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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계속되는 창조적인 역사 (창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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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계속되는 창조적인 역사 
+ 설교본문 : 창세기 1:1

천지만물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우연히 천지만물이 만들어  졌고, 가스가 몰려다니다가 우연히 크게 모인 것은 태양이 되었고 작게 모인 것은 지구, 달, 금성 같은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우연히 생명이 만들어졌고, 아메바에서 시작된 생명이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모래를 억만 년 놓아두면 우연히 집이 지어집니까? 산에 쓰러진 나무를 백 년 정도 놓아두면 의자가 됩니까? 쇳덩어리를 몇 백 년 놓아두면 두면 자동차가 됩니까? 이런 것들도 누군가가 만들어야 되는데 이렇게 광대하고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세계가 어떻게 우연히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 45:18에 해답이 있습니다.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에게 창조적인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창조’라는 용어가 세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1절에서는 ‘바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무에서 유의 창조를 의미하며 오직 하나님과만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21절에서는 ‘아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유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창조적인 작업이기는 하지만 ‘개조’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이미 있는 재료인 나무로 의자를 만들고, 철로 자동차를 만드는 그런 작업입니다. 26절에서는 ‘야차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모델을 앞에 놓고 그 형상을 본 따서 만드는 조각가의 작업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했는데 그 말은 사람은 하나님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바라’ 창조로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준비된 재료로 새로운 것을 만드시는 아사 창조와 야차르 창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1:1에서 우주의 재료를 만들어내셨습니다. 2절에 보니 그 때의 상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주의 재료를 만들었지만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지 않는 무질서의 상태였습니다. 만약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작업이 끝났다면 천지창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계속되는 아사와 야차르의 작업이 있었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1:1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바라 창조 후에 [계속되는 창조적인 역사]가 있었는데 그 아사와 야차르 창조를 누구를 통해서 하셨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계속적인 창조의 역사의 결과는 아름다웠습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결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2절을 보면 혼돈이 사라지고 질서가 임했습니다. 둘째, 역시 2절에서 공허가 사라지고 충만이 임했습니다. 셋째, 역시 2절에서 흑암이 사라지고 빛이 임했습니다. 넷째, 4절과 31절에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 심히 좋은 상태로 변했습니다. 다섯째, 28절에 보면 하나님의 계속적인 통치가 있게 되었습니다.
자 그럼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의 역사를 누구를 통해서 하시는 살펴보도록 합시다.

1.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적인 창조의 역사를 하십니다.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엉망진창 이었습니다. 마치 밀가루 반죽처럼 세상의 모든 물질들이 물과 뒤섞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셨습니다. 여기서 운행했다는 말은 마치 새가 자신의 새끼 위에서 날개 짓을 하듯이 부드러이 활공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움직이는 동작만이 아니라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한 대상의 주위를 맴도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표현을 빌리면 닭이 달걀을 품는 것과 같이 성령께서 세상을 품으셨다는 말입니다.
성령께서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세상을 품으시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혼돈은 사라지고 질서가 임했습니다. 공허가 사라지고 충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빛이 임하여 흑암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되었으며 성령의 품으심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창조적인 성령의 역사는 교회에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주님의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마저도 옛 직업인 어부 일을 하기 위하여 갈릴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을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두려움에 떠는 무기력한 모습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전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에 약속하신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성령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창조적인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모여든 사람들에게 전파된 말씀에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되었고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로 교회는 땅 끝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창조적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 국가도 변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이 성령의 창조적인 역사가 약 120년 전 조선 땅에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창조적인 역사로 120년간 조선 땅에는 천지가 개벽하는 수준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한국 초기선교 역사에서의 사회 사업적 접근]이라는 최종임 목사의 소논문을 인용하겠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참으로 암울했습니다. 조선말기의 정치인들은 사색당파에 빠져 정권유지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상인들은 돈으로 벼슬을 매입함으로써 정치적 부패에 빠졌습니다. 반면에 농업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차별대우로 말미암아 양반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도구로 밖에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극도의 가난의 문제는 모든 백성들을 도탄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노예제도와 여성학대 아동에 대한 지나친 체벌 등은 심각한 수준이었었습니다. 과음과 무절제 그리고 노름 등은 중요한 사회문제였습니다.

