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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사마리아인의 믿음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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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눅17:11-19
제목 : 사마리아인의 믿음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추수감사주일은 ‘수장절’에서 그 기원을 찾습니다. 수장절은 한해의 수확을 마친 뒤 곡식을 창고에 저장하면서 지키는 절기입니다. 특히 절기를 지키는 동안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에서 장막을 치며 어렵게 보내던 삶을 추억하며 똑같이 장막을 치며 지킵니다. 그래서 수장절을 보통 ‘장막절, 초막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수장절은 유월절, 맥추절과 함께 유대인의 전통적인 절기로서 한해를 마무리하는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지키는 의미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주일을 오늘 11월 셋째주일로 정하여 지키게 된 역사적인 유래는 미국의 청교도에 의해 시작된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건너온 청교도들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얻은 한해의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예배로 드린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정부가 추수감사절로 공포하여 미국은 해마다 11월 이번 주를 추수감사절로 지키면서 우리의 설날과 추석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선교사들이 대부분 미국선교사들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교회도 이것이 전례가 되었고, 한국교회가 오늘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면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감사는 그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은 것도 믿음 때문이고, 어려운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은 것도 믿음 때문이며, 한해의 수확을 하나님께 먼저 바친 것도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곧 감사이고, 감사는 곧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만큼 감사하고, 감사가 풍성한 사람일수록 믿음이 돈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귀한 주일에 역시 우리는 믿음을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을 끝내고 이제 복음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믿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에 나타난 사마리아인의 믿음입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사람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에 이 사람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 했다고 강조합니다. 여기 사례는 곧 감사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이 사람의 믿음은 오직 감사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그의 온 믿음을 감사로 말하고 있을까요? 그의 감사는 어떤 감사였을까요?

  첫째는 주님을 만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본문은 열 명의 문둥병자가 주님을 만난 것에 대한 감격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다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오히려 주님에 대하여 관망하고 때론 비난하고 책잡으려고 했던 시대였습니다. 또한 주님을 만나려고 해도 만나기가 그리 쉬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주변에서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뚫고 가까이 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가 문둥병자입니다. 당시 문둥병자는 마을과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던 사람들이기에 더욱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나는 소위 타이밍이 잘 맞아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예수님이 3년 동안 주로 사역하던 활동무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북쪽 갈릴리 지방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은 3년 동안 꼭 세 번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갈릴리를 통한 사마리아로 말하는데 이 길은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입니다. 그래서 더욱 만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기 사마리아인이 주님을 만나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극적으로, 기적적으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것에 대한 감사가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것입니다. 바로 그것으로 인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감사가 필요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의 감사에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바로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것에 있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감사의 조건이 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대부분의 편지에서 이것을 늘 간증합니다. 자기 인생에 주님을 만난 것이 평생 간직할 은혜라고 강조합니다. 주님을 만난 것이 은혜 중에 은혜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을 만나면서 시작되었고, 모든 성공과 승리는 주님을 만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동일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은혜이고, 기적 중에 기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내 인생에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받아드렸고, 주님과 더불어 한 평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주어진 인생을 마치면 하늘나라로 나를 이끌어서 거기에서 영원히 주님과 더불어 살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셨고,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셨고,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가 먼저 감사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 이 뜻 깊은 추수감사주일에 내가 주님을 만나, 지금 내가 여기에, 지금 이 순간까지, 여기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사람대접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여기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주님이 자기를 그야말로 사람대접해 주신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이지만 사람대접 받지 못할 여러 정황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18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그는 여기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사랑과 관심에서 사라진 자들입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유대인의 잘못된 우월의식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더 주님은 이방인을 가까이 하셨던 것을 봅니다. 이방인도 사람이요, 이방인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이 이방인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대접을 받기가 힘든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사람대접 받기 힘든 일일까요? 바로 그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성경을 기록한 누가는 이 사람의 신분을 중요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신분보다는 이름이 밝히는 것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사마리아사람입니다. 성경저자는 이름보다 신분을 밝혀줌으로써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를 강조합니다. 이방인보다 더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당시의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주치지도 않고, 아예 무시하고 경멸했습니다. 역시 이것도 유대인의 우월의식에서 나왔습니다. 어쨌든 당시 이 사람은 이방인이면서 사마리아인으로서 사람들이 존중히 여기거나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상황은 문둥병자였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 한센 병으로 알려진 문둥병은 무섭고 치명적인 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보통 환자들도 무시를 당하기가 일수였습니다. 모든 병은 저주로부터 왔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저주가 바로 문둥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문둥병에 대해 아주 자세한 설명을 합니다. 어쨌든 이런 시대라서 환자들은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특히 문둥병자는 더욱 힘들었습니다. 