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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에 이르는 길(6) : 장애물(5) : 증오심↔용서" (엡 4:25- 엡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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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이르는 길: 장애물(5) : 증오심↔용서" (엡 4:25- 엡 5:2)

<용서하지 못해 불행한 사람들>
지난 주 신문에 참 어처구니없는 사건 하나가 소개됐습니다. 국립 대학 교수 한 분이 재판에 불만을 품고 "죽이고 싶다"는 내용의 책을 발간해서 자기를 재판한 부장 판사를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에게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145쪽 정도의 분량인데 제목이 놀랍습니다. 「아! 현직 판사들을 죽이고 싶구나」. 이 책은 그 교수가 직접 쓴 책인데 자신이 제기한 민사 소송을 부장판사가 각하시킨데 불만을 품고서는 그 부장판사와 사법부를 성토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서울 소재 모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출판했으나 아직 판매는 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깊은 상처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뼛속 깊이 상처를 준 사람들이 대부분 나와 가깝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특별 새벽기도회에서 창세기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순으로 내려오는 가족사에는 항상 갈등과 아픔이 있습니다. 부부간에, 형제간에 깊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기 한 목숨 살려고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속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남이 빼앗아가든 말든 내 목숨 하나만 건지면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태도이지요. 야곱은 자신의 쌍둥이형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조카인 야곱에게 사기를 쳐서 20년 간이나 노동 착취를 합니다. 야곱의 열 아들은 막내 동생 요셉을 미워한 나머지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입을 때 가족 친지 친구 동료 등등, 가까운 이웃들로부터 그럴 때가 많습니다. 차라리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에게 괴로운 일을 당하면 안 보면 그만인데 부모형제 친척 친구 동료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어머니를 미워하고 형이나 누나나 동생을 미워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를 미워하고 직장 동료를 미워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증오심을 품을 때 우리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상대방은 그대로 있는데 무엇보다도 내 마음이 무겁고 내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지 풀어야지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우리 마음에 화병이 생깁니다.

<용서에 이르는 길: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라>
오늘 우리는 행복에 이르는 길을 막고 서 있는 다섯 번째 장애물 '증오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미움의 앙금을 떨쳐내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 그도 살고 나도 삽니다. 용서는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상처 준 그 사람을 살리기에 앞서 먼저 나 자신부터 살리는 일입니다. 내가 미워하고 복수하고 싶고, 은근히 망해서 저주받기를 바라는 상대방을 진정으로 용서하기 전에는 내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은 여러분이 아직도 미워하고 앙금을 씻어내지 못한 분들이 누구인지 조용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분명히 깨달은 사람은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아직 어린 나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고향과 부모형제 곁을 떠나 요셉이 겪은 고생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죄수 신세로 전락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요셉은 이집트에서 엄청난 출세를 합니다. 국무총리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한 손에 잡았을 때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양식과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때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지만 깨끗이 용서하기로 작정합니다. 자기가 형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배신을 받은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네 번씩이나 말합니다(창 45: 4-5; 45: 7; 45: 8; 50: 20).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넘긴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기가 노예가 된 것이 오히려 가족들과 민족 전체를 위하여 행운이었다고 고백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로서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습니다. 혹은 아직 나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 가족들을 힘들게 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러 형제들 가운데 사고뭉치인 형이나 동생이 하나 있어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은, 슬픈 기억을 가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옥소리와 박철인가 하는 유명 연예인 부부가 이혼 소송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사랑했던 연인이나 배우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믿었던 친구나 동료로부터 사기를 당해서 엄청난 손해를 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자기를 고통스럽게 만든 그 사람들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미워집니다. 복수하고 저주하고 싶습니다.

