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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 희생을 드리거든 열납되도록 드릴지며 (레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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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희생을 드리거든 열납되도록 드릴지며 (레 22:26-33)

  저는 고맙게도 여러 교우님들로부터 선물을 자주 받게 되는데, 가장 많은 것이 넥타이 선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가 이 넥타이를 고르는 데에 꽤 까다롭다는 사실입니다.
  주시는 쪽에서는 정성껏 골라서 선물해 주시는 줄을 잘 알지만 한 4개 중에 1개의 비율로 별로 제 마음에 들지 않는 넥타이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의상 주일에 한 번은 매지만 그 다음에는 계속 옷장에 걸려만 있다가 그런 넥타이들이 한 열 개쯤 모이게 되면 부목사님들에게 나누어드리게 되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것들을 부목사님들이 메고 교회에 오는 것을 보게 되면 갑자기 멋진 넥타이로 보이게 될 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줬다가 도로 뺐을 수는' 없는 일이라 그저 속으로 '내가 눈이 삐었었나?'하고 아쉬워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여튼 가능하면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언젠가 금요일 기도회 도중에 제가 어떤 넥타이를 좋아하는지를 교인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색상은 무채색 위주로 되어 있거나 원색이 강렬한 것은 기피하고 그저 은은하고 고상한 것을 선호하며, 무늬 역시 너무 단순하거나 화려한 것보다는 적당히 조화되어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것이 너무 어려우면 그저 불규칙적인 사선 무늬가 가장 무난할 것이라고 상세하게 설명해 드린 것입니다.

  이 전체를 한 가지 개념으로 간단하게 묶자면 '예쁘면서도 품위가 있는 것'이라고 종합정리까지 해 드린 후에, 그래도 제가 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으면 그냥 본인 마음에 드는 대로 하나 고른 후에 '교환권'을 반드시 동봉해서 선물해 주십사 라는 부탁까지 덧붙였습니다.

  그 효과는 당장 나타났는데, 그전이면 무슨 절기 때마다 그렇게도 많이 들어오던 넥타이 선물이 그 이후로는 확 줄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차' 싶어서 뒤늦게 수습(?)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었고 이 현상은 지금까지도 별로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교인들에게 요구한 사항들은 제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정말 도대체 어떤 넥타이를 고르라는 말인지 까다롭기 짝이 없고, 또 누군가 그렇게 '교환권'을 동봉해 주셔서 바꾸어 오게 될 때에 제 눈으로 직접 고르는 것조차 결코 쉽지 않으니, 교인들로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고 충분히 이해는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께서 어떤 감사예물을 기뻐하시는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밝혀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와께 감사희생을 드리거든 열납되도록 드려야 한다."라는 본문의 말씀이 그 뜻입니다.
  감사라는 것이 받는 쪽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된다면 정말 의미 없는, 하나마나한 일이 되고 말 것이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 편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감사제사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요구 종목은 저의 경우처럼 복잡하거나 까다롭지 않고, 아주 간단명료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2007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온갖 귀하고 좋은 은혜와 축복들을 되새겨 보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이 과연 어떤 감사를 어떻게 드려야 정말 하나님께 열납되는 감사가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 열납되기 위한 감사는 '제사의 예물'로써 준비되어야 합니다.

