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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나라 찾기 (욥 14:1-6, 롬 14:7-9, 눅 1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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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찾기 (욥 14:1-6, 롬 14:7-9, 눅 17:20-24)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저희들은 살아가면서 늘 생명의 말씀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신약도 그렇고 구약도 그런데 특별히 구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사정에 따라 창세기부터 말씀을 주셨는데 어떤 책을 보면 예언자 또는 위대한 어느 여성, 남성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곤 합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을 읽으면 어느 특정한 인물과 하나님이 하시는 대화,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저의 삶을 투영시켜서 저의 삶의 근거로 삼기도 하고 삶의 자료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성경말씀이 다 읽기 쉬운 게 아닙니다. 특별히 읽고 싶지 않다. 읽기가 거북스럽다 하는 책이 하나 있습니다. 욥기서입니다.

욥기서 이야기는 설교 말씀도 잘 안하려고 하고 잘 읽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욥이라는 사람이 부자요, 자손도 많고 의로운 사람. 종교적으로 모범, 또 갑부, 자손이 많은 유복한 사람.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대로 이 욥이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아도 엄청난 진노를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을 만큼 고난의 역경 속에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것이 욥기서 전체의 90%이상이 됩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여러분은 그 얘기를 읽고 있으면 제 마음이 불편하고 힘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을까? 이런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뭘까? 우선 욥의 심정 한번 들어가 보십시다.

오늘 읽은 말씀을 제가 요약해 보겠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는 날이 짧고 생애마저 괴로움으로 가득합니다. 인간이 다 그렇다는 뜻이지요. 피었다가 시든 꽃같이 사라집니다. 제가 당신한테 저를 축원하시는 하나님 당신한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저 좀 그만 보고 사십시오. 눈 좀 저한테서 떠나주십시오. 숨이 막혀 죽을 지경입니다. 숨 좀 돌리게 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얼마나 살지 모르나 제가 살아갈 남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내 맘껏 살게 내버려 두십시오. 의로운 사람 신앙이 좋은 사람. 이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생각은 안하고 하나님 제발 저를 쳐다보지 마십시오. 지겹습니다. 저 숨 좀 쉬게 내 속에서 떠나주십시오.

내 멋대로 한번 살아보게 맘껏 살고 싶으니 제발 떠나 주십시오. 눈도 귀도 가슴도 떠나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분이 마지막 가서는 모르겠습니다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욥기서 결론입니다. 여러분 욥기서 읽으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축복주신 하나님이 글쎄 저보고 이런 고통 주십니까?

내 재산 모아논거 몽땅 다 탕진했고 강도당했고 알거지가 됐습니다. 그렇게 많이 선물로 주셨던 자손이 하나하나 다 죽어갑니다. 친구도 떠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절 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의롭다고 칭찬받는 제가 하나님이 병을 주셔서 온갖 질병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나 괴롭습니다.

아픈 것도 괴롭고 가족 잃은 것도 괴롭고 재산 다 읽은 것도 괴롭습니다. 떠나세요. 욥이 생각하는 고통의 제 2탄입니다. 이런 비슷한 고통 당하신분 꽤 있을 겁니다. 근데 욥에게 또 하나의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복 받고 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그렇게 열심히 믿었더니 오늘 제게 주신 이것은 뭡니까? 하나님 붙잡고 살자니 괴롭고 하나님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 갈림길에서 욥은 고통 합니다. 떠나주세요. 눈길도 필요 없습니다. 숨 좀 돌리게 해주세요. 맘껏 살고 싶습니다. 제발 가만 좀 놔두세요. 당신 없이 좀 살고 싶습니다.