이런 분들은 먼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모든 사건을 해석하는 버릇을 길러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참을 수 없는 아픔이었지만 그런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거꾸로 가정의 소중함을 절감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폭력과 싸움과 갈등이 그치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오히려 가족간의 화목과 우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지 않았습니까?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와 배신을 당하여 재산을 다 날렸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불우했던 시절, 억울하고 상처받았던 사건들도 믿음의 눈으로 해석해보면 오히려 나를 더 연단시키고 성숙하게 만들고 세상 줄이 아닌 하나님 줄을 더욱 더 굳게 붙들게 한 계기가 된 적이 많았습니다. 만일 내가 부유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하나님을 안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웠고 힘들었기 때문에 더 하나님께 매달렸다면 고난이 오히려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배신 안 당하고 사기도 안 당하고 사업도 안 망했더라면 나는 나 자신의 능력만 믿고 안하무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과 시련을 겪었기에 나와 비슷한 아픔과 시련을 겪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상처를 받은 것이 그 당시에는 견딜 수 없고 증오심을 머리끝까지 불러일으켰지만, 지나놓고 보니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시련을 통하여 내 인격이 많이 성숙하고 하나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롬 8: 28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옳고도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화가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릴 때 연필로 여러 가지 밑그림을 그리고 기본 색깔들을 칠해놓습니다. 언뜻 보면 형편없는 그림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화가의 손놀림이 계속될수록 점점 더 아름다운 그림으로 바뀌어갑니다. 고난과 시련도 억울한 일도 상처도 지금 당장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 전체의 그림이 완성될 때 그토록 불우하고 괴로웠던 시절이 있었기에 우리 인생이 더욱 더 의미 있고 아름답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용서: 악을 선으로 갚는 일>
아마 제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정작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잘못 했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또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나에게 아무 용서를 구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나님다운 일이요, 선을 선으로 갚는 일은 인간다운 일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악마가 하는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은 짐승이 하는 짓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사탄 마귀나 하는 짓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본능대로 하는 일이니 짐승의 짓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선을 선으로 갚든지 악을 선으로 갚는 일입니다. 나에게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선으로 되 갚으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도리입니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악을 끼쳤더라도 선으로 갚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정신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복음의 끝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용서하고 사랑할 때 복음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조엘 소넨버그(Joel Sonnenberg)라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통행료를 내기 위해 매표소에 서 있는데 갑자기 대형트럭이 들이닥쳐 사고가 났습니다. 그 때 조엘은 뒷자리 유아용 좌석에 앉아 있다가 그대로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조엘의 몸은 4/5가 화상을 입었고 한 손은 아예 없어졌습니다. 그 후 긴 세월을 재활 병원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조엘을 보면서 "저기 원숭이 좀 봐라" 하면서 조롱과 야유를 보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배보다 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축구팀의 주장과 학생회장이 되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는 과대표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인 조엘이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사고를 낸 운전사를 용서하는 일이었습니다. 트럭 운전사는 사고 처리 도중에 외국으로 도피해 19년 동안이나 잠적해버렸습니다. 조엘도 인간이었기에 자기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을 증오하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트럭 운전사는 19년 만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조엘은 법정에서 그 운전사를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레지날드 도트 씨(운전사의 이름), 당신이 은혜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증오는 불행만 초래할 뿐이므로 우리의 인생을 증오로 얼룩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 인생을 사랑, 곧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감싸야 할 것입니다." 조엘 소넨버그는 하나님을 믿는 청년으로서 자기 인생을 망친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그리하여 진짜 승자는 조엘이 되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윤리적인 규범입니다. 말과 행실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다 귀하고도 중요한 말씀이지만 그 중에서도 4: 32절 말씀을 주목해봅시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을 먼저 친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야만 합니다. 우리를 억울하게 만들고 상처를 준 사람들도 알고 보면 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희생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겨야만 합니다.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해를 끼친 상대방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제 제일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될 것입니다(사 1: 18). 이렇게 놀라운 용서를 경험한 우리들이 훨씬 더 미약한 죄를 저지른 우리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마 6: 14-1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가 먼저 남의 잘못을 용서해줄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우리가 남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과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우리 속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깨집니다. 자녀에게 회초리를 댈 때 맞은 녀석은 세상 모르고 쿨쿨 잘도 잠이 드는데 때린 부모는 뒤척거리며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억울하게 만들고 상처를 입힌 모든 이들을 너그럽게 용서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이 삽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행복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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