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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도 통역이 되나요? (고전 1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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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도 통역이 되나요? (고전 14:12-19)
   
    구약에서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서 현저한 차이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신약 시대는 구약 시대보다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구약 시대는 하나님이 멀리 계셨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이었고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었고 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가오시고 성령을 통해서 다가오시고 또 성경 말씀을 통해서 다가오시고 이방인들에게도 다가오시고 죄인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신 만큼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더 가까이 오신 것에 대해 우리가 지불해야 되는 대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적인 순종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인 순종을 요구하게 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돌 판에 새겨진 십계명만 지키면 됐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마음 판에 새겨진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살인하지 말라고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히게 될 것이다 또 간음하지 말라고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간음을 행하였느니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형적인 행위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을 보신다는 얘기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 중에 몇 명이나 이런 말씀을 지킬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수년 전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그는 자신이 크리스챤임을 공공연히 알렸습니다. Born again Christian 이라고 공공연히 자처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 후보가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잡지사에서 지미 카터를 인터뷰 하는 중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도 마음속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을 때가 있습니까?’ 이것은 짓궂은 질문이지요. 함정질문입니다. 지미 카터가 크리스챤이 아니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카터는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은 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카터의 이런 대답이 물의를 빚고 조롱거리가 됐습니다. 대중은 마치 그가 위선자인 것처럼 조롱했습니다.

카터는 그저 정직하게 대답한 것뿐인데 마치 카터가 크리스챤이면서도 그런 음욕을 갖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치 모순이 있는 것처럼 회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에 당선됐고 그리고 지금까지 훌륭한 크리스챤으로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마는 그 당시 후보자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는 것이 유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적어도 한번쯤은 고민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그때부터 비현실적인 요구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 비현실적인 것을 기대합니다. 그 예를 다 들 수 없습니다마는 한 가지만 예를 들면 폴란드의 보이틸라 라는 주교가 교황이 됐을 때 사람들은 새로 선출된 교황이 과거 스키 선수였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무슨 교황이 스키를 타느냐 기도나 하지.’ 크리스챤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천사라도 되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끼리 얘기지만 크리스챤도 인간이에요. 똑같은 인간이에요. 크리스챤이라고 화를 안 내는 것도 아니고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죄를 안 짓는 것도 아니에요. 만약에 크리스챤에게 그런 모든 것이 없어야 된다면 주님의 은혜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에만 적용되는 진리가 아니고 교회에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크리스챤이라면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옵션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크리스챤이 악하기 때문에 위선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과 나의 참모습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과 나의 현실적인 모습에 괴리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의 참모습을 사람들에게 다 보여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위선이 싫어서 신앙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70년대의 히트작이었던 Love Story 라는 영화가 있었지요. 남자 주인공의 부모도 독실한 크리스챤이고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도 독실한 크리스챤인데 이 두 젊은이가 결혼식을 올릴 때 비기독교적, 비종교적인 방법으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뭐라고 설명하느냐면 ‘We don't want be a hypocrite - 우리는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이 대사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성도님들은 제가 영화의 대사를 기억하는 것을 머리가 굉장히 좋은가보다 하는데 그것도 은사입니다. 대사를 기억하는 게 은사가 아니고 거기에 신앙적인 원리를 볼 수 있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에게 비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것은 견딜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현실적인 요구를 한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그런 요구를 하시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요구하시는 것인지. 시편 말씀에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신다’고 했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가 진토라는 사실을 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면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은 잔인한 것이고 모르고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무지한 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대들려고 하지도 말고 또 하나님과 다투려고 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마치 성전에 올라간 세리가 기도한 것처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말은 결국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말 밖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처음 믿은 사람이든 오래 믿은 사람이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회개하고 또 회개해야 됩니다. 가톨릭 교황도 숨을 거두기 전에 다른 신부님을 불러서 고해성사를 한다고 하는데 테레사 수녀님도 세상 떠나기 전에 신부님을 모셔다가 고해성사를 했다고 하는데 이 세상의 어느 누고도 고백할 죄가 없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다 죄와 씨름하고 때로는 죄에 패배하고, 죄를 생각하고, 죄를 짓고, 죄를 그리워하고, 죄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어제의 죄, 오늘의 죄, 장래의 죄까지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감당치 못할 죄가 없고 예수님이 사하실 수 없는 죄가 없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 이외에는.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았지요. 그냥 감사절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시인이기 때문에. 어렸을 때처럼 추수감사절을 맞으면 강단 위에 채소와 야채와 과일을 올려놓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슈퍼에서 사 온 것입니다. 아니면 가락시장에서 사 온 것입니다. 우리가 키운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사실은 의미가 별로 없지요. 우리가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 중에는 벼라는 것을 본 적도 없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도시인이고 서비스업에 종사하든 제조업에 종사하든 교육 업에 종사하면서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추수라는 말을 빼고 그냥 감사절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영어로도 그냥 Thanksgiving day 이니까.

