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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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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남자들이 그리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한 여성이 20대 초반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나이 23세에 그만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당신 임신 중이었던 여인은 유복자로 딸을 낳았습니다. 요즘 같으면 금세 재혼해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했겠지만, 40년 전만 해도 사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청상과부가 된 여인은 혼자 모든 희생을 감수하며 딸의 장래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시장에서 온갖 장사를 해가며 딸을 길렀습니다. 그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딸은 대학을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정의 분위기를 상상해볼 수 있습니까? 어머니는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억척스럽게 일하며 딸을 키워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이 배운 딸과 말이 잘 통할 리 없었습니다. 딸은 어려운 일이 있거나 짜증스러운 일이 생기면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다 쏟아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말없이 딸의 이런 투정을 모두 받아주었습니다. 희생과 침묵 그리고 인고(忍苦)의 세월을 산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딸도 나이를 먹고 가정을 이루고 40세를 훌쩍 넘겼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늙은 어머니를 보고 있던 딸의 마음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정이 치솟았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홀로 된 어머니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장사하여 입히고 먹이고 키워주셨는데, 어머니가 어렵게 학비를 대주셔서 유학도 하고 공부를 마칠 수 있었는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온 몸을 던져가며 문제를 해결해주셨는데…’
  갑자기 어머니 없는 자신의 인생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딸은 너무 고마운 나머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다 사드릴게요.”
  이 딸의 수준이 왜 이렇게 낮을까요? 어머니가 어떤 물질적인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나는 네가 잘 되는 것이 큰 기쁨이야.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치 않단다.”
  어머니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딸이 계속해서 다그치자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이 쉽지 않구나. 나를 교회까지 태워다주지 않으련? 돌아올 때도 문제가 되니깐 나와 같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자구나.”

  형편이 넉넉해지자 교외에 좋은 집을 마련하여 이사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멀어졌고 교통편도 불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아 딸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딸도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핑계로 그 후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모녀를 환영했습니다. “권사님의 오랜 기도가 드디어 이루어졌군요”라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목사님도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훌륭한 교수님이 오늘 이 예배에 나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예배 시간에 개인을 치켜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런 대접을 받고 보니 여 교수인 딸도 싫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딸과 동년배쯤 되어 보이는 여성들이 옆에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크게 떠드는 바람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서로 헐뜯는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들도 별 수 없군.’
  불쾌한 기분으로 자리를 뜬 딸은 2층 통로 쪽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그녀를 찾아와 자기 아들의 기부 입학을 청탁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녀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평소에 적어도 대학만큼은 공정하게 실력으로 가야한다는 소신을 가진 그녀로서는 돈 있는 자들이 더하다는 생각에 치가 떨려왔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노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싶었지만 그녀는 체면상 화를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 회의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회의를 하는 모양인데, 생각이 어찌나 다른지 꽤 심각한 싸움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입에 담는 말들이 세상 사람들도 잘 쓰지 않는 심한 욕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나오려고 했습니다.
  “어머니, 다시는 교회에 오지 마세요. 일요일이면 내가 소풍 모시고 다닐 테니, 다시는 교회에 오지 맙시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너, 왜 그러니?”

  어머니는 항상 딸의 투정, 짜증까지 다 받아주던 그런 수용적인 분이었습니다. 화를 내거나 혼내는 일이 거의 없는 어머니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만큼은 어머니의 태도와 표정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단호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단호함에 주눅이 든 딸은 지금까지 있었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교회에 딱 하루 나와서 참 많은 것을 보았구나.”

  이 말에 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무식한 어머니가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소위 복만 비는 기복 신앙의 소유자인 줄만 알았던 어머니의 말과 태도가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신앙심이 느껴졌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처럼 저속하게 문제만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 가치를 볼 줄 아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태도에 딸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사람은 보는 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을 보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갑니다. 왼쪽을 보는 사람은 왼쪽으로 갑니다.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습니까? 지금 현재 자기가 바라보는 곳이 자신의 미래입니다. 믿음을 보면 믿음으로 갑니다. 긍정을 보면 긍정으로 갑니다. 보는 것이 미래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선택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은혜를 입은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그 은혜를 감사한다고 보고함으로써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기어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감사를 드리기 위해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구원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은혜를 모르는 아홉 명의 유대인이 아니라 은혜를 알고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는 십일조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섭섭하고 아프게 하는 성도가 아닌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병든 사람들

  본문 12-13절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문둥병은 만성 전염병 중의 하나로서 그 특징은 몸 속 세균의 활동으로 눈썹, 뺨, 코, 귀에 결절이 생기며 손과 발의 경우에는 병균이 관절을 녹여 손가락 및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며 피부에는 탈색된 반점이 나타나며 바늘에 찔려도 그 환부에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합니다. 레위기 13장 45-46절에는 문둥병 환자로 판명된 자들이 취해야 할 처신법이 나타나 있습니다.

