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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속의 은혜 (창 44: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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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속의 은혜 (창 44:27-34)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간 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도 내게서 취하여 가려한즉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4세기 때에 어떤 키가 작은 수도사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적한 곳에서 채소를 키우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를 힘쓰는 신실한 수도자였다. 그러나 하루는 기도를 하다가 강한 impression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로마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는 너무도 부담이 되고 두려웠지만 그 impression이 너무도 강하였고 그것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결국 로마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는 축제의 분위기였다. 로마는 빈부의 차이가 매우 심한 곳이었지만 나라에서는 나름대로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커스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서커스라는 것은 사실은 gladiator라는 장군들이 나와서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격투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그 때에 그를 부르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다. 그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군중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참을 움직이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골롯세움이라는 운동장에 들어와 있었다.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어서 주위를 돌아보니 군중들은 제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는 굶주린 야생동물의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잠시 후 gladiator들이 황제를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인사를 황제에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의 격투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본 수도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외쳤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장 멈추시오” 그러나 군중의 소리 때문에 그의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운동장으로 뛰어 들어가서 다시 외쳤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멈추시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가 이 쇼에 등장하는 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군중이 오히려 웃고 더 즐거워 했다. 그는 한 gladiator로부터 얻어맞고 땅에 쓰러졌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 이제는 아예 싸우는 두 명의 gladiator 사이에 들어가서 그 싸움을 말리면서 외쳤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장 멈추시오” 그러자 한 gladiator가 칼로 그를 내려치고 그는 가슴과 배가 터져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싸움을 당장 멈추시오”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엄숙한 분위기가 운동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쇼가 아니라 목숨을 건 희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군중은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엄청난 권위와 거룩한 분위기로 인해서 그들은 하나씩 자리를 뜨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수도사의 죽음 이후로, 로마에서는 gladiator들의 목숨 건 싸움의 쇼는 중단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는 대속의 사건이었다. 대속에는 큰 power가 있고 군중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우리는 대속의 은혜를 더욱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온 것이고 대속하려 온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서 수많은 인류가 구원을 받았다. 대속의 은혜의 power가 우리를 구원한 것이다.

본문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네 번째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는 애굽 총리인 요셉 앞에 엎드려 자신을 대속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에 흐르는 단순한 에피소드로 생각하기 쉽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애굽의 모든 곡물들을 7년동안 모았다가 다른 7년동안 그 나라와 주위 나라를 도와 그들을 구원하게 되었다. 그 소식이 야곱에게 들리고 야곱도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열 아들을 애굽으로 보낸다. 그들은 자신들이 25년 전에 팔아버린 동생 요셉의 앞으로 나아오게 된다. 물론 그들은 요셉을 알아볼 수 없었다. 형들을 알아보는 요셉은 형들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부모의 근황을 묻고 자신의 동생인 베냐민이 태어난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형들을 spy로 간주하는 척하여 그들 중에 하나인 시므온을 인질로 잡게 된다. 야곱은 아들들로부터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세월이 지나서 양식이 다시 부족해지고 야곱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또 다시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려 한다.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올 때에 반드시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애굽 총리의 명령을 기억하고 이를 아비에게 알린다. 야곱은 근심하고 울지만 두 아들이 반드시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비를 위로한다.  그리고 베냐민을 포함하여 모두 열 명의 형제들은 다시 애굽으로 향한다.

그들은 잔치에 참석하여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양식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요셉 군사의 추격을 받고 곤란에 처하게 된다. 그들 중에 하나가 요셉의 은잔을 숨겨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결국 베냐민의 짐에서 찾고 있던 은잔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옷을 찢으며 다시 요셉에게로 끌려오게 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유다가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며 대속물 되기를 자청한다. 대속과 역경의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었다.

33, 34절을 보자.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분명히 유다는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베냐민과 아비의 목숨을 살리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유다의 대속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마음을 단순히 moving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대속의 마음으로 가족이 회복되는 엄청난 이야기이다.

