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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구제하는 성도가 되자 (잠 11: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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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하는 성도가 되자 (잠 11:24-25)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연상되나요?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요? 초대교회 당시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처럼 살았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행11:26). 그 이유는 당시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연상되는 이미지는, AD 125년 아테네의 철학자 아리스티데스(Aristides)가, 하드리안(Hadrianus, 78-138) 황제에게 보내는 글에, 잘 나타난다. “그들은 간음이나 음란하지 않고,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기부금청탁을 거부하지 않으며, 남의 소유를 탐내지 않고, 부모를 공경한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데, 서로 사랑하며, 과부를 돕고, 폭력을 행하지 않으며, 괴롭히는 자에게서 불쌍한 고아들을 구해내며, 가지지 못한 자에게 내어주되 불평 없이 내어준다. 가난한 자가 세상을 떠나면, 능력이 닿는 데까지 장례비용을 도와준다.”

  바로 이러한 삶의 특징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연상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였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미지가 연상될까요? 그 아름다웠던 이미지와 차이가 없나요? 아름다운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만들어 갑시다.

  독일 루터교회 목사님의 맏아들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1899년 철학박사 학위, 그 이듬해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앨버트 슈바이처(1875-1965)다.

  그의 앞날이 대단히 촉망되었던 신학자요, 철학자요 오르간 연주자였다. 1952년 인류의 형제애를 위한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뜻한 바가 있어, 1905년 박애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발표하였고, 마침내 1913년 의학박사가 되었다. 

  그를 돕기 위해서, 간호사 훈련을 받은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가봉(랑바레네)에 자비량 선교사로 건너가서, 선교를 하였다. 한 번은 누군가 슈바이처에게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라고 질문을 하였다.

  그러자 “나는 말로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고 대답했다. 어떤 거창한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에 대한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죽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또 사람에게, 말과 행동이 같음을 보여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말과 행동으로 전하는, 사랑의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부정적인 이미지도, 많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전도를 많이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구제를 좋아하는 사람들,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 봉사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붙여졌으면 좋겠다.

1. 왜 구제해야 할까요?

이 땅에는 가난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에 대해서, 책임 있는 사용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 땅에 가난이 존재하는 한, 구제는 계속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사명이다. 혼자 잘 먹고 살라고 주시지 않고, 없는 사람을 돌보라고 주셨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약60억의 인구가 살고 있다. 그 중 20%에 해당하는 12억이 절대빈곤층이다.  우리 가운데 자신이, 빈곤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상당히 많이 있지만, 이는 상대적 빈곤이다. 잘 사는 사람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 빈곤층은, 1달러 이하의 돈으로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해야 하면서, 생존보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세계인구 60억 가운데, 또 다른 20%인 12억은, 경제적으로 과도한 풍요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20%는 절대빈곤층이고, 20%는 과도한 풍요계층에 속한다.

  따라서 이 땅에 살고 있는 풍요로운 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 한 명만 책임지면, 이 땅의 가난은 해결된다. 그런데 가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풍요로운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풍요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나머지 약60%에 해당하는 36억의 사람들 가운데, 구제의 행위가 나타나고 있다. 이 세상은 비극적인 요소와 바람직하지 못한 요소들이 가득 차 있는, 어둠이 주관하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이 아직도 아름다운 이유는, 이웃들에 대한 사랑의 부담을 지기 원하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아름다운 사랑의 부담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한국 기독교는 이 사회를 향해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랄한 비판을 계속해서 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자선 사업가운데, 정부가 하는 일을 제외하고, 민간 기구에 의해 행해지는 자선 사업의 70% 이상이, 기독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얼마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오늘의 경제를 ‘디지털 경제시대’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식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식화 시대에서는, 부유한 사람은 더 부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 지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을 잘 사용해서, 한 순간에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시대가 될수록, 그리스도인의 구제는, 더 중요한 책임이 될 것이다.

  구제의 책임을 다하려면, 먼저 빈곤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빈곤에 대한 우리의 태도나 자세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빈곤의 원인은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적인 이유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인 이유이다.

(1) 먼저 빈곤의 개인적인 원인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① 게으르기 때문이다. 일을 열심히 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6:9)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하였다.

  (잠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살후3:10)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다. 게으름과 나태함이 개인적인 빈곤의 명백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② 부도덕한 이유로, 가난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도박하거나, 술 취하거나, 방탕, 사치, 이런 사람은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받지만,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치 않으면, 들어와도 나가도 저주가 임하게 된다고 했다.

  북한처럼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가난하게 될 수 있다. 이처럼 개인적인 부도덕한 원인들은, 뿌리는 대로 거둔다.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개인적인 원인만이, 빈곤의 모든 원인이 되지 않는다.

(2) 사회적 원인이 가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갑작스런 자연의 재앙, 기근, 홍수, 지진 등, 천재지번은 자기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재난 속에는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한 재앙도 있다.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왔다면, 사회적 책임이다.

  풍요계층의 20%의 사람들이, 이 세계 안에서 사용 가능한 자원의 80%를 쓰고 있다. 만약 그들이 조금만 아껴서 나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밝은 세상,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겠는가? 우리가 부유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사회적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구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2. 구제해야 행복해진다.

돈이 많으면 행복한가? No 돈이 없으면 불편할지 몰라도, 불행하지는 않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면 한국 최고 재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현대 그룹의 총수 정회장이 왜 투신자살했나?

  본문은 우리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구제하면 복을 받는다. 어떤 복을 받나? 복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공하는 복이요, 또 하나는 위대해지는 복이다. 구제는 이 2가지 복을 약속한다.

