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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꿈이 인생을 결정한다 (창 4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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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인생을 결정한다 (창 42:1-25)

I. 꿈의 크기는 인생의 크기였다

한 양치기 소년이 노예로 팔려갑니다. 의롭게 살려다가 죄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지요. 임금의 마음을 사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임금이나 가지고 있을 수 있던 어인을 받고 세마포로 만들어진 총리 복장으로 단장하고 금사슬로 계급장을 달고 최고급 승용차를 하사 받아 각료들 앞에 등장하니 "어이! 총리 납신다. 엎드리라!" 큰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집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을 지난 시간에 보았습니다. 일반 역사극이나 드라마를 보면 이처럼 꿈을 이루었다. 이 드라마는 끝을 맺게 되겠지요. 팔등신 미인 아스낫과 나일 강변에서 결혼식을 화려하게 마치고 달콤한 키스신이 연출되어집니다. 카메라맨이 휘감아 돌며 드라마는 막을 내립니다. 스텝들과 함께 온 출연진들이 박수를 치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으로 이 극은 막을 내리겠지요.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이 요셉의 사건은 고난의 터널을 빠져나온 한 개인 요셉의 성공담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 속에서 요셉이 어떻게 쓰임받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총리가 된 성공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한 구원공동체가 건국되기 위해 야곱의 75인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그 못난 열한 형제들도 모두 12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다르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품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쓰지 못할 인물이 없습니다.

지난 41장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십니까?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각 국의 백성들이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 본문 42장 문이 열리면 요셉의 열명 형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 땅까지 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 앞에 열명의 형들이 엎드려 절합니다. 눈앞에 위엄있게 앉아 있는 그가 요셉이란 걸 알 길이 없지요.

보세요. 요셉을 포함한 열 한 형제 똑같이 양치기 야곱의 아들로 태어나 한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요셉의 나이 17살에 헤어져 20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요셉의 나이 37살을 넘어설 무렵입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20년 만에 만나보니 요셉과 다른 열 형제들 그 차이가 너무나 엄청나게 커져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애굽의 총리입니다. 다른 열 형제는 여전히 양치기로 살아갑니다. 더구나 먹을 것이 없어 양식을 사러 온 상인, 허나 반 거지행색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환경적인 차이나 신분의 차이보다도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셉의 무르익은 성품, 빛나는 인격, 지금 세계적 경제공항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요셉의 지도력에 비해서 여전히 서로 원망하고, 문제를 다룰 줄 모르는 초라한 인격들, 우왕좌왕하는 리더십 너무나도 큰 간격이 보입니다.

무엇이 이토록 큰 차이로 만들었을까요? 꿈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를 만든 것입니다. 똑같이 문제 많은 콩가루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습니다. 고난과 시련의 험산계곡을 지나며 자신을 다듬어 왔습니다. 그러나 열명의 형제들은 요셉의 꿈을 시기하고 악한 계획을 세우고 거침없이 악을 행했습니다. 20년 만에 만나보니 하늘과 땅 만큼이나 그들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씨앗 중에 제일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그러나 꿈의 씨앗은 겨자씨보다도 더 작습니다. 꿈을 꿀 때는 그 씨앗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라고 또 자라다 보면 그 차이는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은 남의 꿈을 찢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20년 만에 만나보니 찢은 것은 요셉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찢겨진 것은 요셉의 채색옷이 아니었습니다. 그 형들 자신의 인생을 찢은 것이었고 자기 믿음과 자신의 꿈을 찢은 것이었습니다.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얼마만큼 행복한 꿈을 간직하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꿈이 인생의 방향, 크기, 인생의 색깔, 가치, 의미, 태도...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좋은 꿈은 자기 자신이라는 담을 넘어 자기 가족, 자식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교회공동체에 크나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나라와 민족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20년 만에 만났던 열 한 형제 이제 한 명제, 한 결론이 가능해졌습니다. 꿈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였습니다. 꿈이 인생을 결정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꿈이 인생을 결정한다」입니다.


II. 독수리와 병아리

흔히 듣던 얘기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양계업자가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워 달걀과 함께 부화를 했더랍니다. 그랬더니 독수리가 자신이 독수리인 것을 알지 못하고 어미 닭을 쫓아다니며 먹이를 쪼아먹고 있었습니다. 양계업자가 독수리를 날개하기 위해 담장 위에 얹어 놓아도, 지붕 위에 올려놓아도 비틀비틀 거리다 떨어지곤 했습니다. 이 독수리를 하늘 창공으로 솟아오르게 하기 위해서 높은 절벽위로 독수리를 안고 올라갔습니다. 마침 절벽 위를 날으는 독수리 떼가 보였습니다. 그 독수리를 보여주며 "얘야, 너는 독수리란다." 벼랑을 향하여 집어 던졌습니다. 처음에는 비틀비틀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듯 보이더니 곧바로 날개를 쫘~악 피고 캬악~ 소리치며 창공을 솟아올랐습니다.

