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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스타일 (골 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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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골3 : 12 - 17절           
제  목 : 예수 스타일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다 할지라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가치가 없습니다.
고장 난 기기는 없는 것 보다 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할 때
  예수 믿는 것이 나의 삶에 더 불편하고 방해가 될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때에
    제 기능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그 해답을 얻어
    예수 스타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의 기록 목적은 당시 골로새 교회 안에 침투한 혼합주의                     
이단사상을 막으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1장에서 만물의 으뜸이시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먼저 주인이 바뀐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인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는 골1:27절 - 만대로부터 감취어진 비밀이었는데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제 우리에게 드러났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감추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눈이 뜨여져야 만이 신앙생활 바로 할 수 있습니다.

2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생활의 근거를 예수께 두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뿌리를 박고 있지 않은 신앙은
      항상 다른 사상에 물들기 쉽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이단사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하나는 유대주의 즉 율법적 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이 뜨여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신앙생활은 자연적으로 율법에 메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오래 할수록 짐이 되고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즐겁고 신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는 매력이 있습니다.

2) 혼합주의 이단사상입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외형적으로만 그리스도인인체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도 좋지만 세상에 다른 것도 좋은 교인
어떻게 보면 아주 합리적인 신앙 같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예수 생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답은 두가지 입니다.
1. 그 신앙이 율법주의적 신앙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눈이 뜨여져
자원하여 즐겁게 신앙생활 봉사 생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적인 것을 더 사랑하다 보니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장에서 바울은 우리게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3:에서 1-11절까지 살펴보면 
1)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2)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면 새사람을 입으라합니다.
구체적으로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 무엇을 말합니까?

1.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12절)

본문말씀에서
1. 12절 [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 ] 합니다.
  여기서 먼저 옷 입으라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옷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사람의 신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바로 예수 믿고 칭의의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그 사람의 스타일을 말합니다.
옷 입은 것 보면 그 사람의 품위가 드러나지요
그래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13:14절 [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 ] 합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 바로 예수 스타일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자세가 바뀌어진 사람들입니다.

창35:에 보면 야곱가정에 부흥회가 열립니다.
야곱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환란날에 만나 주시던 벧엘의 하나님 만나러 올라가자
그리고 이방신상 버리고 마음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꿔 입자 ! 합니다.
이때 의복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의미합니다.
그리스고인은 삶의 스타일이 바뀌어진 사람들입니다.           
예수 스타일로 바뀌어진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 스타일이 어떤 모습이냐?
바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이런 말들을 대할 때 그냥 간과하기 쉽습니다.
왜? 당장 어떤 유익이나 효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스타일이 되지 아니하고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제 기능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오늘 나는 어떤 것으로 옷 입고 있습니까?
나의 삶의 모습과 스타일이 어떻게 보여집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할 때 어떤 이미지로 받아드릴까요.
우리는 예수 스타일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의 모습 가운데서 예수를 아는 냄새가 나야 합니다. 

1) 먼저 긍휼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사랑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마는
      긍휼은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긍휼은 베풀다 또는 긍휼을 입었다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긍휼을 입은 자만이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긍휼을 입고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자비로 옷 입어야 합니다.
눅10: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에서 말씀하시듯이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 할 때
        [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 라고 했습니다.
          이웃에게 베푸는 친절 이것이 자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의 장삿술에서 나오는 친절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써 은혜 입은 자로서의 예수 사랑에서 나오는 친절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같이
  가던 길 멈추고서라도 친절을 베풀 줄 아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겸손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마음입니다.
겸손은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늘 교회 안에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1. 늘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남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4.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길 줄 알아야합니다.
5. 온유로 옷 입어야 합니다.
신앙으로 잘 길들려진 기질입니다.
  온유는 마치 기계에 기름 친 것과 같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마찰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온유한 사람은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포용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6. 오래 참음으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모든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합니다.
오래 참음은 바로 시험에 대한 합격의 비결입니다.
오래 참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예수 스타일인 것을 나타내 보이는데
    꼭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2.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데 꼭 유의해야할 점이 무엇입니까?(13-14절)
13절 [ 누가 뉘게 협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납하고 용서 못하는 사람 예수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용서를 받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다면
    예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용납하고 용서할 줄 아는 자들입니다.
13절 [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
여기서 용납은 원문 헬라어로 ‘ἀνεχόμενοι’(아네코메노이)인데
    참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납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잘 참아내는 것입니다.
    맞받아쳐야 직성이 풀릴 텐데 안으로 삭힙니다.
    용납이 없으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용납은 자기 자신이 죽지 않으면 힘듭니다.
    용납은 인내와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며 부닥치는 것은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13절에 또
[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
용납은 문제 해결의 소극적인 면이요
    용서는 적극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용서는 용납한 사실에 대하여 행동으로 보여주는 일입니다.
용서는 용납의 구체적인 열매입니다.
용납만 한다고 수평적인 인간관계에서의 트러블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 참는다고 일의 능사가 아닙니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용납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가슴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용납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용서는 원수를 변화시킵니다.
용납에 머물러 있는 자가 있고 용서로 실천하는 자가 있습니다.
분쟁이나 미움을 원천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용서입니다.
용납하는 일도 어렵지만 용서하는 일이 더욱 어렵습니다.
용납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없기에
    조용히 나 하나 죽어지내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용서는 죽어지고 있는 나 자신을
    상대방이 다시 한 번 확인 사살까지 하는 자리까지 내려가야 하니까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내가 당한 일 안 당해봤으니 용서하라고 하지만
    목사님도 내 경우 되어보세요. 용서할 수 있는지
맞습니다. 나도 용서할 수 없을꺼예요.
우리는 참 용납하고 용서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내 감정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춤을 춰야하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용납하고 용서하는 은혜를 받으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13절 또 읽어 봅시다. 다같이
[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용서요 완전한 용서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도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의 용서가 헛되지 않게 말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할 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너를 용서한 것은 무엇이냐?”

