을 골라가며 1시간여를 헤집은 끝에
기어이 반지를 찾아내 부인에게 전해드렸습니다.
유해원 대리는 에버랜드에서 일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의무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일하는 일터에 찾아온 손님에게
반지를 찾아 주어야 한다는 열정으로 일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에버랜드의 전설적인 일화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전옥표 지음. 「이기는 습관」참조>

오늘 예수 이름으로 봉사하고 섬기는 자리에 있는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일하십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일하십니까?
내게 유익이 없어도,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자리에 있습니까?
내가 싫어하고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
내가 속한 선교회나 부서에 있다고 싫어하십니까?

사람들이 토라지고 돌아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말’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 때문에 상처 받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은혜도 될 수 있고 감사도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천의 어떤 목사님이 맹장이 터져서 수술하고 병원에 계십니다.
어제 구로동에 있는 어떤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녁에 병원에 <문상>을 가고 밥을 먹읍시다.”
<문병>과 <문상>은 다릅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게 ‘문상을 하고 저녁을 먹자’고 하기에
제가 ‘문병이냐 문상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그때서야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고 요즘 교회에 초상이 많이 나다보니
말을 잘 못했다고 잊어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녁에 병원 앞에서 그 목사님은 만나 병실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입이 무거운 사람인데 …
당나귀 귀를 본 이발사처럼 말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병을 왔고, 저 이는 문상을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환자가 웃으면 안되는데 웃음을 참느라 애썼고 병실이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환자이신 목사님이
“고맙습니다. 제 삶의 마지막까지 해결해 주셨습니다.
문병만 오신 것이 아니라 제 삶의 마지막까지 해 주셨으니 고맙습니다.”라고 하시는데 …
저는 그 말씀을 듣고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니 뭐야, 문상? 문상이라니 …’하면서 화를 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똑같은 얘기인데 좋은 뜻으로 여기며
웃으며 받아들이시는데 은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마음속에 어떻게 담아 두고 계십니까?

우리는 조그마한 것이라고 덮고 이해하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작은 다락방에 모였던 처음 교회 사람들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사람들이 하나 되어 기도하기 위해 힘썼던 것처럼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섬김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 저 높은 곳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믿음을 지키고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사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일을 잘 감당하여 훗날‘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는 자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이름으로 하나 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증거하는 증인된 삶을 살게 하시되
빛 되고 소금된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이해하고, 덮어주고,
용서하고, 하나 되는 삶이 되도록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살려면 성도들이 예배의 자리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땀 흘려 애써 모은 물질을 구별하여 드리려 합니다.
저들의 정성된 마음을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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