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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낯선 사람과의 공통분모 (행 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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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과의 공통분모 (행 8:26-40)
   
    전혀 문화도 다르고 풍습도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도 많지 않지만 그런 사람과 통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고 또 즐거운 일입니다. 문화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사람들을 서로 통하게 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음악입니다. 음악은 세계적인 언어입니다. 같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고 또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연예인들, 가수들을 인정해 주어야 됩니다. 그들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한 바가 큽니다. 노벨상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은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사람들을 서로 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스포츠입니다. 축구 같은 운동, 모두가 이해하고 모두가 좋아하고 모두가 열광합니다. 그리고 다 압니다. 페널티 킥이 뭔지, 지단이 누구인지, 호나우도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외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음식이라든가 또 엔터테인먼트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코카콜라, 들어가지 않은 나라가 없지요. 맥도날드,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에도 맥도날드가 있다고 하니까. 또 TV 프로, 영화, 이런 것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또 좋아합니다. 사실 이것은 다 표면적인 것이고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사람의 공통점을 더 찾을 수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표면적으로 봤을 때도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전쟁은 문화가 다른 민족끼리 하는 게 아니에요. 역사가 이것을 보여줍니다. 이십 세기에 이르러서 1차 세계대전,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유럽 전쟁은 같은 문명끼리 싸운 전쟁입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이들은 다 백인 문명이고 기독교 문명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전면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이십세기 한반도 역사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고 한국전쟁이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더 많은 고통이 있었고 더 많은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이 한국전쟁도 같은 한민족끼리 한 전쟁이에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문명의 충돌이라고 말하지만 일 년에 미국 내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이 이라크에 죽은 미군보다 더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 빌립과 에디오피아 사람을 즉시 통하게 해 준 것은 성경말씀이었습니다, 성경 이사야서. 에디오피아 사람이 마침 그 시간에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도 잘 아는 성경구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즉시 대화가 통하고 그리고 대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쩜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빌립과 에디오피아 사람이 다른 얘기 하지 않았어요. 날씨가 어떻다느니 요즘 경제가 어떻다느니 공통적인 취미든 이런 것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고 이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성경말씀에 대해서 대화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이 문학의 위상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책은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에요. 모든 사람이 성경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의 화두를 제공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을 못 들어 본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말씀을 사람의 공통분모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필요성을 파악해서 그들의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고 그것을 어떤 접촉점으로 삼아서 전도를 해야 된다는 이론이 널리 퍼져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도 윈터 스쿨도 운영해 보고, 주부 교실도 가르쳐 봤습니다. 저희 교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 ‘주부교실’ 해서 요리니 꽃꽂이니 영어회화니 이런 것을 가르쳤습니다.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꽃꽂이를 배우기 위해서 교회에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꽃꽂이를 더 잘 가르쳐 주는 데 많습니다. 영어회화 배우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줄 아세요? 안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고 영적인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의외로 세상에는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 성경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에디오피아 사람이 성경을 읽고 성경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성경에 관심이 있었어요. 성경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빌립에게 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 성경을 알고 싶어 하고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이것이 빌립과 에디오피아 사람을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맺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쉽게 믿음에 이르지 못하느냐? 교회에도 와 보고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는데도 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느냐?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립이 그에게 한 첫 번째 질문이 그것입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뇨’ 중요한 것입니다. 읽는 것과 깨닫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에요. 에디오피아 사람이 성경을 읽기는 읽는데 깨닫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그의 대답이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 교회 문턱을 드나들어 봤지만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의 이유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바로 길 위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것이고 또 돌짝밭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깨닫지를 못하든 그 말씀이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교회에 가장 많은 종류의 사람은 가시와 엉겅퀴에 떨어진 씨앗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이해도하고 믿기도 믿는데 세상에 욕심이 많아서 말씀의 기운을 빼앗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마 숫자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많을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에 그런 경우가 있었으니까.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빌립이 이 에디오피아 사람을 만나서 지도해 주었더니 그 사람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나 혼자 성경 보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신앙생활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에디오피아 사람이 혼자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빌립이라는 말씀을 지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빌립이라는 먼저 믿은 사람을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교회로 인도하시고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게 하실지라도 친히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에요. 먼저 믿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천사도 이것을 하지 못합니다. 