근데 당신이 안 떠납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 모시고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 쫒아 버려야 합니까. 그 갈림길에서 욥은 그 고민이 더 클 겁니다. 또 고민이 있습니다. 그렇게도 축복 주셨던 하나님께 상황이 나빠졌다고 완전히 반전됐다고 하나님을 앞에 놓고 분노를 바랍니다. 배신자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인간적인 배신을 합니다. 아니 신적인 배신을 합니다. 하나님 떠나십시오. 당신 보기도 싫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욥의 고민은 이 고난의 벽을 뚫고 나가고 싶은데 뚫을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유한한 인간인건 다 아는데 그 유한한 살 동안만 좀 제대로 주지 왜 그것도 유한한 인생을 시샘이라도 하듯 마지막에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살아갈 날 수도 달수도 년 수도 다 하나님이 정해놓고 놔서는 저한테 이렇게 고난을 주십니까? 인간에게 분노는 제가 편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소이다. 저한테 억울하고 힘들고 고난과 가난과 질병이 닥치면 당신 어디계십니까? 아니 당신 차라리 없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없이 나 홀로. 근데 그건 해법은 아닙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당신 없이 나 홀로. 근데 하나님은 여전히 나 없어도 좋은데 나는 항상 그대 앞에 있노라. 하나님의 말씀과 죄 고백사이에 우리는 어리둥절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활을 매번 맞이합니다. 욥의 고민은 사실 이렇게 하지만 우리가 알아둘게 있습니다. 욥은 병들기 전까지 고난당하기 전까지 누구도 맛볼 수 없는 부를 맛보았습니다. 자손의 축복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신앙의 경지도 다 가보았습니다. 누구보다도 부자이고 누구보다도 훌륭했습니다. 이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날까지 연장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오늘 그걸 중단시킨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욥에게는 억울할 겁니다. 차라리 부를 주시지 말지. 줬다 뺏어가는 건 뭡니까.

건강을 주시지 말던지 왜 주었다가 뺏어갑니까. 아마 분노가 클 겁니다. 근데 사실은 욥의 이야기 속에 욥이란 사람이 아주 가난했습니다.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날 때부터 불치의 병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악한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는가 보기 위해서 욥기서를 썼다고 하면 아마 우린 읽을 때부터 새롭게 태어날 사람, 부자로 될 사람, 그리고 존경해 마지않을 텐데 엄청나게 잘 사는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니까 욥은 분하지만 저는 반만 분합니다.

저한테도 욥처럼 그렇게 좀 멋지게 살 수 있는 기간이 있었더라면 그걸로 족하고 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찌 하나님한테 이렇게 불평을 해댑니까? 그러나 욥은 욥대로 불평이 있고 불평을 받을 만은 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뜻인지는 모르나 지금까지 잘나갔던 욥의 얘기가 아니고 잘나갔던 사람도 못 나갈 수 있다.

최고의 부자가 알거지도 될 수 있다. 하늘에 올라갔던 사람이 땅바닥에 떨어질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의 운명 속에 하나님 뭐하고 계시냐면 땅에 떨어질 때도 함께 계신다. 하늘 끝에 올라갈 때도 계신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역사를 오늘 욥의 얘기를 통해서 하시려고 합니다.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그러나 마지막까지 읽어보면 하나님은 욥이 부자일 때도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좋은 일 하게 하셨습니다. 알거지가 된 다음에도 하나님 자신이 알거지가 돼서 욥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욥의 얘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겁니다.

욥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우리가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잘 나가게 축복주시는 하나님 찾아 여기저기 다니지 마십시오. 당신 속에 있소이다. 아주 괴롭고 힘들 때 우리를 위로해주는 하나님 여기저기에서 찾지 마십시오. 당신 가슴속에 있습니다. 이 말을 제가 이렇게 좀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의 말씀이 하나님 나라 찾으려고 하나님 찾으려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얘기하는 사람이 있거든 따라가지 마십시오. 그 말을 학술적으로 표현하면요 하나님은 바다에도 있고 산꼭대기도 있고 도심에도 있고 시골에도 있고 어디든지 있습니다. 제 발길 닫는 곳마다 있습니다. 가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제가 지어 줄 수 있습니다. 귀신, 수신, 태양신. 신 이름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인간은 곳곳에 살아가면서 많은 신들을 만났고 신들을 만날 때마다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제가 산신한테 물어봤더니 자기는 신이 아니랍니다. 그러나 산신이라는 이름이 뭔가는 있습니다. 희랍신화에도 로마신화에도 이집트 신화에도 우리나라 신화에도 수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곳저곳에 가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만나거든 그게 신이 아니니라. 예수의 말씀입니다. 아마 욥은 신을 만나기 위해서 부자를 만들어 주시는 신. 성공의 신. 실패의 신. 곳곳마다 가서 만나고 싶은데 욥의 고민입니다. 만날 수가 없습니다. 욥의 하나님은 한분이시니까요.

