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격려의 사역 (행 9:26-31)

  • 잡초 잡초
  • 308
  • 0

첨부 1


격려의 사역 (행 9:26-31)

며칠 전에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가을비가 내리는 날 무엇들 하셨나요? 비를 맞고 거리를 방황한 분은 없습니까? 용혜원 시인이 쓴 '가을비를 맞으며'라는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촉촉히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얼마만큼의 삶을/내 가슴에 적셔왔는가/생각해 본다//열심히 살아가는 것인가/언제나 마음 한구석에/허전한 마음으로 살아왔는데/훌쩍 떠날 날이 오면/미련 없이 떠나버려도/좋을 만큼 살아왔는가

봄비는/가을을 위하여 있다지만/가을비는/무엇을 위해 있는 것일까/싸늘한 감촉이/인생의 끝에서/서성이는 자들에게/가라는 신호인듯 한데/온몸을 적실만큼/가을비를 맞으면/그 때는/무슨 옷으로/다시 갈아입고/내일을 가야 하는가/

이 시를 읽어보면 가을이라는 계절 자체에 대한 예찬보다는 가을 다음에 올 겨울을 내다보는 한 시인의 초조한 마음, '겨울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금년도 어느덧 겨울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앞에 주어진 일들을 쫓다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날은 추워지고 아름답게 물들었던 단풍잎도 한 잎 두 잎 떨어져 바람과 함께 거리를 뒹굽니다. 겨울이 오면 나무도 그 활동을 중단하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냅니다. 모든 화려했던 옷을 벗고 앙상함을 드러내는 계절, 지나간 모든 자욱들이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이렇듯 춥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청년에게도 나이 많은 어른에게도,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에게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건강한 사람에게도 아픈 사람에게도, 준비한 사람에게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아옵니다.

그런데 이런 겨울이 자연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에도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도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인생의 겨울, 화려하고 아름답던 치장들은 모두 하나둘씩 벗겨져 그동안 감추어 왔던 지난날 삶의 흔적들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때는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씨앗을 뿌릴 수도 없습니다. 새로운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단지 삶에 대한 평가만이 남을 뿐입니다. 자연에서 겨울은 봄여름 가을 다음 순이지만 인생에서 겨울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예고가 없습니다. 바로 그때를 위하여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모든 활동이 중단되고 더 이상 인생의 기회가 없는 그 마지막 때를 위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희생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달았다면, 그 은혜 앞에 우리가 살아간다면, 이젠 성공추구의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보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삶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우리의 현실을 보면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참 아픈 이야기가 아닙니까? 신문을 펴면 온통 비판의 글들이 가득합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판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 어떻게 저분들에게 이 나라를 맡기겠는가 할 정도로 상대방을 짓밟으려는 일에 사생결단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격려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가 바로 격려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한 인생이 격려를 받으며 새로워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격려를 받고 살아가고 격려를 하며 산다는 것은 참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붙들고 있습니다만, 오늘 보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사울을 어느 누구도 따뜻하게 안아주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회심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이가 많았던 것 사실입니다. 26절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까? 그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예루살렘 교회는 그에 대한 아픔이 많았던 것 사실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입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외치고 다니니 누가 그의 말을 선뜻 동의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사울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데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지금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려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나바입니다. 격려의 사역자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바나바는 사도행전 4:36-37에 처음 등장합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 (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시고 교회가 세워지자마자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급성장하는 교회를 유지하고 계속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많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늘어나는 성도들 중에는 고아와 과부가 적지 아니했습니다. 선교와 구제를 위한 막대한 재원을 하나님께 구했을 때 이 일에 헌신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헌신자가 바로 요셉이라는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이었다고 성경에 기록합니다. 구브로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 섬을 말합니다. 당시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는 곳이고, 기름과 벌꿀의 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구브로라는 출신지를 밝힌 것은 바나바가 그 지역에서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이름난 부자였던 모양입니다.