  본문 26절부터 28절에 "26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7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거든 칠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제 팔일 이후로는 여호와께 화제로 예물을 드리면 열납되리라 28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잡지 말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소나 양이나 염소"는 여러 종류의 제사에 쓰일 수 있는 대표적인 짐승들인데, 이어지는 29절의 "감사희생"의 제물로도 쓰일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께 제물로 바쳐질 수 있는 짐승의 종목을 구체적으로 밝히시면서 특히 그것들이 갓 난 새끼일 경우에는 "칠일 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한 후에 "제 팔일 이후로는" 언제든지 제물로 삼을 수 있다고 명시하셨습니다.
  이것은 앞서 출애굽기 22장 30절에 나왔던 명령을 재확인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22장 7절에도 새 보금자리에서 알을 품고 있는 어미새와 새끼가 함께 있을 때에는 새끼만 취하고 어미새는 잡지 말도록 한 규정이 나오는데, 이것은 짐승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주어야 함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본문의 명령 역시 그런 인도주의적인 정신의 일환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 짐승의 새끼를 태어난 지 '8일 후'에 잡을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남자 아이가 출생한 지 8일 후에 할례를 받게 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어차피 짐승의 새끼를 잡는다면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잡는 것이나 8일 후에 잡는 것이나 그것이 인간적이냐 아니냐를 두고 따진다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생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정식으로 언약의 백성이 되었듯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역시 난 지 8일 지난 후에 드림으로써 '언약의 백성 된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물'의 격식을 맞추도록 하는 데에 진짜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28절에서 제물로 쓸 짐승을 그 어미와 새끼를 "동일에" 즉 같은 날에 잡지 못하게 하신 것도 단순히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만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방 종교에서는 어미 짐승과 그 새끼를 일부러 같은 날에 잡을 뿐 아니라 더 심한 경우에는 어미의 젖에 새끼를 삶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그 자체로도 잔인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런 이방인들의 미신적인 행위를 본뜬대서야 결코 아니 될 일이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릴 때에는 그 예물을 준비하는 방법에서부터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해야 했던 것이었습니다.

  어른에게 무엇을 대접하거나 사 드리고 싶을 때에 "어떤 것을 잡수시겠습니까?"라든지 "뭘 좋아하십니까?"라고 여쭈어보게 됩니다.
  그럴 때 어른 쪽에서 그냥 당신의 취향대로 말씀해 주시면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하지만 "아무 거나 괜찮다."라고 하시든지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하시면 대접하려는 쪽에서는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워집니다.

  제 아버지께서 바로 그런 스타일이신데, 이 어른께서는 제가 무슨 운동모자라도 하나 사 드리면 "다 있는데 이런 거 머하러 샀노?"하고 일단 거부반응(?)부터 보이십니다.
  제 어머니는 정반대로 무슨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제게 전화를 걸어서 상품 브랜드까지 정확하게 지정하시면서 지시(?)를 내리시는가 하면, 함께 상점을 지나치다가 눈에 드는 것이 있으시면 "내 저거 한 개 사도."라고 즉석에서 요구(?)까지 하십니다.
  그 결과 제 아버지께는 아예 무엇을 사 드릴 생각조차 점점 들지 않게 되고, 반면에 어머니에 대해서는 제 물건 쇼핑하러 갔다가도 뭔가 예쁜 것이 눈에 띄면 '저것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절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 거나 너희가 알아서 해라.'라고 우리를 더 어렵게 만드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물을 바쳐야 할 절기가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정해주셨으며, 그 예물의 종류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도 상세하게 일러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맥추감사절을 지키라 명하셨고 또한 추수감사절 역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것은 불신자의 풍습과는 전혀 다른 절기입니다.
  불신자들은 추석이라는 명절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저 귀신 앞에 제물을 차려 놓고서 지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그런 불신사회의 풍조를 본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자신의 감사행위를 '예배'를 통하여 승화시킵니다.
  불신자들은 추수를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순전히 자기네들끼리만 먹고 마시면서 '노는 날'로 끝냅니다.
  하지만 적어도 '구원의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준비하여 바치면서 이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납될 수 있는 감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 감사를 받으시는 분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해야 함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제사의 예배'를 통하여 감사드리고 '감사의 예물'을 바치면서 감사드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 열납되기 위한 감사는 '기쁨의 잔치'로써 나누어져야 합니다.