천사도 흠모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신 사명이 있고 교회에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러므로 교회와 같은 그런 단체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전도의 목표를 볼 수 있습니다. 진짜 제대로 된 전도는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첫째는 하나님이 이어주십니다. 이건 가장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이 에디오피아 사람과 빌립을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도 더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소원을 갖고 계십니다. 교회가 전도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더라도 하나님이 더 큰 소원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람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에 관여하기를 원하시고 관심을 갖고 예정하시고 사람을 준비하시고 또 만나게 하십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두 번째 생각할 것은 저쪽 사람이 절반이라도 요청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구절을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빌립을 초청해서 자기 병거에 앉게 하고 그리고 그에게 말씀 듣기를 청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 말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저 사람에게 적어도 반이라도 용의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무시하게 될 때 부작용을 낳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개신교 신앙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느냐?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신앙을 강요하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원리는, 적어도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전도의 에피소드를 살펴보면 대부분이 저쪽 사람이 초청하든가 절반이라도 용의가 있었습니다. 최초의 로마 사람으로 예수님을 믿은 고넬료의 경우를 보면 그가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내서 베드로를 초청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의 집에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왜 나를 불렀습니까?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해서 말씀을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정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에 갔을 때 빌립보 감옥의 간수 -전형적인 예이지요- 그가 바울 앞에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본인 스스로 물어봤어요. 그것은 그야말로 극단적인 경우라고 하더라도... 또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루디아라는 여성도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하시니라’ 마음이 열리는 일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없는데, 마음이 열리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데 예수 믿으라고 강요하니까 반발하는 것입니다. 사도들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무리 저쪽에서 용의가 있더라도 누군가 복음을 전해 주어야 됩니다. 이 에디오피아 사람은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를 드리고 갈 정도로 경건한 사람이고 가는 길에 음악 듣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서 가는 경건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빌립이 복음을 전해 주어야 회심을 할 수 있었어요. 사람이 착하다고 저절로 회심하는 게 아니고 사람의 마음이 열려있다고 저절로 회심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 주어야 되고 예수님을 전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빌립도 ‘이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는 것처럼 모든 성경은 예수님께로 통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이 에디오피아 사람이 읽고 있었던 것은 구약성경이지만 구약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그가 물어보지 않습니까.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중요한 질문이지요. 성경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어렵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거기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발견하면 됩니다. 그것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씨앗을 심으면 열매가 열립니다. 어떤 경우에는 열매가 아주 신속하게 열립니다. 이 에디오피아 사람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가 복음을 듣고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참 착한 사람이에요. 빌립이 세례 받을 것을 종용하지 않았어요. 세례의 ‘세’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세례를 받겠다, 내가 세례를 받는데 무슨 거리낌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성경 말씀이 그 속에 들어가니까 믿음이 생기니까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런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하나님이 일 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강요해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그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의 마음속에서 섬기려는 마음이든 봉사하려는 마음이든 기도하는 것이든 사람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 마음에서 그것이 우러나오게 하십니다. 봉사를 하든 차량안내를 하든 주일학교를 가르치든 강요한다고 됩니까? 강요해서 되지 않아요. 공부도 강요해서 자녀들이 합니까? 아니에요. 스스로가 공부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야지요. 그래야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요한다고 됩니까. 강요해서 된다면 벌써 옛날에 인류는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됩니다. 무엇이 그것을 우러나오게 하느냐? 믿음이 우러나오게 합니다. 무엇이 믿음을 키우느냐? 말씀이 그것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씨를 심으면 열매가 나게 돼 있습니다. 그걸 믿어야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사람처럼 아주 신속한 경우도 있지요. 모든 사람이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바쁩니다. 빌립이 오래 머물러 있어서 이 에디오피아 사람을 돌봐준 게 아니고 그 사람이 세례를 받으니까 하나님이 빌립을 낚아 채 갔어요. 39절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이 남아서 이 사람의 친구가 되어 준 게 아니고 동무가 되어준 게 아니고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준 다음에 하나님이 데리고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도록 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되니까. 하나님의 종을 베이비시터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되어줄 것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 주의 종이 역할입니다. 여러분을 도와서 예수님을 믿도록 하고 믿음을 도와주는 것이 주의 종의 역할이지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기대하다가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쁩니다. 복음을 들어야 될 사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에디오피아 사람도 그렇고 빌립도 그렇고 둘 다 단백한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아주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걸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둘 다 마찬가지였어요. 말씀을 듣는 사람이든 전한 사람이든 단백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거치적거리는 게 없고 아주 신속하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는데 오늘날이라고 왜 하나님의 역사가 신속하게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겠습니까.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당하지 못한 생각을 한다든가 감정이 걸림돌이 된다든가 체면을 생각한다든가 이런 인간적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더 쉽고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지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든 듣는 사람이든 협조만 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쉽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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