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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하나님의 관점에서 감사하자 (렘 30:19~20, 골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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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관점에서 감사하자 (렘 30:19~20, 골 3:15~17)

오래 전 늦은 밤 스코트랜드의 오지에서 한 정치가가 타고 가던 마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우연히 이 지역을 지나가던 동네 청년이 정성껏 마차를 수리해 주었습니다. 이 청년의 도움으로 정치가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모진 폭풍우 속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은 청년에게 감동을 받은 정치가는 장래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치가는 이 청년이 의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로부터 50년 후에 아프리카의 모로코에서 폐렴으로 죽게 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불과 얼마 전에 개발된 기적의 약이라고 불리는 페니실린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페니실린을 발명한 사람은 50년 전에 마차를 수리해 주었던 바로 그 청년이었습니다. 페니실린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은 감사의 표시로 공부를 시켜 준 정치가의 아들이었습니다. 페니실린을 발명한 의사는 알렉산더 플레밍이었고, 페니실린 덕분에 목숨을 구한 사람은 윈스턴 처칠입니다. 플레밍을 공부 시킨 사람은 바로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인 랜돌프 처질이었습니다. 인생이란 인과의 고리입니다. 작은 감사가 자신의 아들을 살립니다. 언제나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감사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 감사하게 되고 감사는 다시 자신에게 열매로 돌아옵니다. 은혜라는 말의 ‘카리스’(charis)는 항상 감사, ‘유카리스타’(eucharista)라는 답을 요구합니다. 즉 은혜는 감사의 답을 요구합니다.

  감사는 초점을 바르게 맞추어야 가능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내 일을 보면 감사하게 됩니다. 내 편에서 하나님의 일을 보면 불평하게 됩니다. 원망은 망국 백성의 근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후에 감사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불평이 더 많았습니다. 둘째는 가진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남의 것에 관심을 가지면 불평이 커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것만 가지고도 평생을 다 못 씁니다. 셋째는 약속과 미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인간은 소망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소망만 있어도 원망할 자격이 없습니다. 약속이란 이루어지지 않은 실재입니다. 넷째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심이 감사의 가장 큰 제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감사하기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사랑을 인식하면 이 모두가 가능합니다.

  빌립보서 4:4-7을 보세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사함으로 아뢰라고요? 감사하면 기도할 것이 없잖아요? 아닙니다. 아쉬워야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을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가 기도입니다. 기도가 감사이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말씀이지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서 조건이 나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쁜 환경도 감사의 대상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많은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에도 “주신 복을 세어 보아라”고 합니다. 한번 세어 보세요. 얼마나 많은 감사의 조건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장 기본적인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감사를 보아야 합니다.

  골로새서를 흔히 학자들은 ‘고등 기독론’(High Christology)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논리를 아주 높은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감사를 살펴보세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곳에 감사가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 성경적 감사를 체험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감사하자.

  골로새서 3:15에는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주신 것만 해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한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부르심을 받고 지체가 된 것만 해도 감사한 일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감사의 조건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부르십니다. “야곱아, 야곱아”라고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야”라고 부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그 부르심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절대 손해 보지 않습니다. 부르심의 은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창세기 15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여호와여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은 공짜를 많이 바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부르실 때마다 은혜가 쏟아진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힘이 납니다. 은혜가 됩니다. 부르시는 소리에 응답하면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부르심을 받으면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것만으로도 영광이며 감사입니다.

  로마서 1:6에는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라고 합니다. 1:7에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고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부르심이 얼마나 대단한 은총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줄 믿습니다. 성경이 일러준 대로 내가 주님을 부른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것만 하더라도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을 불러 강의를 부탁합니다. 불러 일을 맡깁니다. 심지어 불러 재정 지원을 부탁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불러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요 사랑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불러주신 것이 어찌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나를 부르신 것만 해도 감사입니다. 부르심은 은총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감사입니다.
  바울은 여러 번 서신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신기하고, 기적이고, 감사하고, 자랑거리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선하심을 풍문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체험을 하고나면 부르심이 얼마나 복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를 담은 바구니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감사하게 됩니다.

  학자 헉슬리는 말년에 시각을 잃었습니다. 그는 점자로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점자를 읽을 수 있게 되니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추운 밤에도 손이 따뜻한 채로 책을 읽게 된 셈이다.” 자신의 시각이라는 소유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도 존재가 희망이 있습니다. 다 잃어도 생명이 있으면 감사하세요. 생명 잃으면 소유나 천하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만 있으면 다시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존재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14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는 용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곳에는 그분이 주신 은사도 있게 마련입니다.