그 하나님이 부유할 때도 계셨고 기쁜 때도 계셨고 슬픈 오늘도 함께 계신다고 욥은 믿고 있기 때문에 고민입니다. 신이 여럿이었으면 선택의 폭이 있을 텐데 미안하지만 예수 믿은 사람의 신의 선택의 폭은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네 맘에 있느니라.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면 갈 때마다 만나는 전혀 다른 여러 신. 그것을 다신, 범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 군데 있는 신. 그래서 학문적으로 가는 곳마다 신이 있다. 범신론.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말씀은 그런 신 말고 가는 곳마다 신을 만나는데 다양한 모습으로 만나는데 물어봤더니 그 신의 이름이 저기 계시는 분, 여기 계시는 분 똑같은 신. 한 분이신 신이더라.

오늘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한 분이신 하나님이 부자 될 때도 계시고 가난할 때도 계시고 웃을 때도 계시고 울 때도 계시고. 그런 하나님이 진실이지 항상 웃기만 하는 신. 항상 배고픔만 위로하는 신. 그런 신은 너희들이 만든 신이지 하나님은 아니니라. 오늘 욥에게 이런 얘기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저는 세상을 살아가고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조건 속에서 살아갑니다. 햇빛이 날 때도 있고 어두울 때도 있고 비올 때도 있고 아름다울 때도 있고 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데요. 간구해봤자 만나는 하나님은 같으신 분 저는 그 신을 믿고 좋아합니다.

왜? 신이 따로 떨어진 게 아니라 한 분이 저의 모든 것에 다 동행해 주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려울 때 도와주시는 하나님. 저한테 행복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실족할 때 채찍질 하시는 하나님은 제가 잘될 때 박수 쳐주시는 하나님 이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과거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우리가 만들어 논 방식으로 찾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제 삶의 조건이 이루어지고 제 삶의 발자국이 있는 곳마다 그곳에 하나님이 똑같은 조건으로 저와 함께 인생을 잡고 계신다. 오늘 욥보고 이것을 알라는 겁니다.

제가 오늘 얘기하나 들었는데 92세 된 노인이신데 이 분이 아내를 일찍 사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갈 곳이 실버타운 밖에 없어서 실버타운으로 가게 됩니다. 갔더니 실버타운의 직원이 창문을 가리키면서 창문틀은 마음에 드십니까? 커튼은 맘에 드십니까? 방안 가재도구는 맘에 드십니까?

이분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미 내가 가져야 할 보람된 행복은 살 장소는 실버타운으로 정했고 실버타운에 모든 것은 나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하겠다. 내가 살 곳이므로. 그랬더니 이 직원이 이런 분 처음 봤다고 맘에 들어야 할 텐데. 아니 맘에 들기로 하고 왔는데 들고 안 들고 가 무슨 상관이냐 행복은 결단 나름이지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내가 행복하다면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좋다고 하고 들어서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교회 가서 은혜로운 말씀 듣겠다고 가시면 은혜가 되는 거고 가서 구경해 보고 하자 그럼 안 돼는 거지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나 같은 거지요. 이분이 마지막에 이런 얘기를 썼습니다.

은행에 은행계좌를 두고 돈을 모으듯이 우리 인생에도 뱅크 어카운트가 있습니다. 인생 어카운트입니다. 제가 다섯 가지만 보존하겠습니다. 다섯 가지 보람된 삶의 조건입니다. 마음속에서 미워하는 증오를 없애십시오. 그게 바람직한 삶의 제 1의 조건입니다. 그것 담고 살아가지 마십시오. 불행합니다.

마음속에서 근심, 걱정을 몰아내십시오. 그건 질병입니다. 몰아내는 거 두 가지 사는 거 세 가지입니다. 세 번째로 단순, 소박하게 사십시오. 네 번째는 가능하면 보다 많이 베풀면서 사십시오. 다섯 번째는 가능하면 적게 기대하면서 사십시오. 욕심을 조금 줄이면서 사십시오.

