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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 또 감사 (살전 5: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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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또 감사 (살전 5:16~18)

범사에 감사하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성도들에게 기쁨과 기도와 감사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본문은 우리 성도들이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도하되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의미를 간혹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해서 24시간 "기쁘다, 기쁘다" 하며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해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24시간 기도만 하며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해서 24시간 "감사하다, 감사하다"만 외치며 살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선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뻐할만한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기도할 수 있는 상황뿐 아니라 기도할 수 없고 도저히 기도가 안 나올 때에라도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감사할 수 있는 상황뿐 아니라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는 뜻이겠지요. 그래서 공동번역성경은 이 구절을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번역이 헬라어 원어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은 참된 감사의 자세가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참된 감사의 자세는 무엇인가? 감사할만한 상황에서야 누군들 감사할 줄 모르겠습니까? 사업이 잘 되고, 돈 잘 벌고, 건강하고, 자녀들이 잘 되고, 아들딸이 수능시험까지 잘 보았다면 예수 믿는 사람뿐 아니라 불교신자와 무신론자들까지도 감사할 수 있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만나는 사람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다닙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감사하냐고 물어보니 아들이 그토록 원하던 학교에 합격했답니다. 이런 상황이면 누구에게든 감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길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도 고맙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범사에 감사하라,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누구나 감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만 아니라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차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했지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신앙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 안 되고, 돈도 못 벌고, 건강도 안 좋고, 자녀들이 실패하고, 아들딸이 수능시험에 원하는 만큼 성적을 못 거두었을 때 말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날 구원하신 주 감사"라는 찬양이 있지요? 그런데 저는 이 찬양 중에 3절 가사가 참 좋습니다. 이런 가사입니다.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가시도 감사." 이 가사를 쓴 분은 틀림없이 장미가시를 경험한 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게 핀 장미꽃만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장미꽃만 따서 예쁘게 꽃병에 꽃아 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예쁜 장미꽃 줄기에는 꼭 가시가 달려있습니다. "하나님도 참 이상하시다. 왜 이렇게 예쁜 장미꽃에 가시 같은 걸 달아놓으셨을까?" 하나님은 이 작은 장미꽃 한 송이를 통해 우리에게 깊은 신앙의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장미꽃만 원하지만 가시 없이는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 받기만 원하고 좋은 일만 생기기 원하는 우리에게 고난도 실패도 필요한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부잣집 도련님이 있습니다.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며 수많은 하인들이 있어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뭐든지 할 수 있고, 갖고 싶은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도련님에게 고마움이나 감사가 있을까요? 단 한 번도 아쉬워 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어려운 일이 없는 사람에게 감사가 가능할까요? 오히려 100평짜리 맨션에 살던 사람은 90평으로 이사만 가도 "집이 왜 이리 좁아?"라며 불평을 합니다. 저는 군대 제대하고 처음 이사한 집이 9평짜리 반 지하 전셋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15평짜리 전셋집으로 이사하니 집이 얼마나 커 보이는지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운동장 만하게 느껴졌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이 고마움을 압니다. 힘든 적이 있었던 사람이 감사도 할 줄 압니다.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이 성공의 소중함을 압니다. 그래서 장미꽃에는 가시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인들은 이 장미꽃뿐 아니라 장미꽃 가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시가 있기에 그 꽃이 소중한 것이고, 오늘의 실패와 아픔이 있기에 내일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주실 줄 믿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상황에서,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도저히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오늘 우리를 도저히 감사할 수 없게 만드는 두 가지, 그것은 바로 '교만'과 '열등감'입니다.

잘 나도 감사 : 교만을 이기는 감사
자, 그러면 우선 우리를 도저히 감사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그 첫째는 '교만'이라고 했지요?

먼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만약 우리가 참 잘났다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도 잘 되고 너무너무 잘 나가서 행복하다면 이 나의 잘남이 누구 덕인가요? 나 자신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의 덕일까요? 아닙니다. 나 자신도 아니고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런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갑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성공한 것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룬 것이다. 내가 잘 해서, 내가 잘 나서 이룬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요즘 수요일마다 디모데후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디모데후서 3장을 한 번 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보면 경건을 타락시키는 요소 18가지가 나오는데 2절에 보세요. 그 중에 첫 번째가 '자기 사랑'입니다. 자신에 대한 애정과 사랑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지 않고는 남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자기사랑이 지나치면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지나친 자기애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이 있었습니다. 남자치고는 너무 잘생기고 잘 생기다 못해 예쁘기까지 한 이 소년은 날마다 물에 비치는 자기 모습을 보며 "어떻게 이렇게 잘 생겼을까?" 스스로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수선화가 되었다고 하네요. 이 소년의 이름에서 유래된 말이 바로 나르시시즘(Narcissism)입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 또는 자기 자신이 훌륭하다고 여기는 일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영적 나르시시즘에 성도들이 많이 감염됩니다. 이 병에 감염되면 감사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2절에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즉 자기를 사랑하여 영적인 교만에 빠지면 곧바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냐?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거역한다는 것은 부모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를 때 나오는 현상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사랑에 빠지고 영적 교만 병이 들게 되면 자신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푼 부모에게도 감사치 아니하며, 나아가 하나님에게조차도 감사할 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도 잘 되고 너무너무 잘 나가서 행복하다면 누구 덕인가요? 하나님입니다. 사업이 잘 되고, 돈도 잘 벌고, 건강하고, 자녀들이 잘 되고, 아들딸이 수능시험까지 잘 보았다면 누구 때문입니까? 나 자신 때문도 아니요 내 자녀들이 잘나서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모든 좋은 것을 자기 덕으로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 덕분이라고 감사할 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참 감사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을 이기는 감사입니다.

