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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대하 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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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대하 34:1~7)

인기 있는 작가 공지영이 쓴 「수도원의 기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유럽의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자기 신앙에 나타났던 상처와 흔적을 고백하며 자신의 신앙이 얼마나 부족했는지에 대해서 썼습니다. 자기 신앙의 여정을 그려놓은 글 중에 미국의 골프 영웅이었던 할 서튼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할 서튼은 미국 PGA골프 우승자였고 라이더스 컵 우승자였습니다. 그는 미국 남부 석유재벌의 아들로 태어나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고, 25살에 전 미국 골프대회를 휩쓸었습니다. 그 후 10년간 3번의 이혼경험을 했고 한때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재기하면서 인터뷰를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생에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35세를 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나는 빠른 차가 있으면 행복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쉐를 샀습니다. 그 다음엔 집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비행기가 한 대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한 대 샀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내가 깨달은 것이 있는데 행복은 결코 돈으로는 살 수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용하면서 공지영 씨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소설가만 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설가가 되어 좋은 소설을 써서 유명해지기만 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고, 생활비를 다 쓰고서도 통장에 잔고가 100만원 이상만 있으면 행복할거라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읽고 팔리게 되어 자고나면 통장으로 수 천 만원의 인세가 들어왔습니다. 또한 그렇게도 사람이 그리웠는데 자기와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 때 그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소유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쉬운 깨달음 하나 얻기 위해서 청춘과 상처를 지불해야 했다.”

그는 이 사실을 스스로 잘못 한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괴테의 말대로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다.”

많은 것을 갖고도 그것이 왜 내게 주어졌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사명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좋은 것, 그 많이 가진 것, 그 누리는 모든 것이 나를 결코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소유물이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영혼이 결코 기뻐 뛰놀 수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때 주어진 소유물은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이 소유한 사람, 삶의 축복인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반대로 가난해서, 환경이 열악해서 힘들어할 때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마음속에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을 남의 탓, 환경 탓, 부모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게 이런 어려움을 주었다고 분노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 마음속에는 “만약에” 라는 헛된 생각이 있습니다. 늘 가정법에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좋은 부모를 만났더라면... 만약에 내가 돈이 많았더라면... 만약에 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현실은 전혀 아닌데 마음만을 가지고 공상하고, 현실 속에서 떨어져서 혼자 탓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저는 ‘만약에’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어떻게’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만약에’를 생각하는 사람은 역경, 실패만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그 사람이 나를 이렇게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좀 다르기만 했더라면, 내게 자본이 좀 더 많았더라면...’ 이렇게 핑계만을 계속 늘어놓게 됩니다. 나는 문제가 있을 때 내 탓이라고 말하지 않고 남의 탓이라고 변명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만약에’라고 하는 생각을 지워버리기로 했습니다. 이제는 이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려 합니다.”

우리가 때로 힘들고 어려울 때 ‘만약에’라는 가정법을 쉽게 머리에 떠올립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가정법은 끊임없는 핑계를 만들고, 현실을 도외시하고 다른 세계 속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게 되고,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게 됩니다.
 
이런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을 빗대어서 ‘그 사람은 핑계 댄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가 책임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둘째,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32세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셋째, 좋은 지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오지에 말단 수비 장교로 이리저리 맴돌았다.
넷째,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당했다.
다섯 번째,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말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여섯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 진 후 47세에 제독이 되었다.
일곱 번째,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말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23번 싸워서 23번 이겼다.
여덟 번째,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하지 말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로를 빼앗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아홉 번째,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12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무찔렀다.
열 번째,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20살에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열한 번째,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이것은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생각하면서 만들어 놓은 글입니다.

“나는 어느 순간에도 핑계대지 않았다. 여건이 나쁘다고 내게 문제가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오해한다고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결코 핑계대지 않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서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드렸다.”

이 시대는 핑계 대지 않는 사람, 자기의 길을 성실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 기다려지는 시대입니다. 또한 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며 자기의 삶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먼저 핑계 대며 다른 사람 탓하고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픔이 우리의 시대를 이렇게 어렵게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왕 요시야는 여덟 살 때 왕위에 올라 31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갔던 유다에 신앙부흥과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그를 하나님께서 칭찬 하시며 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요시야는 비록 왕이었지만 결코 행복한 출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상처를 가슴에 품고 왕위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고, 신하들에 의해서 아버지가 처참하게 배신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반역과 배반의 아픔을 너무 어릴 때 경험하면서 여덟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또한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 우상 숭배하는 폭군적인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그런 교만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이런 위기적인 경험을 겨우 여덟 살 때 겪었기 때문에 요시야의 마음에는 분노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덟 살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옳고 그름을 판단이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마 왕위에 오른 그는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자기 아버지를 배반한 신하들이 자기를 왕으로 세웠으니 불안했을 것입니다. 어디에다 마음을 두어야 할는지 몰랐습니다.