그러면 가장 보람 있는 삶이 되고 나는 그 삶을 실버타운에서 엔조이하면서 살겠습니다. 욥에게 물어보십시오. 증오를 버려봐라 근심 걱정도 몰아내봐라. 과거 엄청났지만 단순, 소박하게 살 생각이 있냐. 보다 더 많이 베풀 의향이 있냐? 기대는 좀 적게 욕심은 적게 가질 수 있냐? 욥은 다시 고민해야 됩니다. 욥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하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 있습니까? 홀로 사십니까? 하나님 없이 든, 이웃이 없이 든, 누구 없이 든 나 홀로 불가능 합니다. 살아있다는 말 자체는 같이 산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와는 같이 삽니다. 그 말의 뜻이 뭐냐니까 예수님의 말을 빌면 혼자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이 없듯이. 누군가와 같이 살고 누군가와 같이 죽습니다. 말을 바꾸면 누군가를 위해서 살고 누군가를 위해서 죽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일은 함께 하시는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 양반과 함께 죽으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함께 죽고 살면 그분이 부활하셔서 생명이 되셨으므로 마지막 부활의 생명도 함께 나누어 주신답니다.

어차피 함께 사는데 기왕이면 좋은 분과 믿을 수 있는 분과 함께 사십시오. 예수님이 이런 얘기를 하려고 하십니다. 함께 사십시다. 기왕이면 영원한 생명주신 분과 함께 사십시다. 요즘에 장례식이 있으면 조화 큰 게 옵니다. 참 아깝습니다. 사실은 작고 아름다운 조화를 주시면 좋겠는데 엄청나게 조화를 만드니 그걸 다 버리기도 하고 아깝습니다.

또 위대한 잔치가 있을 때마다 축하 화분도 화환도 많이 오는데 차라리 화분이면 좋겠는데 화환은 많이 버리게 됩니다. 왜 저희들이 꽃다발을 받을 때도 우린 너무 맘이 좋아서 그런지 꽃다발이 굉장히 큽니다. 저도 꽃다발을 받아볼 때 마다 아 굉장히 크구나. 그런데 꽃다발 속에 있는 꽃 몇 송이인지 제가 세보지 안습니다.

저도 유럽에 살 때 여러 번 경험했는데 굉장한 축제가 벌어졌는데 와서 어느 분이 축하 꽃다발을 주면서 일장 연설을 한 다음에 주는 꽃 봤더니 장미꽃 한 송이. 말은 굉장히 길게 하더라고요. 우리는 말도 안하고 덥석 갖다 주는데 이 사람은 온갖 얘기를 하고 한 송이 딱 줘요. 한 송이 받는 사람은 한 송이가 어떤 꽃인지 자세히 들여다보게 돼있습니다.

수많은 꽃다발 받는 사람은 아 받았구나 하고 집어치우게 돼있습니다. 저는 꽃 한 송이 받았다가 화병에 넣느라고 잘못해서 찔렸는데 장미꽃에 가시가 있더라고요. 제가 순간적으로 내가 장미꽃을 받았나. 가시를 받았나. 근데 생각해보니까 답이 그렇게 돼있어요. 장미꽃에도 가시가 있다.

가시는 장미꽃만이 아니 구요 모든 동물식물에게 가시와 비슷한 자기 보호를 위해서 여러 장치를 하고 삽니다. 장미의 가시는 아름다운 장미꽃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외부의 침략이나 훼손을 막기 위해서 가시를 통해서 자기를 보호합니다. 물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받은 것은 장미를 받았지 장미를 둘러싼 보호 본능인 가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찔린 건 가시에 찔렸습니다. 제가 생각했습니다. 저한테 장미꽃을 주신 분은 장미꽃에 담긴 사랑 정열 이걸 주셨지 찌르는 가시를 준건 아닐 겁니다. 그렇게 알고 제가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저한테 장미꽃 속에 담긴 보람, 축복, 인생의 의미를 주었는데 하나님이 주신 축복 속에는 축복을 외부의 악마로부터 보호하려고 가시 같은 것을 항상 주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고통입니다. 고통에 무슨 잘못이 됐다가 아니라 저한테 준 생명을 보호하려고 생명의 가시가 고통입니다. 사도바울 말이 저한테 가시가 있습니다. 마음의 가시, 육체에 가시가 있는데 이 가시가 없으면 제 마음이 교만해져가지고 내가 하나님을 저버릴 뻔했습니다.