자기를 독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병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42장 1절 흉년이란 위기 상황속에서 야곱의 자식들이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그림처럼 보여집니다.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넋이 나간 사람들처럼 속수무책 서로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우유부단한 성격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기근이란 문제 앞에서 문제만 묵상하고 있습니다. 가족에 밀어닥친 문제에 압도당해 있었습니다.

이 기근 속에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숨어 있음을 요셉을 통해 보여주었지요. 그 가족에게 꿈을 주었습니다. 곡식 문제로 큰 일을 행하실 것을, 흩어진 가족이 만나게 될 것을, 애굽으로 들어가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게 될 것을 이미 하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알 길이 없었던 야곱과 열 형제, 병아리 새끼들처럼 아버지 그늘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만 보고 있느냐" 그저 바라만 보고 있네.

반면 꿈꾸는 독수리 요셉을 보십시오. 늘 꿈을 먹고살았습니다. 성경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다가오면 그것을 내 꿈으로 붙들었습니다. 소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기도해서 꾼 꿈에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었습니다. 늘 문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과거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고 원망하고 원수를 묵상하고 분노를 품고 살지 않았습니다. 요셉 하나가 없는 야곱의 집안은 병아리 가족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열명의 형제들 아버지의 책망을 듣고 내 몰리듯 애굽으로 봇짐 싸고 떠나게 됩니다.


III. 요셉이 꿈 꿈을 생각하고

하나님은 지금 기근을 통하여 요셉의 형들을 요셉 앞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형들이 애굽까지 왔지만 요셉을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애굽은 대단히 큰 나라입니다. 양식 판매는 애굽 전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창고지기가 아닙니다. 양식을 사러온 걸인 행각들을 만날 수 없었겠지요. 전체를 관리하는 총리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열 형제가 요셉 앞에 오게 되었을까요? 틀림없이 이때쯤 자기 가족들이 애굽으로 쌀 사러 올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무역, 아니면 적어도 가나안에서 오는 상인들은 요셉 자기 앞으로 직접 데리고 오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 분명합니다.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 이제 클라이막스, 절정의 순간입니다. 드디어 형들이 요셉앞에 끌려와 6절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별 생각없이 큰 권력을 가진 애굽의 총리에게 왔으니 땅에 엎드려 절했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요셉이 형들을 알아보고 옛날에 꾼 꿈을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외에도 형들이 엎드려 절한 장면들이 창43:26, 28, 44:14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즈음에 성질 급한 독자들은 요셉이 살려달라 애원해도 요셉을 죽이려 하고 외국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버린 인정없는 형님 놈들, 시원하게 복수라도 해줬으면 속이 후련하겠다. 인터넷을 통하여 작가를 다그치겠지요. 복수해라. 복수해라. 그 중에 몇 놈 죽여라.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차분하게, 지혜롭게 이 사건을 대처해 나가고 있습니다.

복수 따윈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형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인가? 양식을 넉넉하게 싸서 아버지 곁으로 보내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려웠겠습니까? 남은 식구, 특히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을 어떻게 이곳으로 데리고 올 수 있을까? 앞으로 7년이나 흉년은 계속될 것인데 어떻게 사랑하는 내 가족을 이곳으로 인도하여 살릴 수 있을 것인가? 부족한 나를 통하여 펼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꾼 꿈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 순간 어떻게 이루어 가야 할까? 요셉은 진지하게 이 사건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이게 요셉이란 인물의 됨됨이입니다. 총리로 지명받고 그 향연이 계속되고 있을 때에 이제 꿈이 이루어졌구나 하고 부귀영화에 도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살피기 위해 안락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총리가 되는 것이 꿈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 섬기는 것, 나라와 세상을 살리는 것이 목적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사브낫바네아다. 내가 세상을 살린다. 요셉은 자신이 살아온 목적과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성공과 성취가 있다고 너무 쉽게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성공은 위기일 수 있습니다. 성공 자체가 목적인 줄 알고 너무 쉽게 허리띠를 풀고 성공에 눌러앉아 본래 사명, 본래 목적, 초심을 잃어버리는 삼류 졸장부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성공과 권력, 움켜쥐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손을 펴고 나누고 섬기라고 준 것입니다. 권력은 움켜쥐면 주먹이 되고 힘이 되어 사람을 다치게 됩니다. 그러나 주먹을 펴면 사랑의 보자기가 되어 아픈 사람을 감쌀 수 있는 것입니다. 성공은 높은데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자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낮은데로 내려가는 것임을 요셉은 알았습니다.

존 번연은 "가장 낮은데 있는 자는 떨어질 염려가 없다"고 했습니다.

슈바이처는 노벨 평화상을 받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수많은 신문기자들이 슈바이처를 찾아 나섰습니다. 특등실을 뒤쳐도 1등실 2등실을 다 뒤져도 슈바이처는 없었습니다. 마지막 복잡한 3등실 한쪽 모퉁이에서 슈바이처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묻는 기자들에게 "3등실 보다 더 아래는 없던데요?"라고 얘기했습니다.

