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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잃어버린 은전을 찾아 (눅 1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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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은전을 찾아 (눅 15:8-10)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되는 해외입양아 이야기가 방송국을 통해 방영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미국으로 입양된 문훈이라는 28살의 청년이 18년 전 헤어진 할머니를 재회하는 장면, 눈물 없이 시청할 수 없었습니다. 문훈 군은 간난아이가 아닌 10살 때 입양되어 갔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많은 부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동네 가게, 살던 집과 할머니와 함께 잤던 방, 그리고 텔레비전의 위치까지 더듬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들, 자주 장난치며 놀던 여자 친구 모두 마중 나왔는데, 다 알아보았습니다. 

훈이 청년은 어머니를 늘 구타하던 주벽 심한 아버지에 대한 쓰라린 기억. 자신을 혁대로 자주 때리던 아버지에 대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견디다 못해 가출해버린 어머니에 대한 슬픈 기억을 술회하였습니다. 유난히 차갑고 쓸쓸했던 그 시절, 넓은 치마폭으로 꼭 감싸 안으시곤 했던 할머니. 겨울 김장철 겉절이 제일 먼저 입에 넣어주셨던 할머니. 그 때의 훈이로서는 안기고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무서운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한 고아원에 넘겨졌고 결국 미국으로 입양되어 간 후 할머니와는 다시 만날 수 없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이해할 수 없는 충격과 함께 보낸 훈이의 18년 미국 생활, 할머니는 내내 그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마침내 할머니를 찾아 만나야겠다고 훈이 청년은 방송국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할머니와 만나기 직전, 프로그램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훈이 청년은 외칩니다. 크게 그것도 아주 크게, 그동안 사무친 모든 그리움 담아 소리칩니다. “할머니 훈이예요. 할머니 사랑해요.” 외치고 또 외칩니다. 그러자 저 곳에서 할머니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립니다.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웁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저도 창피한 줄 모르고 웁니다. 할머니 눈물 속에는 손자 떠나는 것 막지 못해 생긴 통한과 죄책감이 어려 있습니다. 훈이의 눈물에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으면서 칼질당한 상처와 인종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멍들어야 했던 숱한 세월의 정체성 위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기억 속의 그 할머니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는 감격도 함께 용해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 자리에 무서웠던 아버지도 용서를 구하며 나타났다면, 가출했던 어머니까지 돌아오셨다면, 너무나 아름다운 한 장면이었겠다 싶습니다.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 상실된 아름다웠던 관계의 회복! 참으로 오늘 추수감사절에 드릴 수 있는 감격스런 감사 제목 중 하나입니다.

다시 만나 기뻐한다는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지만, 누가 버렸고 누가 먼저 찾아 나섰는가 하는 점에서는 훈이 청년 이야기와는 전혀 반대 내용이 오늘 말씀 속에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개의 드라크마, 즉 은전을 되찾아 기뻐하는 한 여인의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인이 소지하고 있던 열 개의 은전 중 하나를 잃어버립니다. 팔레스타인 땅 소작 농부들의 집은 낮에도 등불 밝힐 정도로 어둡습니다. 창문이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아주 작은 창문 하나 있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진흙으로 된 바닥에는 건조된 갈대나 풀이 덮여있습니다. 그 어두움 속으로 은전이 사라진 것입니다. 때문에 은전을 되찾는다는 것은 마치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는 것 같이 어려운 작업입니다. 방안에 있으니 언젠가는 되찾겠지 하는 마음으로 웬만하면 다들 포기합니다. 

하지만 그 은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 여인에게 있습니다. 은전 한 닢은 당시 하루 일당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로마 화폐로는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부자들에게야 분실해도 크게 아깝지도 않고 쉽게 포기될 수 있는 은전 한 닢입니다. 하지만 그 날 벌어 그 날 연명해가는 가난한 날품팔이 소작농들에게 그 가치는 대단합니다. 하루 종일 땀 흘리고 뼈 빠지게 일해야만 받아 쥘 수 있는 은전이니 얼마나 아까운지. . .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캄캄하고 아찔합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가능합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결혼한 가정주부는 은전 열 개를 연결해서 머리에 장식품으로 얹었다고 합니다. 이 장식품에 쓰이는 은전은 흔히 약혼식 때 신랑으로부터 받는 선물입니다. 때문에 가정주부의 머리에 얹힌 아름다운 장식품은 바로 부부간의 정표에 해당됩니다. 남편을 향한 아내의 사랑과 헌신의 표시인 셈이지요. 그 중 하나가 그만 어두움 속으로 떨어져 나간 겁니다. 이제 나머지 아홉 개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정표로 받은 물건은 온전할 때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설혹 열심히 일 해서 은전 하나를 다시 꿰맞추어놓았다고 해서 그것이 약혼의 영광스런 정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정표라고 하는 것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없습니다. 반드시 찾아야합니다.