이 아픔이라 이름 하는 가시가 저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저한테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겠다고 하는 위대한 장미꽃을 꽃피우게 했습니다. 그 사실을 저는 이해할만 합니다. 또 받아들일 만합니다. 설교에서 정치얘기 잘 안합니다만 한마디만 하려고 합니다.

나라 운명이 결정되는 대선이 전개되고 있는데 여든지 야든지 무소속이든 모든 후보들이 저희들한테 와서 모든 국민들한테 내가 바라는 장미꽃 한 송이 선사하겠습니다.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근데 저는 표를 찍기 전에 이 사람이 내놓은 장미꽃에 어떤 정렬과 사랑과 민족의 미래와 나의 미래가 있는지 좀 보고 싶습니다.

근데 후보들마다 아니 후보를 둘러싼 분위기가 장미꽃 대신 엄청난 가시가 있어서 서로 싸우고 우리를 찌르고. 제가 장미꽃을 받기는 받는 것 같은데 너무나 큰 가시들이 있어서 장미꽃을 못 보겠습니다. 정치적인 영웅으로 선거란 정책 대결입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장미꽃 대결이지요.

무슨 가시 대결입니까? 가시가지고 살라고요. 언제부터 이 나라가 본질에서 벗어나서 이상한 문화로 바뀌었습니까? 나라를 잘 살리겠다고 출마하는 건 자유입니다. 자유로 출마한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혼자 죽을 수도 없습니다. 같이 죽어야 합니다.

자유가 중요하지만 반드시 함께하는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꽃을 줄려면 건실하고 아름답고 제가 기쁜 꽃을 줘야지 온통 가시 같은걸 주니 어떻게 받으란 말입니까? 저의 탄식인데 여러분의 탄식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시간이 남아있으니 이 땅, 이 나라, 이 가족, 아름다운 장미꽃 속에 담긴 하나님의 귀하신 은총 제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나라 찾고 싶은데 교회서도 찾으시고 가정에서도 찾으시고 우리 사회에서도 찾읍시다. 다시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중심에 있느니라. 딴 데 가서 찾지 말고 네 마음속 네 인간 가장 깊은 심연에서 찾아봐라.

이 나라에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집니까? 이 나라 지키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민족성은 뭡니까? 이 민족이 주신 가장 자존심은 뭡니까?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느니라. 그 속에 가서 장미꽃을 만들어 붙여라. 그럼 하나님 나라는 저한테 어떻게 제가 만들어 갈 수 있고 어떻게 경험합니까?

제 마음속에 계시다는 하나님은 한 번도 저한테 하나님 나라를 상품화를 시켜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백화점에서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완제품 물건이 아닙니다. 기성품이 아닙니다. 저안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저 안에 계서서 저한테 주문을 받습니다. 어떤 하나님 나라를 원하느냐. 어떻게 원하느냐. 얼마동안 원하느냐. 무슨 색을 원하느냐. 맞출 때 치수제고 제가 주문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기성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맞춤형 양복입니다. 하나님은 죽었지 않고 살아계셔서 지금도 제 안에 계서서 저와 함께 잘못하면 회개도 시키시고 저와 함께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내게 맞는 내게 적합한 하나님 나라를 지금 하나님은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 안에 있다고 했지 안 그러면 밖에 나와서 주무시면 될 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제 인생은, 제 삶은, 제 희망은 제 하나님은 지금도 진행 중이신 분. 맞춤형 하나님. 기성복 바라지 마십시오. 맞춥시다. 주문합시다. 함께 만드십시다.

오늘도 만들고 내일도 만들고 오늘 하루로 내일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오늘 하루 가지고 과거를 몽땅 평가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만드십니다. 이루어 가십니다. 엮어 가십니다. 하나님 예수님이 재림할 때 까지 우린 무한대 시간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

보람, 축복 모든 것이 만들어 가십니다. 주문하세요. 결단하세요. 얘기하세요. 기도로 하시고 찬송으로 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꾸려 가십시다. 그것을 저는 그 하나님이 고맙습니다.

언제나 계신 하나님, 지금 만들어 가고 계시는 무언가 엮어 가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말씀으로 나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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