요셉은 총리직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 땅을 순찰하며 내려갈 줄 알았습니다.

요셉이 꿈을 붙들고 살아온 것 같지만 꿈이 요셉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내가 기도를 붙들고 살면 내가 기도를 붙잡은 줄 알았는데 기도가 나를 붙잡아 줍니다. 내 삶은 시시한 삶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사브낫바네아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가는 영광스런 삶이다. 요셉은 자기 선언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아무렇게나 살아간 존재가 아니다. 나를 통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자기 선언이 확실했습니다.


IV. 꿈을 다치게 하지 마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쩔쩔매는 형들을 보며 요셉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형님들 제가 요셉이예요." 보라는 듯 자기를 밝히고 자랑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빨리 쌀을 실어보내 아버지와 동생 베냐민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동생의 안부가 얼마나 궁금했을까요? 고향 땅의 소식은 얼마나 듣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순간입니다. 자기 감정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꿈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차분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숙련된 의사처럼 형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이미 형들을 용서한지 오래전 일입니다. 형들의 죄책감을 치료해야 됩니다. 수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친 얼굴과 언어로 형들을 대하고 감옥에 넣기도 하고 협박으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이것은 바로 숙련된 의사의 손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동생의 신변을 파악하기 위해서 노련한 수사관처럼 행동했습니다.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기도 하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통해 모든 고백을 끄집어냅니다. 심지어 요셉 자신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까지를 토설케 합니다. 13절 "그들이 이르되 당신의 종 우리들은 열두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나아가 경험 많은 전략가처럼 행동합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 7년 대흉년을 면케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장차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세워질 것이고 열두 명의 형제들이 열두 지파를 만들어 출애굽을 하겠지요.

지금 빈자루에 양식을 채워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들의 빈 가슴에 하나님을 채워주고 하나님의 말씀과 승리를 채워주고 싶었습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꿈이 얼마나 정확하게, 얼마나 섬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서투른 동정과 어설픈 감정으로 하나님이 주신 꿈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네 꿈이 너무 소중하다. 티끌만큼도 다쳐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다. 그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너의 꿈이 소중하냐 꿈을 다치게 하지 마라. 네 꿈이 귀하냐 꿈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V. 꿈꾸는 자의 마음은 따뜻하다

거친 세상 한복판에서 거칠게만 살아왔던 요셉입니다. 그의 마음 밭은 상처로 얼룩진 가시밭 같았을 것 같은데 지금 따뜻한 온기가 한껏 느껴집니다. 요셉은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청년시절을 보내며 잔인하고도 차가운 대접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의 마음 밭이 얼음장이 되어 있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마음을 복수심으로 원한으로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지켰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이것이 성공이요 승리임을 알았습니다.

형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동생 베냐민에 대한 그리움이 속속 베어있습니다. 창세기 42장 본문에서 베냐민을 지칭하는 말이 대명사까지 합치면 16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통역을 세워 심문을 하는데 형들이 히브리말로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요셉은 다 듣지요. 자신이 형들에게 매달려 애걸하던 상황을 형들이 말하자 요셉은 그 방을 뛰쳐나가 엉엉 울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43장에서는 동생 베냐민을 보고 웁니다. 45장에서는 큰소리로 웁니다. 방성대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꿈꾸는 자 요셉에겐 눈물이 있었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종살이 하면서도 감옥에서 엎드려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눈물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눈물은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아픔을 치료해 줍니다. 눈물은 영혼을 맑게 해 줍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해 우는 눈물, 감사해서 우는 눈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우는 눈물이라면 더욱 아름다운 눈물입니다.

꿈을 이루는 자는 마음이 따뜻합니다. 소위 감성지수가 높습니다.
감성지수란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인식하고 좋은 방향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감성지수란 타인의 감정도 잘 이해하고 함께 감정을 나눌 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감성지수란 자신과 타인 그리고 공동체를 행복하고 기쁜 방향으로 동기부여해 주는 능력을 말합니다. 요셉을 비롯한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요.
당신의 꿈이 당신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한 꿈을 꾸고 계십니까? 그 꿈을 꾸며 꿈을 생각할 때마다 행복하십니까? 당신의 행복한 꿈은 가족을 살립니다. 이웃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 꿈은 주변의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것입니다.


VI. 결론: 연금술사

브라질의 파울로 코엘료가 쓴 책 가운데 베스트 셀러 「연금술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꿈을 찾아 떠나는 주인공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의 흥미진지한 모험을 그린 책입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꿈은 하늘로부터 온다. 좋은 꿈을 꾸고 살면 온 우주가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준다. 진정한 연금술이란 쇠덩어리를 금으로 바꾸는 신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잘 다듬어 멋지게 이루는 것 이게 연금술이다. 꿈의 연금술사가 인생의 연금술사입니다. 여러분 꿈의 차이가 인생의 차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꿈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꿈의 질적인 차이가 인생의 질적 차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꿈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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