먼저 손 내미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평안이 옵니다.

펴온 글입니다 - 재목은 <막걸리 한 잔보다 못한 예수>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인데
목사님이 대학생들과 농촌봉사를 갔는데
거기서 한 할아버지 한테 예수 믿으라 하니깐
[ 나 예수 안 믿어 막걸리 한 잔 보다 못한 예수 왜 믿어? ] 하더랍니다.
이야기인즉 농사짓느라고 가끔 물 때문에 다투는데
안 믿는 사람은 다투고 나도 막걸리 한 잔이면 아무 일 없었던 것같이 되는데
예수쟁이들은 한 번 다투면 아이들끼리도 못 놀게 한다는 것입니다.
막걸리 한 잔 보다 못한 예수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안산에서 목회하는 목사님(고훈) 간증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삼남매를 외면하고 딴 여자와 도망가 버렸습니다.
갈 곳 없는 그 아내는 서울에서 안산으로 이사와
    전도 받아 우리 교인이 되었습니다.
모진 고생 다해가며 삼남매 모두 대학을 마치게 했습니다.
20여년 교회 섬기며 권사 직분을 받아 충성했으나
      50세 중반에 신부전 합병증으로 임종을 맞게 됐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가니 용서를 빌었습니다.
“목사님은 나의 남편을 용서하라 하셨으나 나는 도저히 용서가 안 돼     
엊그제 찾아온 그를 저주하며 쫓아 보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을 뵙고 이제야 그를 용서합니다.”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항의를 했답니다.
“ 하나님, 왜 죄진 사람은 저토록 건강하고 형통한 데
  억울하게 버림당한 권사님은 고통으로 평생 살게 했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의 응답이 마음에 이렇게 왔답니다.
“죄 지은 사람의 죄보다 믿는 사람이 용서해주지 못한 죄는 더 크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상은 너 자신을 위한 것이다.”
라고 하더랍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다 용서하셨습니다.
눅23:24절 [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모르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

그리고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띠를 잘 매어야 옷이 벗겨지지 아니합니다.
    결국 예수 스타일은 사랑의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그럼 우리가 예수 스타일로 살아갈 때 나타나는 특징이 무엇일까요?


3. 예수 스타일의 두 가지 특징이 무엇입니까?(15절)
15절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합니다. ]

1)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 가운데 한 가지가
  한 몸을 이루고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 예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어 주시고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바로 십자가의 평강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날 밤 주님의 고별 설교에서
요14:27절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렘29:11절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장래소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내 마음에 평강이 주장할 줄 믿습니다.

2) 15절에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또한 이란 말은 동시에 란 뜻인데 예수 스타일은
    마음에 평강이 있으면 입술에는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점심 잘 먹고 사우나 하고 찜질방에 누워서 하는 말이
[ 아무 생각 없다. ]
평안하거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그냥 감사하라 하지 아니하고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Doing 이전에 Being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자란 감사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면 절로 감사하는 자가 됩니다.
기억하십니까?
성경의 신앙의 인물들은 전천후 감사의 사람이란 것,
    용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스펄죤의 설교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자에게는
  촛불도 전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합니다.

살전5:18절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 결코 무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감사의 사람 - 더 큰 감사를 하게 된다.
특히 일용할 양식 주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로 하여금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평강과 감사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
즉 예수 스타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4. 우리로 하여금 예수 스타일로 살아가게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16절)
16절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
예수 스타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씀이 내 마음에 풍성히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을 수 있는 것도
우리가 마음에 평강을 가지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비결도
바로 우리 마음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수1:8절 [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데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이 네 속에 풍성히 거하면
그 말씀이 결국 우리를 평탄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신앙생활 가만히 보면
교회 안에서는 아멘, 아멘 잘하지만 실지 생활에 문제 닥쳐보면
말씀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해 버립니다.
그러면 문제가 더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성경이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평소에 성경말씀 가까이 하고 성경공부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나이 50이 넘어가면 건망증이라는 것이 생겨 잘 까먹습니다.
그러니 나이 들수록 성경공부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더 자주 듣고 더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완전히 살이 되고 피가 되도록 연습해야합니다. 

시19:10절 [ 주의 말씀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
꿀맛은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그 희열은 평생 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되면 삶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5. 말씀이 풍성히 거할 때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까요?(16-17절)

1) 말씀이 내 속에 충만하면 하나님을 절로 찬미하게 됩니다.       
16절에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 는
    신앙의 감격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찬송을 말합니다.
    말씀 충만하면 찬송 충만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은혜 받은 성도가 찬송하지
    은혜 받지 못한 성도는 찬송도 잘 안합니다.
성도는 늘 말씀을 통해 은혜 받아야 찬송도 있고 감사도 있습니다.
말씀에 은혜 받는데 마음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마음으로 찬송을 하더라도
    은혜스러운 찬송을 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17절 [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합니다.
성령충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질서 확립
말씀충만, 믿음충만, 지혜충만, 다 같은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지면 나는 없어지고 주님만 보입니다.
말씀충만 해지면 입만 벙긋하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교회, 자랑하고
          입만 벙긋하면 감사, 이런 말들 밖에 없습니다.

<결론>  예수 스타일이 됩시다.

1.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는 자가 됩시다.
2.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장하여 감사하는 자가 됩시다.
3.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감사의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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