  29절과 30절에 기록하기를 "29너희가 여호와께 감사 희생을 드리거든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릴지며 30그 제물은 당일에 먹고 이튿날까지 두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감사 희생"이란 '서원제, 낙헌제, 감사제'로 세분되는 '화목제' 중에서 특히 감사제 때에 바치는 제물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5대 제사'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이 화목제에만 해당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사의 제물들은 오직 제사장과 그 식구들만 먹을 수 있었지만, 이 화목제만은 그 제물을 바친 일반 백성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만이 강조된 다른 제사들과는 달리, 이 화목제에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의 교제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열왕기상 8장 63절 이하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 낙성식을 거행하면서 이만 이천 마리의 소와 십 이만 마리의 양으로 "화목제의 희생"을 드리고 온 백성이 함께 나누어 먹은 일이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화목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화목제의 특별규정은 '감사제'뿐 아니라 '서원제와 낙헌제'에도 다 적용이 되는 것이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은 있었습니다.
  곧 서원제와 낙헌제의 경우에는 그 제물을 제사 드린 후 '이튿날'까지도 먹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지만, 감사제만큼은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반드시 "당일에 먹고 이튿날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나 양을 한 마리 잡아서 감사제를 드리고 그 고기를 당일에 다 먹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혼자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비단 가족이나 친지뿐 아니라 더 많은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먹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가운데 자연히 상호 친교가 이루어졌던 것이며, 바로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제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유명한 말도 있듯이, 감사 역시 혼자만 하는 것보다는 서로 나누는 사이에 더 커지게 됩니다.
  예배 시간에 감사헌금의 특별한 제목들을 함께 나누는 것도 바로 모든 성도들이 "아, 저럴 때에도 저렇게 감사드리는 것이구나."라고 배우게 됨으로써 자신도 같은 경우가 생길 때 감사드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교회에서는 전쟁터에서 죽은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기념 헌금'을 드린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의 주일예배 시간에 또 누가 그런 헌금을 드리자 회중에 있던 한 부인이 곁에 있는 남편에게 "우리도 저 성도처럼 우리 아들을 위해서 헌금을 드려요."라고 속삭였습니다.
  그 남편은 "당신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우리 아들은 살아 있잖아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말하기를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의 생명을 지켜주고 계시니까 당연히 감사드리자는 거예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특히 '감사제물'은 그것을 바친 성도 본인뿐 아니라 가능한 한 그 주변의 많은 성도들이 함께 나누도록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남보다 당연히 먼저, 당연히 더 크게 감사해야 할 조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무심히 넘기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나보다 더 작은 것 받았는데도 감사드리고, 내가 보기에는 감사의 제목은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두고도 오히려 감사드리는 성도들을 보게 될 때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 잘 되고 돈 많이 벌고 있으면서도 일 년 열두 달 52주일 내내 감사헌금 한 번 드리지 않던 교인이, 이제 막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쥐꼬리만큼 받는 첫 월급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그 전부를 '첫 소산의 감사헌금'으로 바치는 청년을 보면 좀 무언가 충격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집안 식구들이 다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단 한 번 감사기도조차 드리지 않던 교인이, 사랑하는 가족의 상을 당하고도 오히려 장례를 위로와 은혜 가운데 이끌어 주신 것을 기억하여 특별감사예물을 드리는 유족 성도들을 보면 당연히 부끄러운 생각이 생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아름다운 성전을 출입하면서도 헌당승계 헌금이나 교육관구입 헌금에 단 한 푼도 바치지 않는 '짠 어른 교인'들이, 몇 주일 전에 어린이 선교원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선교원의 그 어린 아이들이 교육관구입을 감사하면서 152개의 저금통 헌금을 이 제단 위에 올려놓은 것을 보면 좀 무언가 그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목제'를 그 '당일'에 함께 '나누어 먹는' 성도들 사이에서는 이런 감사의 공감대가, 이런 영적 교감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역시 이 회중에서 우리의 감사들이 함께 나누어지고 증폭되어서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도 더욱 흡족하게 받으시는 큰 기쁨의 감사제로 올려 드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께 열납되기 위한 감사는 '순종의 결단'으로써 이어져야 합니다.