둘째, 주 예수의 이름으로 힘입었으므로 감사하자.

  17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하나님의 부르심 다음에 감사할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힘입었으니 감사하라고 합니다.
  “힘입어”가 무슨 말입니까? 힘을 입었다는 말은 힘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든든한 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누가 우리의 든든한 배경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든든한 배경이시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힘입어 삽니까? 나의 배경이 누구입니까? 누가 나의 빽입니까? 귀신이 배경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했습니다. 이 말씀은 귀신이 배경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님이 배경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2:28에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성령님을 힘입어 사역했습니다. 누구를 힘입어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 인생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귀신을 힘입지 않고, 세상을 힘입지 않고, 주 예수님을 힘입어 일하고 삽니다. 이것만해도 무한 감사할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귀신을 힘입고, 세상을 의지하고 삽니다. 얼마나 헛된 세월을 보냅니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합니까? 제가 두 주간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한 해에 무속인들에게 들어가는 돈만 약 2조원입니다. 귀신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점쟁이 집이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손 없는 날만 되면 이삿짐 센터가 불이 납니다. 새해에는 토정비결을 보느라 법석입니다. 아기이름 짓느라 작명가가 늘 바쁩니다. 저한테 오면 돈도 안 받고 아기 이름 다 지어주는데 왜 그리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쓸 데 없는 것을 힘입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삼고 빽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이나 귀신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힘입고 사는 것만 해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0:19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우리가 성소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잡된 귀신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구원받고, 성소에 들어가고, 오늘도 예배하니 감사하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감사합시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감사합시다.

  감사 없는 기도는 불평입니다. 감사 없는 찬송은 한탄입니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이런 말밖에 더 나옵니까? 감사 없는 자비는 진정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자비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진 자의 선심일 뿐입니다. 감사가 없는 삶은 어떤 것도 진정성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14:3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주 예수의 이름을 힘입으면 담대해집니다. 우리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납니다. 은혜의 말씀을 증언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31에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결론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주일 날 어느 안수집사님이 낚시를 갔습니다. 목사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린 집사님 앞에서 목사님이 홧김에 “다리나 똑 부러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안수집사님의 친구가 들었습니다. 낚시 간 집사님은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을 알기에 목사님도 말을 뱉고 나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월요일 저녁에 낚시 갔던 집사님이 목사님 사택에 전화를 해서 잠시 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잔뜩 긴장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집사님은 과일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습니다. 들어오자 말자 집사님은 목사님께 “목사님, 감사합니다. 어제 제가 사정상 교회에 나오지 않고 낚시를 갔는데도 날씨 추운데 옷 두툼하게 입고 갔느냐고 걱정하셨다면서요? 다음부터는 꼭 주일을 지키겠습니다. 목사님,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곁에 있던 친구 집사님이 말을 잘 전해 준 것입니다. 좋은 말 한 마디가 사람을 마음을 바꿉니다. 잘못 전하는 한 마디가 불화를 일으킵니다. 갈등의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감사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감사는 작은 호의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감사 속에 있습니다. 주 예수를 힘입어 사는 것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우리 인생은 감사하면 행복해집니다.

결론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3개월을 가족들 없이 혼자 먼저 가서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아침에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 룸메이트와 함께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같이 성경 읽고 기도하자고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 미국인 친구는 “하나님 감사합니다”(Thank God), “주님 찬양합니다”(Praise the Lord) 하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저는 아침마다 “아이구, 죽겠다”하고 일어났습니다. 얼마쯤 지나서 생각해보니 미국인 룸메이트가 한국말을 못 알아들어서 다행이지 참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죽을 지경이지만, 힘이 들지만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소리치며 일어났습니다. 한 주간쯤 지나니 정말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도 생기고 오히려 기분도 좋아지고 힘도 덜 들었습니다. 감사하면 힘이 납니다. 최대한 많이 감사하세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받을 이상의 것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감사하면 복이 옵니다. 감사하면 긍정적인 삶을 삽니다.
 
고대 교부 크리소스톰은 “죄 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사를 찾아보세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곁에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하세요. 주 예수의 이름을 힘입었음을 감사하세요. 그리고 대상을 찾아 감사하세요. 우리 주위에는 감사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줄로 알고 감사하세요. 현재 눈앞에 닥친 과제,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감사하세요. 그것들이 변하여 우리에게 은총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진정한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계절뿐만 아니라 매일 우리의 삶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감사하는 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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