1885년 한 병원보고서를 통해 의료선교 개시 이전의 조선에 만연한 질병의 심각성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의 절반은 천연두로 죽습니다. 그리고 매독은 아주 흔한 병입니다. 회충환자가 1년간 760건이나 됩니다. 돌싸움 활쏘기를 하다가 다친 환자도 꽤 많습니다. 피부병과 무좀은 국민의 거의 전부가 걸려있습니다. 학질은 만병의 근원이 되어 있습니다. 각기병, 디스코마 같은 환자도 많습니다. 환자들에게 약을 주면 잘 받아먹긴 하는데 술을 많이 마시고 음식물을 조심하지 않아서 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조선인들에게 통용되고 있던 질병은 주로 말라리아, 소화불량, 기생충감염, 피부병, 눈병, 관절염, 폐결핵, 성병, 천연두, 열병, 염병이라고 불리는 장티푸스이며 가끔 나환자도 있었습니다.” 당시 낙후된 의료와 가난, 질병으로 가장 고통 받는 것은 어린이들 이였습니다. 10세 미만의 사망률이 45.5%였으며, 그 중 18%는 한 살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이것은 상상도 못할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미개한 제3세계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이렇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있던 이 백성에게 성령님은 역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약 120년 동안 우리나라는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성령의 역사 속에 살아가면 창조적인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요즘 은혜를 받고 자주 묵상하며 제 믿음을 세워나가는 말씀이 사 60:22입니다.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의 영이시고 모략과 재능의 영이시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하면 크게 세 가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는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성령이 내면을 다스리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둘째는 능력의 변화입니다. 영적인 능력도 변하고 생활의 능력도 변하게 됩니다. 셋째는 사역의 변화입니다. 주어진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 가운데 마른 뼈의 환상이 있습니다.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마른 뼈들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시니 뼈들이 모이고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생깁니다. 그들 가운데 성령의 생기가 들어가니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게 됩니다.

2.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계속적인 창조의 역사를 하십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임하며 흑암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사 57:19에 보면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입술에서 말씀이 나가면 그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입술의 말씀으로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사단의 시험도 말씀으로 물리치셨고, 병든 자들도 말씀으로 고치셨으며, 귀신들도 말씀으로 쫓으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풍랑도 말씀으로 잔잔케 하셨으며, 죽은 나사로도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하므로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 잡는 일을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실패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그물을 씻다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엄청난 양의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깊은 대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고,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대 사도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5병2어를 나누니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된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는 말씀에 순종한 종들이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어서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구소련에서 한 선교사님이 기차 안에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한 신사에게 성경을 주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자 그 신사는 성경책을 창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선교사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한 농부가 선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루는 농부가 기찻길 옆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기차 안에서 한 권의 책이 날라 와서 농부의 가슴을 때렸습니다. 농부는 그 책을 집으로 가지고 가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은 선교사님에게 복음을 듣고 거절한 사람이 던진 성경이었습니다. 농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사님 소식을 듣고 수소문해서 선교사님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신학자요 영성가였던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떠나 방탕하고 악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그 어머니 모니카는 항상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아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라는 권고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도저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정말 믿고 싶었지만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탕한 삶에도 진력이나 곤고해진 어거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을 보여 주십시오. 나도 믿고는 싶지만, 이해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 진절머리 나는 삶에서, 당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파도가 철썩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위로 그의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데, 한 소녀가 홀로 앉아 모래구덩이를 파 놓고는 하얀 조가비로 바닷물을 떠 담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물었습니다. “얘야, 거기서 혼자 뭘 하고 있니?”, “예, 아저씨, 바닷물을 이 모래구덩이에 퍼 담고 있는 거예요.”, “원, 바닷물을? 그래 그 바닷물을 얼마나 퍼 담으려고?”, “저 바닷물을 다 이 모래구덩이에 퍼 담을 거예요.”, “얘야, 바다가 안 보이니? 바다가 얼마나 넓고, 바닷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작은 조가비로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다 퍼 담을 수 있겠니?”, “그렇지만, 계속 퍼서 담다가 보면 언젠가는 바닷물이 다 마를 것 아니예요?”, “얘야, 그렇지 않단다. 저 큰 바다를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담기란 불가능하단다. 네가 종일 퍼 담았어도 바닷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잖니?”, “그렇지만 아침부터 계속 물을 떠서 담았으니까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 아니예요?”, “아니란다. 네가 퍼 담는 바닷물보다 강에서 바다로 흘러들어 오는 물이 훨씬 더 많은 걸. 또 네가 모래구덩이에 바닷물을 떠 담아도 바닷물은 모래 속으로 스며들고 말지 않니? 해가 저무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무나, 부모님이 걱정 하신단다” 그 때 그 소녀가 어거스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 바다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를, 조개껍데기보다 작은 아저씨의 생각으로, 모래구덩이 만한 아저씨의 머릿속에 담는 일이 훨씬 더 어렵지 않을까요? 아저씨의 인생이 저물고 있어요. 아저씨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그는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이 예사롭지 않은 꿈을 통해 자기의 보잘것없는 생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밀란 이란 곳에 갔는데 거기 그 당시 유명한 암브로스라는 설교자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거기서 암브르스의 명성을 듣고 그의 설교를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그 예배당에 한 두 번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33세 때에 밀란 교외에서 고요히 동산 속에 앉아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놀면서 떠드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내용은 “어서 책을 펴서 읽어라”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찾아 펴서 읽으니까 그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고 롬 13:13-14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성경 구절을 받은 다음부터 온전히 변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전히 회개한 후에 그 다음 부활절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17년 간 승려 생활을 하다가 목사가 된 김일규씨의 간증이 있습니다. 어느 날 시주하러 갔는데 한 청년이 책 한 권을 자루에 넣어 주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니 한번 읽어보고 예수를 믿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불쾌하게 느꼈지만 호기심에 그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섯 번을 통독하는 동안 성경이 불경과 다르다는 4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① 속죄의 가르침, ②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 나셨다는 것 ③ 예수님은 속세와 함께 하셨다는 것 ④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에서 나와서 신학교를 가서 신학을 했습니다.