바나바는 교회와 교회내 가난한자들에게 물질적 필요를 깨닫고 그 농장을 팔아 헌금합니다. 바나바의 이 결단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큰 위로를 얻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이 해결되어 사도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양식을 나눠줄 수 있어 교회내 연약한 자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예수를 믿고 미처 시골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전도를 하던 많은 전도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수 있었으니 전도자들이 큰 격려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그를 일컬어 위로의 아들이다. 격려의 사역자다. 「바나바」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격려 사역이 무엇입니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내가 거기 있어 주는 것입니다. 나를 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헌신과 희생 없이 타인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헌신에는 물질의 헌신이 있고 시간의 헌신이 있습니다. 혹 시간을 주되 물질을 못내는 사람이 있고, 혹 물질을 주되 시간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전한 헌신자라 할 수 없지요. 「바나바」 위로와 격려의 아들, 그 이름은 폼으로 붙여진 이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나바가 이처럼 격려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것을 '내려놓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받아주신 주님께 모든 것을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넓혀야 할 부분이 있는가 하면 좁혀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내려놓음을 통해 우리는 집중하게 됩니다. 의심과 같이 나누어졌던 마음을 하나 되게 하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게 하고, 쓸데없는 것들에 분산되었던 마음을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집중하게 하는 것, 싱글 포커스(단일 초점)를 갖게 만드는 것이 내려놓음의 목적입니다. 우리에게 내려놓음이란 어쩌면 고난일 수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현대인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풍요로움 속에서는, 평탄함 속에서는 그 감각을 다 잃어갑니다. 좋아도 좋은 줄 모르고, 슬퍼도 슬픈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기 시작하면 그 감각이 살아납니다. 후각이 살아나고, 촉각이 살아나고, 시각이 살아나고,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으로 되살아납니다. 고난을 통과한 성도들을 보십시오. 인간미가 물씬 풍깁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막 눈물이 납니다. 감각이 살아납니다. 똑같은 찬양을 해도 덤덤하고 졸리게 부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가슴 저리게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고난을 통과하면 그런 능력이 임합니다. 그것을 '영적인 능력'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임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과한 성도들은 충만의 특징입니다.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능력이 뭔지 아는 성도의 특징입니다. 감각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들은 냉소적이지 않습니다. 따뜻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품어줍니다. 격려할 줄을 압니다.

