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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로 환경을 이기라(9) : 십자가에서 남긴 두 번째 기도 (마 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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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환경을 이기라(9) : 십자가에서 남긴 두 번째 기도 (마 27:45~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5-46)

I. 십자가에서 남긴 둘째 기도의 바른 이해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이어 나오는 두 번째 기도가 본문의 십자가에서 남기신 네 번째 말씀입니다. 첫 번째 말씀은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였고, 두 번째는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고 세 번째는 “아들이니이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번째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네 번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이 부르짖음은 기도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완벽한 히브리어입니다. ‘엘’은 ‘하나님’, ‘이’는 ‘나의’라는 의미로 ‘엘리’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사파크’는 ‘쏟아버리다’, ‘타’는 ‘당신이’, ‘니’는 ‘나를’이라는 뜻으로 ‘당신이 나를 버리셨습니다’가 됩니다. ‘라마’는 ‘왜(why)’라는 뜻으로 전체를 조합해보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왜, 무슨 연고로 당신은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A. 판이해 보이는 두 기도 장면

이러한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를 생각하기에 앞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와 오늘 본문의 두 번째 기도를 연결하여 생각해봅시다. 오늘 본문의 기도를 대할 때, 첫 번째 기도하신 장면과 판이한 장면처럼 생각되지 않습니까?

첫 번째 기도는 죄인들을 향한 중보의 기도였습니다. 첫 번째 기도의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에서 ‘저희’는 일차적으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참여했던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다보고 계신 무리들이며 그들로 인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그들은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시고 인간의 죄를 구속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빌라도를 비롯해서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또 그렇게 해달라고 빌라도에게 간청하며 외치던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가장 가까이 근접해 있는 원인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자신들의 손과 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했던 사람들의 죄는 실로 더 크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두려워하시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일차적인 예수님의 중보기도 대상자는 예수님을 직접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확대하여 이차적인 중보기도 대상자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은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일에 도구로 사용된 사람들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던 이유는 단지 그들의 악한 계획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 기도는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지 않으시면 안 되게 만든 모든 죄인들을 위해 용서를 비는 기도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복음 선포 중에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며 예수님의 이 기도를 부분적으로 응답되었다, 또는 부분적으로 응답되지 않았다는 식의 논리로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는 이 죄 가운데 죽어 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분의 기도는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을 사람들에 대한 유효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 응답으로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또한 첫 번째 기도의 “아버지여”하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조차도 아버지와 하나 된, 연합된 마음을 가지셨고 그 일체감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남기신 두 번째 기도를 보면 이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저 사람들을 버리십니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서 외면당하고 버림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고통을 느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 어린 절규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B. 십자가에서 탄식하며 기도하신 이유

그러면 이것이 십자가에서 남긴 첫째 기도와 어떻게 조화되겠습니까?
우리들이 여기에서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엄연한 사실이지만, 실제 죄 가운데 있는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기’를 실제로 분리해서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용납되는 것을 본인 자신이 경험하기 전까지는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1998년)라고 하는 시리즈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신다’고 흔히 말하지만, 실제로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경험 속에서는 그것이 분리되어서 느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죄에 대한 진노는 곧 죄인인 자기에 대한 진노이지, 죄와 자신을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들이 깊이 회개하고 그 죄의 용서를 경험할 때, 그 죄는 미워하게 되고 죄인을 용납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확실히 그 두 가지가 분리된다고 하는 사실을 압니다.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면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자기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 죄도 사랑하신다고 해석하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살았을 때는 그 죄가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회개를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연합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오랫동안 사랑했던 그 죄가 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혐오스러운 죄를 분리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고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죄와 자신이 일체를 이룹니다. 나와 죄가 분리되지 않습니다. 죄가 내 안에 내가 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깊은 은혜 속으로 들어가 보면 자기와 죄가 분리됩니다. 그리고 죄가 객관적인 실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때는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이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죄 안에 있든지, 은혜 안에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회개하고 자신이 주님과 연합되어 죄가 객관적인 실체처럼 느껴질 때, 비로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누어져서 경험되는 것이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잘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이 교리가 여기에서 필요한 이유는 본문에서 ‘사파크’, 즉 ‘버리다’라고 표현된 예수님께서 맛보신 하나님과의 철저한 분리가 어떤 강렬한 혐오감과 미움 때문에 떨쳐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으신 것은 애처롭게도 예수님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난을 받고 주를 위해서 순교의 자리에 선다고 해도 예수님의 생애와 우리 자신의 생애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의 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고, 하나님과의 불화를 모르시던 분이었기 때문에 그분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주석가가 ‘신자는 영원히 예수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지옥에 가면 이해할지 모르지만 신자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므로 영원히 예수님의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철저히 버림받고 징벌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사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를 모두 짊어진 대속 제물로서 죄를 짊어진 어린양으로 간주되어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미움과 예수님 자신의 버림받음이 분리되지 않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셨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그것을 얼마나 뚜렷이 느끼겠는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왜 미우시겠습니까? 당신의 뜻을 이루고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대속제물로서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형벌을 당하시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이 왜 미우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하나님께서 그 죄를 향해 하나님이 진노의 잔을 쏟아 부으시며 죄를 짊어진 예수님을 징벌하실 때 예수님은 죄에 대한 형벌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당신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탄식하며 기도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II. 예수님의 중보기도 세계가 주는 교훈

이처럼 타인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세계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A. 타인을 위한 기도로 경험하는 은혜