(1) 이 세상에서의 복, 성공하는 복을 받아 행복해 진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움켜쥐고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손아귀에 무언가 쥐어져 있어야,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은, 절대 내놓지 않으려한다.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원문은 “흩어 뿌려도 계속 증가되고, 옳은 일을 행함보다 자제하게 되면, 분명히 결핍하게 된다.”는 말이다. 구제는 옳은 일이다. 구제는 어려운 이웃에게, 내가 가진 것을 흩어 심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내 손에서 나가면, 손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손에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아끼고 아껴도 움켜쥐고 또 움켜줘도, 결코 부자가 되지 않는다. 우리 주변을 보면, 정말 아끼고 아껴서, 부자가 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베풀지 않고, 수전노처럼 아껴서 부자 된 사람은, 결코 부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졌을지는 몰라도, 늘 가난한 사람처럼 산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사고 싶은 것도 사지 못하고,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그런 사람을, 부자라고 할 수 있나?

  그렇게 애써서 돈을 많이 모아놓았더니, 자식들이 사업한다고 다 말아먹고 만다. 부모님은 먹지 못하고 모았는데, 한 순간에 자식들이 다 없애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열심히 벌어 모아놓았는데,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서 날려버리고, 큰 병이 들어서, 다 써버리기도 한다.

  아무리 아껴도, 내 것으로 남지 않는다. 내 손에 있는 것은, 절대로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내 것으로 남길 수 있나? 영원히 내 것으로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흩어 심어야 한다.

  나눔은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다. 돈을 은행에 맡겨 놓으면, 나중에 이자와 함께 되돌려 받는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나누면, 하나님의 은행에 맡김과 같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 미국의 명문 대학 가운데 하나인, 스탠퍼드 대학에 다니는 두 명의 학생이, 고학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한 번은 등록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폴란드 사람 ‘파테리프스키’를 초청해 연주회를 갖고, 그 이익금으로 등록금을 내기로 했다. 그래서 피아니스트 ‘파테리프스키’와 연주회를 한번 하는 대가로, 2000달러를 주기로 계약을 하고 연주회를 열었다.

  그런데 연주회를 마치고 계산해보니, 들어온 돈이 1600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파테리프스키에게 주기로 약속한, 2000달러도 못됐다. 두 학생은 연주회가 끝나고, 파테리프스키 앞에 1600달러 전부를 내놓고, 나머지 400달러를 빠른 시일 내게 갚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파테리프스키는, 두 학생이 연주회를 열면서 들어간 비용을 제외하고, 나머지만을 받았다. 학생들이 손해 보지 않게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받은 돈 가운데 10%씩, 두 학생에게 격려금으로 나눠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피아니스트 파테리프스키는 폴란드의 수상이 됐다.

  당시 폴란드는 전쟁의 후유증과 전염병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식량은 바닥났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이 때 수상은 미국 연방식량 구호청에, 긴급 원조요청을 했다. 폴란드 수상의 요청을 받은 미국 연방구호청장은, 즉각 수십만 톤의 식량을 폴란드에 보내주었다.

  파테리프스키 수상은, 미국연방구호청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오히려 미국구호청장이 “제가 오히려 감사하다.”며, “전에 고학할 때에, 등록금 마련을 위해 연주회를 부탁했다. 계약한 금액을 다 드릴 수 없었는데, 계약금도 받지 않았고, 격려금까지 주셨다.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있다.”

  이 연방구호청장이, 미국 제31대 대통령이 된 허버트 후버(1874∼1964)다. 한 번의 연주회를 통해 어려운 학생들에게 베풀었던 사랑이, 나중에 나라를 살리는 엄청난 대가로 돌아왔다. 우물을 퍼내지 않으면 곧 썩게 된다. 그러나 퍼내면 계속 생수가 나온다.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2) 위대해지는 영적인 축복을 받는다(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원문은 “축복하는 영혼은 풍족해지고(푸알), 남에게 물을 마시게 하면, 또한 그는 물을 마시게 된다(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복을 주는 사람은 풍족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면, 자신도 공급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된다는 뜻이다. 누가 공급해 주나? 하나님께서 하신다. 따라서 구제는 영적 축복이 있다. 구제는 경건생활에 큰 도움이 있다. 경건생활의 본질이 바로 구제다.

  경건은 구체적인 삶이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경건한 삶에는, 하늘의 상급이 있다.

  어떤 분은 이 세상에서 잘 살지만, 하늘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지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 소망이 있으니, 축복받은 사람이다. 하늘의 상급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다.

  (잠19: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면, 하나님이 나의 채무자가 된다. 따라서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베푸시기 바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값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신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해서, 우리에게 안겨주신다.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은, 하늘나라에 저축함이다. 그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하늘나라 통장을 갖고 계시나요? 하늘나라에 얼마나 가득 채우셨나요? 이 세상에 있는 통장이나 주머니는, 구멍이 뚫려 있다(마6:19-20).

  아무리 가득 채워놓아도, 좀과 동록으로 도둑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나간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우리의 통장이나 주머니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넘쳐나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란다. 성공하는 복과 위대해지는 복이 있기를 바란다.

  추수감사절은 1년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절기다. 우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잘 견뎌왔다. 많은 것을 누리게 하셨다. 따라서 이제 나눔을 통해, 더 큰 감사와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기 원한다. 우리교회는 언제나, 절기 헌금을 나눠왔다. 나누는 사랑 속에, 우리의 기쁨과 감사는 더욱 커진다.

  우리의 진실 된 나눔은, 하나님 예금통장에 적금 드는 일이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것을 나누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할 때, 더 놀라운 축복으로 되돌려 주신다. 눈덩이를 굴릴수록 점점 커지듯, 사랑과 정성도 나누면 나눌수록 더욱 커진다. 이런 축복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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