보세요.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소개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옛날에는 참 나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 눈이 멀었다가 다시 뜨게 된 일, 이제는 변하여 얼마나 강하고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하고 다니는지를 말하면서 사울을 받아주도록 설득했습니다. 바나바의 신원보증을 듣고 28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라고 말했습니다. 바나바의 보증을 통해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당한 증거자의 사역으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복음을 위한 헌신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를 믿어주었던 사람,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위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세워 주었던 사람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격려가 필요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는 정말 엄청난 행사를 치루었습니다. 오랫동안 한 생명을 위해 기도했던 터치153 새 생명 축제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두분의 장로님과 은퇴를 하시는 두 분의 권사님을 위해 교회가 수고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모두가 최선을 다 해야됨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을 한 것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목사인 저도 옆에서 볼 때 주님의 일이지만, 저토록 수고하는 모습 앞에 눈시울이 붉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는 것 보다 정말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에 설교를 잘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분이 낙심에 빠졌습니다. 공원에 나가 '이제는 다 그만 둬야겠어'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여자가 지나가며 "아, 목사님이시군요. 제가 목사님 설교 때문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 아십니까?"하는 겁니다. 그 목사님은 자서전에서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앞에서 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비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무한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새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목사님 설교 듣고 은혜 받았다는 그 한마디에 헤매던 목사가 일어난 겁니다. 그 전에는 공기를 안 마셨나요? 칭찬을 받고 세상이 환해지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기가 얼마나 맛이 있는지, 살아나서 그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어요. 사람은 누구나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격려를 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들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기독교인을 박해하던 사울을 누가 격려해주고 싶었겠습니까? 오히려 죽이고 싶었겠지요. 그가 예수님을 만나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 전에 너무 못되게 굴었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요,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게 관심이 없는 사람, 나를 괴롭히는 사람, 남을 자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러분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자주 비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언젠가 여러분도 비판할 것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이 늘 비판합니다. 오랫동안 비판을 연습해서 전문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 잘하는 사람, 언제나 옳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히려 조금 부족함도 있고 가끔 실수도 있는 사람이면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하며 편안하게 여길 텐데, 실수 한 번 없이 언제나 완벽한 사람은 겁이 납니다. 두렵습니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늘 굳어있어요. 또 옳아야 되고 또 잘해야 되고 틀리면 안 되니까 늘 긴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긴장하게 만듭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비록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좋아할 수가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런 바울을 끌어안고 격려하기 시작합니다.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복음을 위한 헌신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를 믿어주었던 사람,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위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세워 주었던 사람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나바와 같은 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의 가능성에 불을 지를 수 있는 한 사람이 우리 곁에 필요한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격려자 일뿐 아니라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앞부분에서는 '바나바와 바울' 그렇게 나옵니다. 조금 더 뒤로 넘어가게 되면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와 바울'로 순서 없이 나오다가, 뒤로 갈수록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나중에 바나바는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사라져야 될 때를 알고, 소리 없이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던 바나바는 놀라운 사람입니다. 자기가 세워야 될 사람을 세워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빠져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던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세워서 나보다 더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행복해 할 수 있었던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자신이 당당하게 안디옥교회 담임목사이면서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훌륭한 바울을 계발하여 그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음전도자로 세워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기는 조용히 무대 밑으로 내려 올 수 있었던 사람. 내 주변에 있는 뭇 사람들을 세워주고 내가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사람, 그가 바로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줍니다. 허물과 약점, 실수와 잘못까지 덮어주고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에 마가라는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 일행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났다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도중에 돌아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전도단 가운데 커다란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가 자신도 상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상심하고 있는 마가, 갈등의 장본인 마가를 격려하는 사역자가 나타났는데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고 전도대로 다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한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격려의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돕는 자'입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우리를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습니까? 우리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기러기가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가는 것은 멋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류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갈 때 71%를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맨 앞에 날아가는 새가 뒤따라오는 새가 받을 공기 저항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러기가 날면서 우는 이유는 뒤에 따라가는 새가 앞서 가는 새를 격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참 날다가 힘들면 앞서 가던 새와 자리를 바꿔 먼 여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마리가 이상이라도 생기면, 다른 두 마리가 같이 내려와 있다가 다른 떼에 흡수되어 다시 날아갑니다. 격려하고 위로할 때 본래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얼마나 격려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녀를 격려하는 아버지입니까? 또 어머니들은 어떻습니까? 격려와 사랑이 없는 가정이 얼마나 살벌할까요? 못할 때마다 징계하고, 잘 할 때만 상주는 딱딱하고 두려운 가정에서 격려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라서도 열등감 속에서 삽니다. 비판과 분석을 10% 한다면 90%는 격려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역시 주님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주님 격려를 받고도 남을 격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리석고 완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누구라서 격려가 필요 없겠습니까? 남편과 아내, 자녀와 부모, 성도와 성도간에 격려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격려는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어 달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겁니다.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격려의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밴 다이크의 소설 가운데 「대저택」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대저택에 살던 부자가 천국엘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하여 준비된 집이 보기에도 민망한 오막살이였으나 그 곁에는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한창 건축 중이었습니다.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그 집은 뜻밖에도 자기가 살던 동네에 살고 있는 한 초라한 의사를 위한 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그 이유를 묻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하늘의 건축 자재는 본인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보내오게 됩니다. 당신이 평생 보낸 자재만으로는 이 오막살이의 지붕조차도 다 씌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 대저택을 보십시오. 당신이 잘 아는 그 가난한 의사의 집인데 그는 평생 동안 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가 이웃들에게 준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곳에 도착했답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몸도 우리의 삶도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내가 받은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부터 격려하십시오. 사랑으로 격려하십시오! 열심으로 격려하십시오! 힘들어도 격려하십시오! 나누면서 격려하십시오!!

여러분! 누가 바나바가 되어 낙심하여 멸망해 가며, 격려가 필요해서 아우성치는 저 사람들의 소원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이 사람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바나바와 같이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남을 믿어 주며,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생각하며, 넘어진 자를 과감하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 불신과 낙담으로 인해 넘어져 가는 이 한국 사회가 다시 일어날 줄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