창45절1절을 보자.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요셉은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25년 동안 쌓여 있던 자신의 슬픔을 폭발시키고 있다. 큰 빙하처럼 쌓여 올라간 비극의 이야기가 한순간에 녹아 내리는 은혜가 있는 광경이다. 하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구원 사역은 이 열 두 지파에 의해서 계획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난 25년 동안 아무 일도 펼치시지 않은 듯 보인다. 창세기에는 그 기간 동안의 그 어떤 역사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가문은 질투와 편애와 갈라짐으로 가문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문이 망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름부음도 사라졌다. 그리고 요셉의 마음에도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큰 서운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형들에게 어려움을 주려는 모습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그의 마음 상태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도 치유하셔야 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멈춘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45장에 이르러 커다란 빙하가 녹고 가족의 사랑이 극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계속 전진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대속하려는 한 사람, 유다의 마음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 분은 우리를 구속하셔서 대속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의 아들과 딸로 삼아 주셨다. 한 분이 내려오셔서 막힌 담을 헐고 휘장을 찢어주시는 그 대속으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다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그림자와 같은 사역이다. 그렇다면 왜 유다이었는가? 그는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 사람이었다. 38장에는 유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44장에는 그의 대속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그가 이 대속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는가? 그는 육신의 소욕 때문에 영성이 망가졌던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벌하지 않으셨고 그에게 오히려 기회를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아서 아비의 집으로 인도하셨다. 그의 인생에 second chance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이 죽음의 자리에서 자신을 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대속의 은혜를 베풀 수 있었다.

우리는 유다보다도 훨씬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한 엄청난 대속의 은혜를 누린 자들이다. 우리야말로 대속의 은혜로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대신 지불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 안되는 작은 빚을 용서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대속의 은혜를 받았으니 대속의 은총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가족 안에서 그 은혜를 베풀라고 도전하고 싶다. 유다는 그 가정을 살리는 대속의 은혜를 베풀었다. 가정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속의 은총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가정의 어려움들이 참으로 많다. 갈라져 있고, 분리되어 있고, 갈기 갈기 찢겨져 있는 비극이 우리의 주위에 너무도 많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실 때에 가정을 통해서 역사하겠다고 하셨다. 빛의 자녀로서의 역할은 가정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에베소서 5-6장을 보라. 부부 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들 간의 문제가 많지만 하나님은 대속의 은혜를 가정 안으로 가져 들어가기를 원하신다. Generation to Generation! 한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때부터 이 믿음이 계속 계승된다. 내 자신이 내 가정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고 상처를 치유하는 대속물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속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1)내가 대속자의 자리에 서야 한다.

14절을 보자.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오히려 그곳에 있는지라 그 앞 땅에 엎드리니’ 유다는 앞장 서고 자신을 던졌다. 18절을 보자.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종으로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고하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옵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그는 먼저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쳤다. 그는 눈치를 보지 않았다. 안창호 선생은 ‘스승이 없으면 네가 스승이 되라’는 말씀을 하셨다. 사도 바울도 ‘한 사람을 주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율법 아래 있지 않는 자 같이 행하여 그 사람에게 나아간다’는 말을 하였다. 연약한 모습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따라가며 그를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를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가족의 갈등 사이로 들어가서 용서, 사랑, 축복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cycle을 만들어야 한다. 분노와 갈등의 cycle를 중단하고 사랑과 용서와 축복의 cycle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이 먼저 해야 한다. 기다릴 필요 없다. 유다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자.

(2)내가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

밀알이 썩어져야 큰 나무를 만들 수 있다. 그것에는 엄청난 power가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다. Power가 있을 때에 군중을 움직일 수 있다. 유다의 대속은 온 가족을 움직일 수 있는 power가 있었다. 모세는 백성이 그릇 행할 때에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며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하였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움직이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온 인류의 구원을 시작하셨다. 우리 가정에서 내가 죽으면 모든 문제가 끝난다. 우리 가정에서 내가 죽으면 하나님이 역사를 시작하신다. 내가 죽으며 하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와 같다. 어려운 이민 생활에서 가정마저 찢겨지면 끝장이다. 하나님 안에서만 회복이 가능하다. 우리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없다. 왜냐하면 내일은 보장된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가정을 회복하자. 주님의 손과 발이 되고 마음이 되어서, 그 자리에서 죽고 대속물이 됨으로써 사랑과 용서와 축복의 cycle이 회복되게 하자. 
(김승옥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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