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수감사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 116:12~..

  • 잡초 잡초
  • 357
  • 0

첨부 1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 116:12~19)

인간들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한1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방법은 선수적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 4장 19절에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특징은 변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그 사랑은 생산적인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습니다. 곧 믿으면 영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4장 20-21절에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반응은 말할 수 없는 감사뿐입니다. 인생들은 하나님께 이러한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을 가히 값으로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은혜에 보은하는 일체의 것도 값으로 계산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생의 죽고 사는 영생의 문제를 어떻게 값으로 계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받은 은혜에 자신을 드려 감사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성도들은 언제나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할 때 부담이나 짐으로 느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감사와 행복으로 충만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보답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는 갚는 것이 아니고 그냥 누리는 것입니다.
여기 『 무엇으로 』는 의문 부사일 경우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 무엇으로 보답할꼬 』는 보답할 것이 없다는 말보다는 보답을 가능케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보답할 것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상대적인 관계가 될 것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상대화가 불가능합니다.

Ⅰ. 죽음에서 구원받은데 대한 감사입니다.

시편 116편 3절에 『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치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망의 줄은 고통을 의미합니다.
욥기 39장 3절에 『 그것들은 몸을 구푸리고 새끼를 낳아 그 괴로움을 지내어 버리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고통은 사슴의 산고(産苦)를 말합니다.
이렇게 사망의 줄이란 제물을 묶어 죽이는 것처럼 죽음의 고통에 묶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음부의 고통 역시 사망의 줄과 대구(對句)를 이루는 말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받은 데 대한 감사로부터 그 동인을 찾습니다.
본문 116편 13절에 『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냐고 할 때 물리적인 대답이나 윤리적인 대답은 한 마디로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대답은 간단하게 죄인이라고 답합니다.
시편 51편 5절에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8장 8절에 『 네가 과연 듣지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으며 네 귀가 옛적부터 열리지 못하였었나니 이는 네가 궤휼하고 궤휼하여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 칭함을 입은 줄을 내가 알았음이라 』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9-10절에 『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 32절에 『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9절에 『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11절에 『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진노의 대상이 되어버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계획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6-10절에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전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심에 대한 표현으로 가득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을 옷을 입히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고 했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에 『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2장 1절에 『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1장 10절에 『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고 했습니다.
스가랴 3장 3-4절에 『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3장 4-5절에 『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3장 18절에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고 했습니다.
계시록 4장 4절에 『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고 했습니다.
계시록 7장 14절에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계시로 16장 15절에 『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Ⅱ. 서원한 것은 갚겠다는 의지의 표현입 니다.

본문 116편 14절에 『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 서원 』은 다짐한다는 뜻의 '네데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종교적 성향이 짙은 것이 특징입니다. 궁극적으로 중생 받은 성도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십니다(왕상 18:37).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로 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갈 4:6).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했습니다(히 4:12).
신명기 30장 6절에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서원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서원이 의무 규정이 아니라 자발적이라는 데서 더욱 그렇습니다.
서원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약속(vow)입니다. 서원은 일반 법규와 같은 의무 규정과는 당연히 구별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그 주체와 대상이 모두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인간 편에서 자신을 불리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이행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신명기 23장 22절에 『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라고 했습니다.

시편 15편 4절에 『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잠언 20장 25절에 『 함부로 이 물건을 거룩하다 하여 서원하고 그 후에 살피면 그것이 그물이 되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고 후회도 없으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책임성있게 실천해야 합니다. 그 서원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한 모든 약속과 맹세를 말합니다. 그 믿음은 행함의 서원으로 등식화 됩니다.

Ⅲ. 주의 전에서의 공개적인 보은적 삶을 말합니다.

본문 116편 18-19절에 『 내가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을지라 예루살렘아, 네 가운데서, 여호와의 전정(殿庭)에서 내가 갚으리로다 할렐루야 』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절에서와 동일한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 공개적으로 서원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때로는 은밀한 곳에서 때로는 공개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한 곳으로 치우쳐서 다른 한 곳을 백안시하거나 비판해서도 안됩니다.
여기 『 여호와의 전정(殿庭)에서 』를 직역하면 '여호와의 집의 마당 뜰에서' 가 됩니다. 이 말의 현대적 의미는 오늘의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9-30절에 『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보은적 삶이 곧 자기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원하여 메는 것입니다. 보은은 강제성을 띄지 아니합니다. 보은은 의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의 십자가는 받은 은혜에 비해 결코 무겁게 느껴지지 아니합니다.
마태복음 11장 30절에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1서 5장 3절에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에서 시작된 기독교 축제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생각할 때 불가불 16세기 영국의 역사와 호흡을 같이 해야 합니다. 영국의 헨리 8세의 장녀 피의 여왕 메리의 폭정은 그의 죽음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카톨릭의 영향을 받은 메리와는 달리 신교의 지도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둘째 딸 엘리자베스가 메리의 뒤를 이어 등극했습니다.
메리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타국으로 피신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신앙의 자유가 왔다는 성급한 기대를 안고 고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왕으로 등극한 엘리자베스는 신교 지도자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메리와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엘리자베스 역시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로마 카톨릭의 획일적인 제도에 기독교를 굴복시키려고 했습니다.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은 영국 교회가 정한 예배에 불복하고 네델란드로 망명하여 12년간 유리방황했습니다. 마침내 영국의 청교도(Puritan)일행은 오월의 꽃(May Flower)이란 배를 타고 66일간의 사투 끝에 1620년 12월 북미 동북쪽 해변가 프리기스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상륙한 일행이 농사를 짓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단을 쌓은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된 것입니다. 1789년 워싱턴(Geoge Washington)대통령은 11월 넷째 목요일로 지켜오던 추수감사절을 11월 26일로 개정 선포했습니다. 이후 1864년 아브라함 링컨이 11월의 마지막 목요일로 정하고 공식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그 후 1941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다시 11월 넷째 주 목요일로 수정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미국의 국경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과 직장에 한 해 동안 베푸신 은혜 또한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하나님 앞에 서원한 유형무형의 것들에 대한 우리들의 책임과 의무를 재촉 받을 뿐입니다.
(강구원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