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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기뻐하라! (빌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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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빌 4:4~9)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서 엎드렸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모두 다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심한 고통 속에서 그들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서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제게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까?” “제 다급한 사정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까?”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목이 터지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고통스럽고 힘이 든다고? 그렇다면 내가 진짜 힘든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도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고맙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어려움이 있지만 어려움이 제게 오히려 약이 되니 참 감사합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도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진짜 신나고 고마운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마.”

  출발선은 같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문제가 더 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어려움은 또 다른 어려움을 불러들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요 산 넘어 산처럼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 문제를 통해서 복을 받았습니다. 고통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연단을 통해서 그는 더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움을 통해서 전에 맛볼 수 없었던 큰 은혜를 맛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좌절하기 쉽습니다. 시험 성적이 좋지 못하면 낙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업의 실패는 사람을 절망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때문에 삶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낙심하고 절망하며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합니까? 그 까닭은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하던 것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대체로 기뻐합니다. 잔치를 벌이고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쓰고 있는 감사 헌금 봉투를 자세히 보면 감사의 조건들이 죽 써 있습니다. 해당되는 것에 표를 해서 낼 수 있도록... 생일, 결혼, 취직, 개업, 입학, 졸업, 영전, 건강, 이사, 세례, 유학, 돌, 회갑, 진갑, 심방 등등... 그런데 이 조건들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소원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항목들을 보면서 스스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질병으로 입원한 것을 감사할 수는 없을까? 낙제나 시험의 실패도 감사의 조건이 될 수는 없을까? 장례식을 요즘 천국 환송식이라고 한다는데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만 뜻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감사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가 뭐가 다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가 달라도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뜻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뜻보다 주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오히려 그 슬픔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주님의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선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면 기꺼이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음이라는 상황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했던 것입니다. 과연 빌립보 교회는 항상 기뻐할 만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습니까?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모두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빌립보 교회의 형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의 상황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또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답을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의 권면의 말은 주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말입니다. 상황은 우리를 실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주님 때문에 우리는 늘 기뻐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황의 반전 같은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상황의 반전을 기대하기보다는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믿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는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404장을 부르다가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과연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종이에 써 봅시다. 정말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나 잉크가 부족해서 다 기록할 수 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어서 종이 한 장도 다 채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지금까지 주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작은 머리로 그 크신 주님의 섭리를 판단하지 않았습니까? 문제의 근본 원인은 우리의 뜻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모든 상황을 친히 주관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옛날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주님만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지금 여기서부터 마음껏 누리는 참으로 복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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