이런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요시야가 어떻게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는 결코 자기 신하들을 향해 언젠가는 복수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나이 탓을 하면서 폭음과 음란으로 빠져들지도 않았습니다. 환경 탓을 하면서 한 맺힌 분노의 칼을 갈지도, 더 잘못된 악의 자리로 나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여덟 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는 8년 후, 청소년기에 굉장히 고통스럽게 이리저리 흔들렸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8년 후인 열여섯 살 때에 하나님을 비로소 찾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나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6년 후인 스물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대대적으로 성전을 새롭게 수리하고 수축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되면서 종교개혁을 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다는 회개를 하면서 자기의 민족 전체의 정신적 세계를 개조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룩했습니다. 그는 당면하고 있던 위기를 누구에게도 핑계대거나 변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탄식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린 아이처럼 우습게 여길 것인가에 대해 결코 위축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바울도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디모데야, 네가 나이가 어린데 사람들에게 조롱받고 무시당하지 않도록 네 스스로 하나님 말씀에 견고하게 서라.”

나이 때문에 무시 당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나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이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과 생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요시야는 어린 탓, 환경 탓, 부모 탓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는 마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요시야가 갖고 있었던 어려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타락한 시대에 태어났고 그것을 보면서 자라났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우상숭배였고 악을 행하는 부패의 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런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분들을 보면 정말 축복해 주고 싶습니다. 그런 분들은 다 나름대로의 힘들고 어렵고 아픈 사건이 있습니다. 그 때 그분들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나아갔던 역사의 사건을 경험한 아주 소중한 분들입니다. 때로는 남편이 안 믿어서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교회로 초청하고, 부모님이 안 믿어서, 주변의 사람들이 안 믿어서 혼자 고통 받으면서 신앙의 자리에 들어온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귀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요시야는 결코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우상 숭배자였고 보이는 것 모두가 우상숭배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가 태양신들, 아세라신들, 바알신들 같은 우성들을 다 쓰러뜨리기 시작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환경보다 더 큰 하나님, 환경을 바꾸는 하나님의 의지를 눈여겨보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십니까?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리가 되었다고 마음속에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서 고통 받았던 분들이 있습니까? 세상 일이 잘 안되어서 애통하며 슬퍼했던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축복의 길을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하나님의 축복의 길을 깨달아 모든 책임을 부모님의 탓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나이가 들면서 부모님의 탓이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는데, 젊은 분들은 아직도 종종 부모 탓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자신의 부모가 비록 훌륭하지 않았지만 부모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가올 때 요시야가 갖게 된 삶의 모습이 무엇이었을까요? 생각의 전환입니다. 그의 삶의 역할 모델을 바꾸어 새로운 역할 모델을 찾게 되었습니다. 여덟 살에 왕위에 오르고 8년 후인 열여섯 살에 그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고”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요시야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가 다윗의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역할 모델이 필요합니다. 역할 모델은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가정을 꾸미는 주부에게 가정 살림을 잘 한 역할 모델이 있으면 훨씬 좋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업을 잘 해서 성공한 사람의 역할 모델이 있으면 주어진 자리에서 새로운 역할들을 더 성숙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자기 전공 분야의 역할 모델이 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다윗을 역할 모델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간 다윗,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한 다윗, 하나님을 사랑한 다윗,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다윗, 잘못했을 때 회개했던 다윗을 자기의 역할 모델로 삼으면서 자기 인생의 개혁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생을 독자적으로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영향력을 받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존경할 만한 역할 모델을 간직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도 늦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성숙한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요시야가 갖고 있었던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중요하지만 그는 다윗보다 더 중요한 분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보면서 그는 자기의 삶에 큰 전환점을 갖고 변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어떤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위인전을 읽으라고 왜 권면할까요? 때로는 자기 인생을 고통 속에서 이겨낸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으라고 왜 권면할까요? 중요한 역할 모델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삶의 현장을 방문하는 것도 역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농촌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고통 받는 세계 곳곳의 선교현장에 가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있으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현장의 사람들이 어떤 속에서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 나갔는가를 듣고 보고 읽어야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모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경험을 못하였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며 참된 선생님인 것을 깨달으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꿈을 가진 사람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핑계 대는 것을 멈추게 됩니다. 믿음은 나를 변화시키고 환경을 변화시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역할 모델이 있습니까? 왜 우리의 인생을 여기까지 오게 하셨는지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때로 너무 핑계를 많이 댈 때가 있습니다. 없어도 핑계대고, 있어도 감사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으로 감사하게 하시고, 없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마음속에 찾은 요시야 왕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변해진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우리 자신과 교회와 민족의 역사가 변화되는 축복을 볼 수 있게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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