  31절 이하 33절까지의 말씀에 "31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32너희는 나의 성호를 욕되게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33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니 나는 여호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감사제물'만 강조하고 끝내지 아니하시고 연이어서 "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키며 행하라"고, 어떻게 보면 앞 구절과는 전혀 동떨어져 보이는 듯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고 늘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너무나도 문맥에 맞는 말씀입니다.
  감사제사 한 번 드렸다고 해서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다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주 만홀히 여기는 신성모독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의 성호를 욕되게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거룩하게 여김을 받아" 마땅하신 하나님께 겨우 양 한 마리, 소 한 마리 잡아 제사 드렸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긴다면 그 얼마나 하나님께는 모독적인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즉 당신의 백성을 천하만민들 중에서 택자로 부르시고 선민으로 삼아 주시는 분이신데, 딱 감사절기 하루만 지키고 나머지 날들은 그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간다면 정말 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그 하나님은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단순히 일년 농사를 도와주시고 일용할 양식 주신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남의 종되었던 백성에게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해방을 베풀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진정 그 엄청난 구원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고 있는 자라면 무슨 맥추절이나 장막절 때에 감사예배 한 번 드리는 것만 가지고서는 그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다 나타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또 한 번 아주 구체적으로 요구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진정 내가 베풀어 준 구원과 생명의 은혜를 감사한다면 감사제를 드리는 날뿐 아니라 항상 내 계명을 순종하고 살아야 한다.'라고 명시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 순종이야말로 '하나님을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모시는 방법들' 중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요,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야말로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제물들' 중에서도 가장 요긴한 제물인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라는 것은 예물을 바치는 것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것까지 행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갖출 것을 다 갖춘 감사가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거룩히 모시는 성도의 기본마음에 해당된다면 순종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성도의 기본자세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그냥 한 번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꾸벅 인사하고 헌금봉투 한 장 내밀고 돌아서서 '이제는 다 끝났다.'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오늘 드린 감사가 진짜 감사인지 아닌지는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오늘을 통하여 다시 일깨워진 감사의 마음을 내일부터도 계속 간직하고 있어야 하며, 이 감사절 때문에 각자의 심령 속에 증폭되어진 감사를 이제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더 구체적으로 발휘해야만 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했으니까 이제 성탄절 올 때 정도까지는 적당히 주일 빼 먹어도 괜찮겠지.'라고 벌써부터 '머리 굴리는' 사람 혹 없습니까?
  '오늘 특별감사헌금을 내 딴에는 꽤 많이 드렸으니 이제 내년 맥추감사절 올 때까지 일반 감사헌금은 안 해도 내 할 일은 다 한 것이지.'라고 제 멋대로 '계산 마쳐 놓은' 사람은 혹 없습니까?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그처럼 함부로 만홀히 여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의 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신 성부를 교인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처럼 욕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을 입은 성도라면 정말 그래서는 아니 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써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아 성별된 성도는 결코 그럴 수도 없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진정 기쁨으로 지키는 성도라면 매주일을 역시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도 순종해야 하며, 추수감사예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바치는 성도라면 평소에도 역시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을 준행해야만 마땅합니다.
  오늘의 이 감사절기뿐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서도 늘 감사드리고 매주일 빠짐없이 예배드림으로써 진정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는' 감사의 제사를 일 년 내내 평생토록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올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감사드린다고 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가 그저 예의 차리는 정도에 불과할 때, 감사의 정성이 모자랄 때, 혹은 감사 자체가 아예 외식이고 거짓일 때에 그 감사는 절대로 열납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열납되도록 드리라"(that you may be accepted)고 하셨습니다.
  '제물이 열납되도록'이 아니라 '너희 자신이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감사의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어떤 진심과 정성으로 감사를 드리는가 하는 데서 나머지 모든 것들이 다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런 마음과 자세부터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명하시는 대로 갖추고 감사드려야 할 뿐인 것입니다.

  감사절이라는 것은 애당초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절기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날을 지키면 좋겠다고 의논을 해서, 목사가 이런 절기를 만들어 놓으면 교회 예산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 만들어 놓은 날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날을 통하여 스스로 감사의 제사를 받기 원하셨고 또한 이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까지 이처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이 감사절을 사람의 명절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예물을 바치는 날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이 감사절을 성도들이 함께 지킴으로써 감사의 감격과 기쁨이 훨씬 더 커지고 서로 나누어지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또한 이 감사절이 그저 한 번의 인사나 일회의 잔치로 끝나지 아니하고 신자의 순종을 통하여 매일 계속되는 예배가 되도록 이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추수감사절을 통하여 이처럼 '하나님께 열납되어지는 감사'를 함께 드림으로써 오늘뿐 아니라 자신이 살아 있는 순간순간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즐거워하는 제사,' 그래서 실로 하나님께서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산 제사'를 영원토록 올려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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