  ① 옷을 찢고 머리를 푸는데 이는 지극한 슬픔과 애통을 표현하는 히브리적 방법입니다.
  ② 윗입술을 가렸는데 이는 자기 입술을 치는 행위로 극심한 자기 비하를 나타냅니다.
  ③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하는데 이는 자신이 부정한 문둥병자임을 소리쳐서 알림으로써 외인들의 접근을 방지해야 했습니다.
  ④ 진(陳)밖에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을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부정한 자는 결코 함께 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이 악화되면 소리 지르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둥병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힘을 다해 주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서럽고 힘들겠습니까? 그들은 예수께서 문둥병마저도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아픈 만큼 부르짖는 것입니다.

  우울하게 사는 비결이 있습니다. 아무리 날씨가 맑고 화창해도 절대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기분이 좋아도 절대로 표현하지 맙시다. 그러면 당신에게서 우울함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날씨가 나쁠 때는 반드시 표현합니다. 날씨가 안 좋으면 날씨가 되게 안 좋다고 반드시 소리쳐야 합니다. 나쁜 사람을 만나면 “쓰레기 같은 인간을 만났다”라고 반드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울해집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떠다니는 구름과 같습니다. 인생은 흐름입니다. 다 흘러갑니다. 뭉게구름이 있고 먹구름이 있습니다. 표현하지 않고 가만히 놔두면, 먹구름이라고 해서 꼭 비를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것이 있으면 그냥 ‘통과’ 시키세요. 자꾸 표현해서 인생의 불행을 확정짓지 맙시다. 표현하는 것이 현실이 된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모든 인간은 병이 있습니다. 육신과 마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문둥병보다 더 지독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인간은 알고 보면 다 불쌍합니다. 몸부림쳐도 결국은 병들고 죽기 때문입니다. 우쭐하고 잘난 척 해봐도 별수 없이 병들고 죽는 운명입니다. 문둥병자들처럼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의 갈 길과 살 길은 오직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반드시 고치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내가 병든 인간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사랑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건강한 사람들

  본문 14절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제사장들은 문둥병 환자를 진단하고 돌보며 예배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이 병이 치유되었을 때에는 제사장이 우슬초와 함께 새(bird) 피를 찍어 이 피를 문둥병자에게 뿌려 정결 의식을 행하며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예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하신 명령은 말씀에 복종하는 신앙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병에서 낫고자 하는 강한 소원과 예수의 말씀과 명령이라면 절대 순종하겠다는 절대 믿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병이 아직 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는 말씀을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병고침의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건강한 사람들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믿고 순종하면 영육이 고침 받고 건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프란시스와 그의 제자들이 근 10일을 금식한 뒤 수도원에서 내려와 시장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시장에서 파는 죽을 퍼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정죄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다른 제자들이 금세 그를 둘러쌌습니다.
  ‘이제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로군.’
  죽을 먹던 제자는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절망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고 있을 때, 프란시스가 죽 파는 좌판에 뛰어들더니 자신도 게걸스럽게 죽을 먹으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도 배가 고파 죽을 뻔했어. 얘들아, 너희들도 와서 어서 먹어.”
  고독한 제자의 자리에 스승인 프란시스가 같이 선 것입니다. 결국 그의 행동이 곤경에 처한 제자를 살렸습니다. 이것이 성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미련하고 실수도 많고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며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문둥병과 같은 죄와 질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절대 순종함으로 모든 병에서 건강해지는 큰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

  본문 15-19절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홉 명의 유대인 문둥병자들은 고침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기 갈 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고침 받은 은혜를 알고 예수님께 사례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사례는 단순한 인사치레의 감사의 말이 아니라 깊은 환희와 감격에서 넘쳐 나오는 감사의 말입니다. 돌아와 주께 경배하고 감사하였을 때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홉 명에 유대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섭섭해 하셨으나 한 명의 사마리아인을 크게 기뻐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높은 수준에 올라야 합니다. 받은 복 때문에 교만하거나 하나님을 떠나면 비극입니다. 언제나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공부를 못하는 학생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공부의 시작이 쉽습니다. 그냥 앉아서 공부합니다. 반면에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시작조차 어렵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각오를 다지는 데만 2시간이 걸립니다. 자신의 다짐을 부모님께 알린 다음 비장하게 결단의 커피를 마십니다. 그리고 책상에 앉습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드라마가 시작되면 슬그머니 거실로 나와 TV를 봅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피곤합니다. 내일을 기약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도무지 시작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특징은 시작을 못하게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가 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붙들어야 합니다. 마귀는 시작할 수 없게 만듭니다. 열등감, 실패에 대한 불안 때문에 시작부터 두렵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소행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마귀가 막으면 막을수록 더욱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 마귀는 물러가고 반드시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를 모르는 아홉 사람이 되지 말고 감사하는 한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도, 가정, 생애,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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