물론 예수님이 이렇게 죄를 짊어지시고 중보자로서 하나님 앞에 하신 기도는 예수님 이외에 누구도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상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그 죄짐을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고 기도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의 짐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거나, 그들의 신앙과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불러올 수 있다는 믿음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용서는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적인 면에서 이런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타인을 위한 기도를 통해 다음과 같

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군가의 죄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그 죄인을 위한 우리의 기도에 성령이 역사하시면, 마치 그들이 지은 죄가 나의 죄인 것처럼 느껴져 하나님 앞에 통회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그 죄를 위해서 눈물 흘리고 기도함으로 그가 저절로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진정한 중보기도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면, 죄 가운데 살아가는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 그 죄가 마치 지금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짓고 있는 죄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 영향력이 자기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앙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느껴져 애통하며 회개하는 중보기도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경험되는 공통된 경험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그 기도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과의 놀라운 친밀함, 평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그 기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정작 죄를 지은 당사자도 느낄 수 없는 그 죄로 인한 깊은 고통을 기도하는 자신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누린 화목이 단절됨으로 고통당하셨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또한 우리의 죄는 아니지만 지체의 죄를 나의 죄인 듯 느낌으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통하며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조금이나마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통해서 죄 지은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양심의 강렬한 가책을 받아서 회심에 이르도록 만들어 줍니다.

역사를 보면, 이렇게 하나님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죄인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하는 강력한 회심의 역사가 있기 전에 그러한 회심을 위해 열렬하게 중보하며 기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이나 역사를 살펴봐도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하는 이 강력한 회심의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원하실 때 그 일을 하시고 하나님이 그만두고 싶으실 때 그만두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항상 자기의 이 놀라운 일들을 이루시기 전에 그런 일들을 행하실 조짐들을 먼저 보여주십니다. 그 조짐은 자기의 죄로 인해 애통하지 않던 영혼들을 일깨우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보고 주 앞에 뉘우친 후, 죄 가운데 살아가는 많은 지체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그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눈물 흘리는 기도의 강한 섬김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건강함은 자기처럼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은혜 가운데 살아가지 못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얼마나 열렬하게 섬기며 기도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B. 예수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신 이 탄식의 기도는 예수님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를 불평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탄식하는 기도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체에 있어서는 인성을 입으심으로 참사람이셨던 예수님의 연약성을 생각나게 해줍니다. 그리고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짊어짐으로 그 죄와 자신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경하셨습니다. 그 죄를 짊어지신 분이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인 동시에 하나님, 당신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진노를 예수님께 온전히 쏟아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에 대한 진노를 당신 자신이 온 몸으로 느끼시며 나오는 탄식을 하나님 앞에 토해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육체적으로 피 흘리고 죽으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더하여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우리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대적이 된 것 같은 형벌을 한 몸에 감당하셔야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희생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떠함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형벌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주님을 위해 일평생 견고한 결음으로 고난을 감당하며 믿음의 싸움을 싸운다 할지라도, 우리는 감히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고난에 동참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과 질적으로 차이가 극심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할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고 그 분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구속하는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보자가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고, 그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중보의 위대한 사실을 전해주는 또 다른 의미의 중보자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이러한 기도의 고난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하나님의 자녀의 눈에 이렇게 죄 가운데 살아가는 백성들을 향한 순전한 기도의 눈물이 흐르면, 그 눈물은 모아져서 불신자들 가운데 타오르고 있는 지옥의 불길을 끄는 훌륭한 물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들이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먼저 눈물 흘리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의 세계는 바싹 마른 들판과 같아서 한번 붙은 열망의 불길을 끌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C. 예수님과 동일한 정신으로 기도함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광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는 이 처절한 절규는 우리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가시면서 남긴 이 기도는 복음을 듣지 못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영혼들을 위해 예수님과 동일한 정신으로 기도하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오늘날 현대 교회는 열심히 교인들을 조직하고 동력화해서 많이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도 많이 보내는데, 왜 그에 비해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까?’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복음 전파가 이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고 하며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문제를 삼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시대 사람들이 너무 개화한 시대에 살기 때문에 원시적인 방법인 ‘말’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별 반응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전달매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담대한 사람들은 성경에 예언한 바와 같이 이 시대의 사람들이 다른 어떤 시대의 사람들보다도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렇게 복음을 위한 많은 노력에 비해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단지 복음의 내용이 어리석기 때문이거나 전달매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道)가 현명한 도(道)였던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이 세상 사람들이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까? 이천년 전에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로 간다고 해도 “누가 우리의 전한 것을 믿었느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시대가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했고, 지혜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도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결론적으로 이렇게 열심히 전파하고 새로운 전달매체를 간구하고 많은 노력을 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이유들을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십시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늘 있음에도 그들은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구원받았으나 자신에게 영혼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기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 그들의 기도는 십자가의 사랑과 그 사랑을 모른 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부르짖는 애통이었고, 자신에게는 구원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고백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항상 복음 선포에 놀라운 성령의 능력을 가져왔고, 그 놀라운 능력이 사람들에게 변화의 역사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훈은 이것입니다. 그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이 충분히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로 희생한 적도 없으면서 간단하게 ‘저들이 복음을 듣지 않는 것은 저들 자신의 강퍅한 죄 때문이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강퍅하기로 말하면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장본인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그들을 위해서 변명하시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자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의 은혜를 주시기를 아버지께 구하셨습니다.


III. 결론과 적용

예수님께서 일생동안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생애를 사시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까지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광경을 본문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이 고난을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러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미 하나님과의 화목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 우리의 사랑하는 지체들이 이 회심의 길로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에게 복음은 열심히 전했지만 우리의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죄를 우리의 죄인 것처럼 짊어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당하는 고난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받으면서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사는 사랑스러운 지체들이 되어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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