백부장처럼 말씀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는 주님이 말씀만 하셔도 자기의 하인이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믿는 믿음대로 그 시로 하인이 치료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고 예수를 영접하므로 영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치유의 말씀을 믿으면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풍성한 축복의 말씀을 믿으면 풍성함의 복을 받게 될 것이며, 승리의 말씀을 믿게 되면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으면 창조의 능력이 있는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며 창조의 능력을 행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적인 창조의 역사를 하십니다.

1:26에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통해서 통치사역을 하실 것을 결의하셨습니다. 그리고서 27절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으며, 28절에서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5대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예루살렘 교회 가운데 생명을 불어넣으셨고 그곳에 있는 믿는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사람들을 불러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골 1:28, 29에 보면 목회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목회자로서 예수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가르쳐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목회는 사람을 완전한 자 즉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 일은 성령께서 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교회의 일군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그 성령의 역사를 감지하고 그분의 역사를 따라 수고하는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서 일하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빌립을 감동하셔서 광야로 가게 하셨고 이사야서를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디오피아 장관에게 접근하게 하셨습니다. 빌립이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자 성령은 빌립을 통해서 창조의 역사를 계속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이디오피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까지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이디오피아의 장관에게 창조의 역사를 행하신 것입니다. 빌립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 약 120년 전 이 나라의 모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비참한 나라에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가 나타나서 지금은 이렇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나라에 일어난 창조적인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따라 수고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예로 홀(W. J. Hall) 부부를 들 수 있습니다. 1892년 8월 홀은 전문인 선교사로 평양지방에 개척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기독교 선교에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하여 금교령이 내린 때로 선교사들이 함부로 활동할 수 없던 시기였음에도 그는 셋방 하나를 얻어 환자들을 성실하게 치료하였으며 김창식을 통해서 집을 한 채 구입하였습니다. 그 당시 평양감사 민병식은 수구파였음에도 그 일을 묵인하였습니다. 심지어 평양 주민들이 홀을 추방하자고 했을 때 홀을 변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명을 내렸습니다. “그 외국인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신사다.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도 좋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냐? 누구든지 그를 방해하거나 말썽을 일으키면 관청으로 잡혀 올 것이다” 홀의 신실한 의료 행위는 많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게 되었고 성경책도 마음대로 뿌리는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리교의 평양 개척 선교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895년 전쟁 직후 전염병이 돌았을 때 부상병과 환자구호에 전념하다가 홀 자신도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게 됩니다. 홀의 부인 로제타 홀 여사는 남편의 사망 후에 잠시 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189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이 시작한 병원을 기홀 병원으로 발전 시켰을 뿐 아니라 남편 홀 의사의 유산과 별세 후에 들어 온 조의금을 가지고 평양에서 최초로 서양식 병원인 ‘홀 의사 기념 병원’을 세워 폴웰 의사에게 원장직을 맡기고 자신은 부인과장을 맡았습니다. 로제타 홀 여사는 남편이 죽은 후 태어난 달이 세 살이 되었을 때 전염병으로 죽어갔지만 흔들림 없이 그녀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 가면서 여성 전용병원인 광혜원을 개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적인 역사를 위하여 이제 우리나라와 우리 믿는 자들을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나 현실적인 문제만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관심은 여전히 좀더 잘 먹고 잘 사는데 모아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잡고 있는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과 물고기를 포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하나님의 역사에 자신을 내어드렸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를 위하여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육체의 게으름, 세상 자랑, 부귀영화 등등 무엇이 되었든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는데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 내 감정, 내 의지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서 창 1장의 창조적인 역사가 나를 통해서 계속되어지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적인 역사는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에 자신을 내어드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 계속적인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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