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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도 꺽지 못하는 믿음 (요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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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꺽지 못하는 믿음 (요 11:17-44)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예수 믿는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과 사는 방법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 차이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멀리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판단이 다릅니다. 믿음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예수님이 역사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다.’ 믿기 때문에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평안하고 두려움도 염려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도무지 안될 것 같은 정말 벽 앞에 선 것 처럼 또는 깊은 좌절에 빠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 어떤 순간이 와도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길이 보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 모든 과정 속에 함께 계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가면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문제는 큰데 마음이 평안합니다. 두려움도 없어지고 염려도 없어지고 놀라운 충만함을 경험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음을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제가 군목 제대를 할 때 섬기던 한 부대에서 대대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위병소에서 한 형제가 제 차를 알아보고 웃으며 나와 인사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제대 하신다지요? 저도 10월이면 제대합니다.” 저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 그 형제를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 형제는 2등병 때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여 오랫 동안 상담을 하던 형제였습니다. 대대장으로부터 그 형제의 마음을 바로 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상담하면서 얼마나 낙심스런 순간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말이 통했나 보다 했다가도 또 옛날로 돌아가고, 이제는 마음 잡았나 싶었는데 사고를 내서 부대에서 급히 연락을 받고 갔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 친구는 안되나 보다. 나로서는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제대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차를 타고 부대를 빠져 나오면서, 그 형제가 무사히 제대하게 된 것도 감사했지만, 사람을 변화시키시는 이가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형제에 대하여 쉽게 낙심하고 포기할 뻔 하였던 제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안된다고 포기했다면 어떻게 할 뻔 하였나?’

요한복음 11장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죽은 자가 살아난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시간이 다가왔을 때, 제자들 안에 죽음도 이기는 믿음을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믿음 좋은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그 중에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을 잘 섬겼고, 예수님께서도 그 가정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음 좋던 마르다와 마리아도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왔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돌아오셔서 마을 입구에서 마르다를 만났을 때,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나이다”(21절)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믿음이라면 믿음이지만 죽음도 꺽지 못하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을 고쳐서 죽지 않게 하실 수는 있지만, 죽은 다음에는 예수님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말은 믿음인데 분위기는 낙심이었습니다. “이제 다 끝났어요.”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셨을 때, 마르다는 질겁을 하면서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하면서 주님을 만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려는데, 마르다는 낙심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 마리아는 더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마중을 나오지도 않습니다. 너무 슬퍼서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찾으시니 뒤늦게 나왔지만,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나이다”(32절) 하고는 통곡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 민망할 정도였습니다. 오빠의 죽음 앞에서 그 좋던 믿음도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편으로는 믿지만 온전히 믿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기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야.’ 이런 믿음으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히시는 것을 보는 순간에도 제자들은 끝까지 그리스도로 믿고 따를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나사로가 죽는 것을 통해서 부활하시는 역사를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자들은 그 일을 계기로 해서 그랬는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들은 대단히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아주 실족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늘 제가 드리는 말씀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놀랍게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모든 사람이 듣도록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들로 믿게 하려 하심이라. 이제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통해서 정말 예수님은 그리스도시구나.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으로 나가시는 분이시구나. 그 사실을 믿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디까지 입니까? 죽음도 꺾을 수 없는 믿음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십자가가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 놀라운 믿음을 가졌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마음이 무너집니다. 건강에 어려움이 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 얼굴 표정 하나에도 속이 뒤집어지기도 합니다. 항상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돈을 세어 보면서 삽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결코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분명한 믿음을 심어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41-42절에서 예수님께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전에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크게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의도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은 “둘러선 무리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하심” 이라 하셨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기에 예수님의 사역이 십자가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질 것임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40절에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시면서 믿음의 문제를 다루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 앞에서 잠시 흔들렸지만 아주 실족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처럼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죽음도 꺾을 수 없는 믿음을 갖게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병으로 쓰러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사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너의 실패는 망할 실패가 아니니라. 낙심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다." 라고 하시면, 죽은 시체가 눈 앞에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아멘” 하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용기가 믿음에서 나옵니다. 죄악 세상에서 정결한 삶을 사는 것도 믿음 없이는 못합니다. 어떻게 정직한 자가 되겠습니까? 십일조 생활도 감사 생활도 믿음 없이는 못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도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음도 꺾을 수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믿음이 있음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21절에서 27절까지 마르다를 보면 믿으려고 몸부림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에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했다가 22절에서는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셨는데,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 내가 아나이다”(:24) 라고만 말했습니다. 그 고백은 외적으로는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신앙 고백이었지만, 거기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떤 확신도 감사도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예수님, 그럼 우리 오빠 살려주세요!”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했더니 27절에서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고백했습니다.
마르다는 오빠가 죽었다는 너무나 슬프고 낙심되었지만 그래도 예수님 앞에서 믿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믿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저는 마르다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저라도 그 이상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슬픔과 낙망 중에도 ‘마지막 날에라도 부활할 것이라 믿고 슬퍼하지 말아야지, 믿음의 모습을 보여야지!’ 하는 몸부림이 귀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눈 앞에 닥친 어려운 현실 때문에 슬퍼하고 낙심하다가 ‘사람들에게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 하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 앞에서 “괜찮아요, 주님이 다 해결해 주시겠지요. 언젠가는 해결될 때가 올 거예요.  이 중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 기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정말 마음이 무너지고 가슴이 철렁하고 슬픔과 낙심이 들 때 나서서 그런 모습 보이기는 싫고, ‘내가 그 동안 신앙 생활해온 경력이 얼마고 내가 교회 직분이 어떤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면 안되지.’ 그래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안 그런 척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낙심과 슬픔은 감출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이 있음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 자체를 주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나의 생명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 두려움과 염려가 주님께 맡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일부터 시작되는 특별 새벽기도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정말 놀랍게 기도의 능력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김우현 감독이 쓴 [하늘의 언어]라는 책 한 권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 속에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 기도의 능력을 사모하는 마음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김우현 PD가 쓴 [하늘의 언어] 중에 KBS <인간극장> ‘광화문 연가’ 편의 주인공인 뇌성마비 장애인인 재완씨가 방언을 하게 되는 내용 중에, 그가 담배를 끊는 내용이 나옵니다. 재완이가 담배를 끊는 것도 한 동안 나의 ‘애타는 외침’ 이었다. 재완이도 나를 통해 은혜를 알아가면서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당연히 쉽지 않았다. “재완아… 우리의 노력을 아예 포기하자. 그냥 성령님께 끊어달라고 맡기자. 그게 최선이다." 어느 날, 내가 재완이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 그리고 함께 간구한 지 얼마 못 되어 정말 기적처럼 재완이 손에서 담배가 끊어졌다. 아내를 통해 알게 된 손기철 장로님의 작은 집회에서 성령님께서는 재완이를 뜨겁게 만져주셨다. “갑자기 담배 냄새가 너무 혐오스러워." 다음 날, 그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재완이를 끌어안고 감격했다. 