너무나 소중한 그 은전 되찾기 위해 여인은 등불을 켜듭니다. 어두운 방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바닥 구석구석 쓸어가며 샅샅이 찾아다닙니다. 은전이 어두운 바닥에 잃어버려져 있는 동안에는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은전 찾는 일이 여인에게 최우선입니다. 여기에 숨어 있나, 혹시 저기에서 나오려나? 모든 신경은 온통 은전 되찾는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은전은 여인의 손에 기필코 되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자리를 여러 차례 쓸면서 맴돌기도 했을 겁니다. 힘든 것도 피곤한 것도 모른 채 샅샅이 살핍니다. 집요한 수색 작업 끝에 바로 그 은전, 이 여인 눈에 쨍 발견됩니다. 방 한쪽 구석 건초 더미 밑에 숨어 있다 등불 빛 받아 반짝거리는 은전! 미아가 된 아들, 꿈에도 그리던 그 아들 되찾은 심정으로 여인은 미칠 듯이 기뻐합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되찾은 은전 꼭 거머쥡니다. 친구들하고 이웃까지 불러 잔치 벌일 정도로 과연 그 은전은 여인에게 각별합니다.   

잃어버린 은전을 찾아 나선 팔레스타인 여인의 이야기는 사실 우리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수님 말씀 들으며 우리도 한 때 영광스런 자리에서 이탈하여 흑암 속으로 떨어져 내린 적 있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해외입양아처럼 부모의 버림 받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등졌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인정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여 하나님 품에 안겨, 하나님 사랑 누리고, 하나님 전심으로 예배하며, 하나님 섬겨야할 그 자리로부터 추락하여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인생을 살았던 것이지요.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목적의 과녁에서 빗나가 영적 암흑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어두움 속에서는 우리들이 하나님께 잃어버려졌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하나님의 솜씨와 사랑이 새겨져 있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지도 몰랐습니다. 여전히 무언가에 굶주리고 무언가가 부족한 듯 자꾸만 다른 그 무엇으로 내 삶을 채워 넣고 치장하려고 했습니다. 그 땐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면 행복이다 싶어 부단히도 몸부림쳐댔습니다. 욕망하던 것 쟁취했을 때 금방 좋아라하고 뻐겼습니다. 하지만 집착하던 것 놓쳤을 때, 지나칠 정도로 풀 죽고 좌절했습니다. 마치 행복이란 것은 잠시 있다 사라질 그런 것에 달려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행복이 우리의 소유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참 행복은 우리의 신분에 달려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떠한 존재인가 제대로 깨달을 때 다가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선 이미 우리 자신이 귀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은전처럼 도무지 값 매길 수 없는 하나님의 정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격표 붙여 팔아치우는 상품 아니라 하나님 형상 아로 새겨진 하나님의 고귀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가난하고 비천하다고 할 찌라도, 우리가 아무리 아프고 힘없다 할 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아직도 잃어버려진 영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가족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아직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직장 동료가 있습니까? 그분들도 하나님께는 소중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한 이웃이 있습니까? 참으로 소중한 영혼들입니다. 심지어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이라고 할 찌라도 하나님께는 여전히 소중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잃어버려진 채 방치하지 않고 되찾고자 힘쓰시는 하나님 마음도 보여주십니다. 등불 켜들고, 건초더미 헤집으며, 바닥 쓸고 다니는 여인의 모습에서 창세기 태초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지금도 듣게 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에 숨어 있느냐? 나는 너를 되찾기 원한다.” 스스로 하나님 등지고 하나님 피해 숨어버린 우리 모두, 여전한 사랑으로 찾아 나서신 하나님! 해외입양아 훈이 청년이 길러주신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사랑하여 먼저 찾아 나선 것과 달리,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피해 어두움 속에 숨어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가도 아깝지 않게 지불하셨습니다. 여러분,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을 되찾기 위해 그 아들 예수님 생명까지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할 그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시도록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님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롬 5:8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마침내 우리를 발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이 떠날 정도로 기뻐하셨습니다. 9절 말씀에는 “찾아내었노라”라는 유레카란 헬라어가 사용됩니다. 유레카는 주전 3세기 저 유명한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데스가 사용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그는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은이 섞여 있는 지 밝혀내라는 왕의 부탁으로 고심하다가 목욕탕에 몸을 담그게 됩니다. 그 때 물이 넘쳐나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맨발로 뛰쳐나가면서 외친 바로 그 단어가 “유레카”입니다. “내가 간절히 찾던 그것을 내가 찾아내었노라, 유레카, 유레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다시 찾았을 때, 벗은 발로 달려와서 와락 껴안으며 “유레카 유레카 내가 간절히 찾는 나의 아들을 다시 찾아내었노라” 외치셨습니다.

잃어버린 은전 다시 찾았을 때 이웃과 친구들을 초청하여 잔치 벌이는 9절 장면처럼, 우리가 하나님 없이 흑암 중에 쓸쓸이 살아오다가 하나님 품에 안길 때, 천국에선 기쁨의 잔치(banquet)가 열립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회개하고 예수님 영접하여 하나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는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우리를 꼭 붙들어주고 계십니다.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기 위해 찾아 나서고 계십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는 세례식을 베풉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꾼 소중한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발견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찾으시던 영혼들을 찾아내신 겁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 천국 기쁨에 참여하십시다.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한 가족 되신 분들을 진심으로 축하하십시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십시다. 그리고 이 추수감사절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로 인해 기뻐하고 계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이장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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