분명 그들은 살아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에서 격리되었고, 그들만 한 곳에 머물며 집단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누구도 환자를, 문둥병자를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살다가,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 사람은 이방인이요, 사마리아인이요, 그리고 문둥병자로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그를 존중해 줄 사람이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그가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늘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야 하고,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도 항변하지 못하는 죄인 아닌 죄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대접해 주지 않는 사람을 주님이 대접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앞에 나온 그를 사랑으로 감싸고, 무릎 꿇은 그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그에게는 너무나도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에 드나들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나병환자들이 보통 사람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바로 자기들도 사람대접 좀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한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말이고, 존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람을 이렇게 대하셨습니다. 그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를 사랑하셨으며, 누구보다도 그를 소중히, 존중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그를 감동으로, 감사와 사례로 이끈 힘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이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를 사람대접해 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중한 사람으로, 존귀한 자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이것이 은혜와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엇보다도 감사할 일이 아닙니까? 주님은 나에게 관심을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주님의 누구보다도 나의 사정과 형편과 마음을 잘 아십니다. 바로 그 주님 앞에 우리가 나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감사와 기쁨으로, 영광과 헌신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셋째는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정상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투성이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그의 몸에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평생 가슴앓이를 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이것보다 그의 인생에 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날마다 자고 일어나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자기를 보면서 괴로워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너무도 마음이 아파서 죽고 싶은 심정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분노와 아픔이 짙게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더 멀리하고, 때론 증오하고, 사회를 비관하고, 문제를 일으키고, 점점 비뚤어져 회복하기에 불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주님을 만난 뒤,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주님을 부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13절을 이렇게 성경은 그의 심경을 알려줍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이 여기소서..” 그의 고백은 단순한 외침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인생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 힘을 다해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은 그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주님의 이 생명의 말씀을 의지하고 뛸 듯이 기뻐하며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서 그는 온 몸이 완전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평생 그를 옭아매고, 붙잡고, 괴롭게 한 고민 중의 고민, 문제 중의 문제를 주님을 만나면서 다 해결 받은 것입니다.

  그 순간,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낫게 해주신 주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쏜살같이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다른 아홉 명의 환자들은 똑같이 치료가 되었지만, 주님을 찾을 겨를이나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왜 이 사람인들 가족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없었겠습니까? 왜 이 사람인들 자기를 업신여긴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자기의 완쾌된 몸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누구보다도 주님이 생각났습니다. 자기를 낫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기에 앞서 주님께로 다시 달려온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마리아인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열 명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의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병자를 향한 주님의 중요한 의도가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곧 주님은 그들을 단순히 몸의 질병에서만 고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몸의 질병을 통해 마음의 질병, 문둥병보다 더 고통스러운 마음의 죄악을 치료하고 참된 신앙을 심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홉 명은 오직 몸의 질병, 현상적인 문제만 해결을 받고 끝냈습니다. 주님은 다시 찾아온 사람에게, 진정한 감사를 아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찾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은 몸의 질병과 함께 마음의 질병도 치료해 주셨습니다. 현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의 문제까지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요, 너무도 감사할 조건입니다. 아마도 그는 이런 은혜를 통해 얻은 소중한 믿음을 따라 평생 주님을 섬기며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기록이 성경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 뒤로 주님으로부터 해결 받은 내적 외적 문제, 현실적 본질적 문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고 감사와 기쁨과 영광으로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 인생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고민과 아픔과 괴로움을 치료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분께만이 모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주님을 믿고 여기까지 오면서 많은 문제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과거만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의 문제까지 다 해결해 주실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현재는 아픔이라도 앞으로, 당장은 괴롭지만 앞으로, 다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감사가 필요합니다. 그 주님을 붙잡고 다시 주님께 나와야 하고, 엎드려야 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고, 기도하고, 사례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계속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토록 기도하고 간구했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가 해결되어 평안한 것 같은데 또 넘어야 할 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과 염려가 되고, 머리가 복잡하고, 깊은 한숨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도 올해에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주일은 찾아왔지만 내게는 아직도 감사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과거만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앞으로의 모든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근본적으로 해결하실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주님께 달려와야 합니다. 다시 주님께 엎드려 사례하고 찾아야 합니다. 그가 육체의 해결을 보고 주님께 달려와 감사할 때 기대하지도 않은 근원적인 문제도 해결되듯이, 이제 우리도 과거의 감사가 필요하고, 지금의 감사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감사도 필요합니다. 바로 그런 감사하는 자의 믿음 속에 주님은 역사하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고, 이런 감사가 우리의 감사가 되어서 믿음으로 감사하고, 앞으로의 감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것에 대하여, 사람대접해 주신 것에 대하여, 그리고 과거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해결해 주실 것에 대하여 감사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감사와 헌신으로 한 주간의 문을 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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