예수님께서 죽음 앞에서도 꺾어지지 않는 믿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서 높은 경지에 이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듯이 지금도 주님이 친히 우리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분명히 예수님은 믿음의 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 문제와 염려를 다 맡기려면 예수님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는 것 같지만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집회 인도를 부탁받아서 말씀을 전할 때, 늘 전하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때마다 모인 이들 안에 놀라운 믿음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이 많지만 대표적인 분을 꼽으라면 죠지뮬러 목사님이나 스미스위글스워스 목사님 같은 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죠지뮬러 목사님은 오직 믿음으로 아무런 재산도 없이 평생 만 명의 고아를 돌보았고, 허드슨테일러를 비롯하여 많은 선교사에게 2만 권 이상의 성경을 보내었고 돈으로 환산하면 8백만 달러 돈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옛날에 대단한 돈입니다. 20세기 믿음의 사도라 불리는 스미스위글스워스 목사님은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였고 죽은 자 14명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 분명히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스미스위글스워스 목사에게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했을 때, 위글스워스 목사님은 “아닙니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성경에 ‘내 안에 계신 분은 세상에 있는 자 보다 크시도다’ 하신 말씀을 기억할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성령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만으로는 죽음을 이기는 믿음이 생기기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두려움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진짜 믿어지게 될 때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행 5:40-41)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죠지뮬러 목사님은 80세가 넘은 나이에 신학생들 모임에 초청받아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몸을 천천히 일으키더니 의자를 향하여 돌아서서 그 의자 앞에 무플을 꿇고 앉아 그리고 의자 위에 두 손을 깍지 끼고 얹고 잠시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계셨습니다. 한참 후에 일어나 “이게 비결이오, 비결은 이것 뿐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죠지뮬러 목사님이나 스미스위글스워스 목사님은 한결같이 기도의 깊은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말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계속해서 경험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부산에서 어느 장로님 사역이 너무 크고 귀하여서 모시고 간증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건설 회사를 경영하시는 분인데, 새벽마다 한 시간씩 방언으로 기도하고 교회를 나설 때, 산도 밀면 움직일 것 같은 확신에 넘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영적 침체에 빠지는 것은 성령님을 믿고 성령님 안에서 기도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힘입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설교가 메이어가 배를 타고 여행을 했습니다. 아주 캄캄한 밤에 목적했던 항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은 폭풍우 때문에 항구에 바로 기항하기가 아주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메이어목사는 선장에게 물었습니다. “선장님, 아니 이렇게 캄캄한 밤 폭우가 쏟아지는 밤인데 어떻게 항구에 바로 기항할 수가 있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예, 저기 바닷가에 불빛 셋이 보이시지요? 그 세 개의 불빛이 일직선으로 내게 보일 때 저는 곧장 마음놓고 항구를 향해 들어갑니다.”

우리도 앞이 캄캄할 때, 길을 찾는 비결이 있습니다. 성경과 성령님의 역사와 환경이 일치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 셋이 한 선에 들어 설 때 우리는 곧장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말씀이 그렇고 성령의 감동이 그렇고 환경을 통해서 분별이 되면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군목 시절, 한 포대 군종이 너무나 낙심하여 함께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저 군종 못하겠습니다.” 간부들의 비협조, 고참들의 훼방, 동료 병사들의 비협조로 너무나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군목인 저도 더 계속하라고 강요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물었습니다. “장군종, 정말 영생천국을 믿어?” 그 군종이 한참만에 눈을 드는데 눈에 눈물이 가득하였습니다. “목사님, 그냥 군종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를 내다보니 계속 가야 하는지, 물러서야 하는지가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서로 끌어안고 울며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여기서 물러나야 될지 계속 가야 될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야고보서 1장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도 온전히 기뻐하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신 복입니다.
믿음은 길게 내다보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입니다.
믿음은 변합니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 같았지만 장성한 믿음으로 바뀝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마음에 둥지를 틀고 있는 모든 낙심과 슬픔, 두려움과 염려를 쫓아내어야 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한 말씀을 품어야 합니다. 이 시간 마음을 여십시오. 성령의 역사에 마음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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