못 나도 감사 : 열등감을 이기는 감사

반대로,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 또 한 가지는 바로 '열등감'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잘 생기는 병입니다. 때로는 남과 자신을 비교해서 이 병이 들기도 합니다. 이 병의 증상은 "나 같은 게 뭘 하겠냐? 나 같은 걸 남들이 알아주기나 하나?" 하다가 마지막엔 "나 같은 게 왜 살아?" 하는 데까지 나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이런 성도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어떤 성도냐? '못 생긴 나무' 같은 성도가 되십시오.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산에 가보면 아름드리나무가 많지요? 너무도 울창하고 멋있어 보이는 이 나무들도 실은 별 볼일 없고 초라한 나무에 불과했습니다. 잘 생기고 눈에 띄는 나무는 산에서 제대로 자라보지도 못합니다. 사람들이 다른 곳에 옮겨 심던지 뽑아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못 생기고 초라한 나무는 쓸데가 없다 싶어 아무도 베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산에 남아 그 산을 지키게 되고 결국 세월이 흘러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산을 지키게 되는 법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자신이 못생긴 나무처럼 잘생기지도 잘나지도 못해서 쓰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세상처럼 잘 사는 사람,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 잘 나가는 사람만 대우한다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십니까? "못난 성도가 교회를 지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못 생겼다고 못났다고 절망하거나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바로 나 같은 사람이 교회를 지킨다는 소망을 가지십시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못난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잘난 성도는 결코 교회를 지키지 못합니다. 너무 잘 나서 교회를 어지럽힐 수도 있고, 교회가 마음에 안 찬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못나 보이는 그런 성도가 정말 듬직하게 우직하게 오래오래 교회를 지키고 이런 성도가 교회를 지탱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저는 못난 목사가 되고 여러분은 못난 성도가 됩시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못난이 교회'가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잘난 교회를 찾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너무 잘나서 스스로 난 체 하는 교회, 교인들이 너무 잘 나서 텃세가 심한 교회는 사람들이 찾지 않습니다. 침엽수처럼 뾰족해서 사람들을 찌르기 때문입니다. 활엽수처럼 넓고 완만한 이파리를 가져야 사람들이 그 그늘을 찾게 마련입니다. "우리 교회 잘 하는 것 별로 없습니다. 저희들 별로 잘난 것 없습니다." 할 때 사람들이 가까이 올 수 있는 법입니다.

자, 그래서 못나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못난 나를 통해서 교회를 지키시고, 못난 나를 통해 내 가정과 세상을 지키시니 말입니다. 내가 못나니 남들을 세워주어서 좋고, 내가 못나니 가정과 교회가 평화로워서 좋고, 내가 못난 목사니 성도를 겸손히 섬길 수 있어서 좋고, 내가 못난 성도니 다른 성도를 살려서 좋고, 우리가 못난이 교회니 사람들이 안심하고 모여들어서 감사하고 말입니다.

감사 또 감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 모두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삶을 삽시다.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잘나도 감사, 못나도 감사하는 삶입니다. 잘 나가도 감사 못 나가도 감사하는 삶입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감사 힘든 일이 있으면 더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감사 또 감사하는 삶을 살면 정말 감사할 일들이 생깁니다. 감사의 제목이 더 늘어납니다.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은 11월 중순이나 말에 찾아옵니다. 저는 이번 추수감사주일을 맞으면서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하필 이때가 추수감사주일일까? 하나님이 우리가 거의 한해를 마무리해가는 이 때 추수감사주일을 주신 이유가 꼭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로는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열한 달을 돌아보아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열한 달을 어떻게 살았는가? 과연 새해를 시작하면서 각오하고 하나님께 다짐한 것들을 잘 지켰는가? 내 생애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 2007년의 열한 달 동안을 과연 후회 없이 살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열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복을 세어보라는 뜻(오늘 설교 후 부를 찬송가 429장 가사처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인 것 같습니다.

둘째로는 남은 약 한 달을 잘 보내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한 달이 얼마나 짧습니까?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도 우리는 얼마든지 의미 있고 귀한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토스토예프스키는 1849년, 28세의 나이에 사회주의 혁명단체에 가입했다는 죄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영하 50도가 넘는 추운 겨울날 그는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세 사람의 사형수가 기둥에 묶였고 그는 가운데 묶여 있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최후의 5분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그에게 남은 5분을 어떻게 쓸까 하며 고민했습니다. 2분은 형장에 같이 끌려온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 하는데 쓰고,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정리하는 데 2분, 그리고 1분은 하늘과 땅, 산과 들판을 둘러보는데 쓰자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과 인사를 하고 가족을 생각하는데 2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3분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지난 28년이란 세월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정말 인생을 가치 있게 쓸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 극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한 병사가 멀리서 손수건을 흔들며 니콜라스 황제의 특별사면 명령을 가지고 달려온 것입니다.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난 뒤 그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형 순간에 느낀 시간의 소중함을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생을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내게 남은 5분을 어떻게 쓸까?"

여러분, 내 인생이 단 5분만 남아도 우리는 그 시간을 소중하게 쓰며 살아야 합니다. 하물며 앞으로 내 인생은 얼마나 많이 남아있습니까? 또 2007년도 한 달이 넘는 긴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낭비하지 마십시오. 연말을 어영부영 송년회다 회식이다 하며 보내다 보면 이 소중한 시간이 다 지나고 맙니다. 우리도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시간을 소중히 쓰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감사의 의미를 되새겨보았습니다. 잘 나도 감사, 못 나도 감사, 감사 또 감사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오늘 이 감사절에 참된 감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며 2007년 남은 한 달 동안에, 그리고 여러분의 남은 인생 위에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이 더욱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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