  그런데 추수라는 말을 뺐더니 더 막연해 집니다. 차라리 추수감사절이라고 부르면 오곡백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풍년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의 이유를 제한 할 수라도 있지만 그냥 감사절이라고 하게 되니까 감사의 이유를 애써 찾아야 되는, 올해는 어떤 감사를 할 게 있는가 하고 감사의 이유를 찾아야 되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진짜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가 아닌가, 이것이 이슈가 돼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추수감사절 헌금을 드리는 것은 차라리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감사를 갖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요구한다고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감사하기가 어렵고 또 자녀가 수능시험을 잘 못 봤다면 감사하기 어렵지요. 외로운 사람, 감사하기 어려워요. 마음이 행복하지 못한 사람, 감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추수감사절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지, 그냥 감사절이라고 부르게 되면 난처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감사할 것이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인데 그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방언에 대해서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 방언하는 분 몇 분이나 되십니까? 방언을 한 번도 못해 보신 분 몇 분이나 계십니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고 다만 방언은 성격상 방언을 하는 사람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설명하는데 14절을 보면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 말은 내 마음은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방언은 통역하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본인도 통역하지 않으면, 누가 통역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자기가 방언으로 하는 말의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은 그 방언의 내용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도대체 방언의 내용이 뭘까,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궁금하지요. 내가 방언을 하기는 하는데 그 내용이 뭘까, 나도 통역의 은사가 있어서 그 내용을 알게 되면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방언의 내용을 잠깐 비춥니다. 그게 바로 16절 말씀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자, 이 구절은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방언하지 말라는 취지로 하는 말인데 그러나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사람들이 방언할 때 하는 그 내용을 잠깐 비추는데 그것은 첫째는 축복이요, 둘째는 감사라고 했어요. 아주 놀라운 내용입니다.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자기도 모르게-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방언을 시켜서라도 하나님께 감사를 하게 하시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방언이 영으로 하는 기도 아닙니까. 우리의 영혼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하비 콕스 교수는 방언을 뭐라고 했느냐면 ‘원초적 언어의 회복’이라고 했습니다. 원초적 언어의 회복. 이것은 우리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원초적인 영혼의 부르짖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이 원초적인 말을 하게 될 때 제일 먼저 우리 속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엄청나게 많은 것을 시사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평소의 판단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올바로 평가할 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평소 감정을 신뢰할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좋으신 분이다, 우리 평소에 깨닫는 것보다 더 많은 복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세상에는 감사할만한 일들이 많다,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실 것이고,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것. 이것을 우리의 영혼은 알고 있는데 평소의 우리 생각이나 감정은 그것을 파악하고 있지 못합니다. 즉 어떻게 보면 내 안에 두 개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내가 경험하고 내가 겪는 바깥의 나, 겉사람, 쉽게 겁을 먹고 염려하고 환경에 좌우되고 쉽게 낙심하는 그런 내가 있고, 내 중심에 있는 속사람, 나도 모르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축복하고 사랑하고자 하고 믿음을 지키고자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자 하는 내 안의 두 개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거듭난 사람에게는. 그래서 성령이 감동을 해서 우리의 영혼으로 기도를 하기 전에는 우리의 입에서 감사하는 말조차 나오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방언을 할 때 우리의 중심에서 나오는 말이 감사와 축복이라는 것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게 아니고  만일 우리의 중심에서 나오는 말이 ‘너 미워, 나 죽어버릴래’ 이런 말이라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우리의 중심에서 나오는 말이 ‘나 살기 싫어, 나 세상이 미워, 나 죽어버릴래, 나 끝내버릴래’ 이런 말이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적어도 우리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늘 경험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은사가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깊은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믿을만한 증거, 감사할만한 증거, 또 수고하고 인내할만한 증거, 주님이 우리에게 지워주시는 짐을 감사하며 지고 갈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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