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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의 재산 [욥 1: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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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욥 1;13-22                          설교제목 ; 최고의 재산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 합 3;17-19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족을 말할 겁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 부모나 자녀.  물론 간혹 남편보다 텔레비전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아내보다 맥주 한 병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집이나 부동산, 혹은 주식을 말할 수도 있겠지요.  사람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다 다른 법이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욥은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재산 많지요, 자식들 줄줄이 낳았지요.  게다가 가정도 화평하지요.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삶, 그것이 바로 욥의 삶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하루

그렇습니다.  욥은 참으로 평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평화가 마땅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서 부끄러움이 없는 의인이었습니다.  욥은 자기가 누리는 평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고난을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우리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남편이 암에 걸릴 리가 없어.” “내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생길 수 없지.” “내 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우리 집에 불이 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어.”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남들에게나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 가정은, 우리 집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안전지대입니다.  우리는 은연 중에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땅이 우리에게 주는 평화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약속하셨지, 이 땅의 평화를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겠다고 하셨지, 고난 자체를 면케 해 주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욥기를 통해서 우리가 고난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욥기는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켜 주는 그런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욥기는 우리를 더 큰 혼란의 세계로 이끌어 갑니다.  “왜 하나님은 사탄의 제의를 수락하셨을까?  잘 살고 있는 욥에게 왜 그런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그냥 사탄아 물러가라 한 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비밀입니다.  고난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도 우리에게 시원한 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습니다.  욥기는 왜 우리에게 고난이 오는가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그 고난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욥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허락에 의하여 생긴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예측할 수 없는 고난

지금 하늘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욥을 삼키려는 사탄이 하나님으로부터 욥을 시험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의인인 욥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땅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의인이라고 하여도 고난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수장이며 위대한 목회자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단 커튼이 당겨지고 그 뒤의 영적인 세계가 우리의 시야에 드러나게 되면 모든 것을 삼켜버릴만큼 격동적이고 격렬해서 지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전쟁도 단지 게임에 불과할 정도이다.  진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거기이다.”

  하루는

그 전쟁은 예고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쟁은 어느 한 순간 우리의 삶 깊숙이 침투합니다.  13절 첫 머리를 보십시오.  하루는 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욥에게 있어서 그 하루는 여느 날들과 다름없이 시작한 평범한 하루였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고, 자녀들까지도 모두 잃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하루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하루는 다른 날들보다도 더 기쁘고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욥의 열 자녀는 모여서 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화목한 가정, 우애있는 형제들이었습니다.  욥은 그런 자녀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모임을 축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이 고난의 하루였던 것입니다.

그 하루는 욥이 모르는 사이에 결정된 하루였습니다.  욥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이 하루는 우리도 역시 피할 수 없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거쳐야 하는 그런 하루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축제가 벌어지는 그 날 하인이 뛰어와서 말합니다. “주인님, 스바 사람들이 소와 나귀를 다 빼앗고 목동들을 죽였습니다.” 욥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결국 그 스바 놈들이 사고를 치는구먼” 

그러나 그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하인이 뛰어들며 말합니다. “주인님, 하나님의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양떼와 목동을 살랐습니다.” 욥은 순간 다시 생각합니다. “소와 나귀, 그리고 이제는 양떼까지?  하지만 아직 중요한 약대가 남아 있어서 댜행이군.”

그 순간 세 번째 하인이 뛰어들며 말합니다. “주인님, 갈대아 사람들이 종들을 모두 죽이고 낙타를 강탈해 갔습니다.”  욥도 이제는 긴장합니다.  “아니, 내 재산이 모두 사라졌잖아.  큰일이네.  가족들을 다 모아서 대책을 논의해 봐야겠군”

그러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네 번째 하인이 말합니다.  “주인님, 집이 무너져서 당신의 열 남매가 모두 죽었습니다.”

욥은 망연자실합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집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화가 옵니다.  “남편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또 전화가 옵니다.  “집에 불이 났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 보니 옆집 사람이 호들갑을 떨며 말합니다.  “유치원 차가 교통사고가 나서 애들이 다 죽었대”  이런 일이 장난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단지 우리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욥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더욱이 그를 더 괴롭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종은 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하나님의 불

사탄은 이렇게 간교합니다.  하인들의 입술을 통해서 욥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욥에게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러셨다고?  왜?  무엇 때문에?  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자 후에 사탄은 아내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직접적인 유혹도 서슴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불이 우리의 모든 것을 사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불은 오히려 우리의 모든 죄를 사르고, 우리를 정결케 합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난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렘 29: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생각, 그것이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덫에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힘들어하는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다가와서 “당신에게 고난이 닥친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셨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당신을 벌하시기 때문이오.”라고 말한다면 믿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에게로 돌리는 것,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거룩한 행동이요, 경건한 믿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사탄의 속삭임이요, 마귀의 궤계일 때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도 어떤 누군가의 힘든 모습을 볼 때 저가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이라는 속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욥을 힘들게 하려는 사탄의 또 다른 공격도 있습니다.  욥에게 소식을 알리는 네 명의 하인들은 모두 한결같이 말합니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사탄은 욥의 염장을 지르고자 합니다.  멀쩡하게 살아남은 종들을 통하여 욥의 마음에 더 큰 불만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사실 욥의 입장에서 보면 죽어도 종이 죽는게 낫겠지요.  어떻게 열 자식 가운데 하나도 살아남지 못합니까?  어떻게 죽어도 그렇게 전부 죽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약탈을 해 가도 그렇게 깨끗하게 약탈을 해 갑니까?  비극적인 소식을 전할 한 사람씩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경우는 뭡니까?

우리가 살면서 이런 비교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요?  “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왜 우리 자식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누구누구는 신앙생활 안하고, 하나님 믿지 않아도 잘만 되더구만, 왜 우리는 뼈 빠지게 주일 아침부터 이렇게 뺑뺑이 쳐도 이런 일들이 닥치는 거야?”

사탄은 바로 그러한 반응을 욥에게서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의 입에서 불평이 터져 나오기를, 그래서 하나님이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소리지르며 불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입술에서도 이런 불평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이 음성이야 말로 우리의 상처에 소금물을 끼얹고자 하는 사탄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은 나만 미워하신다는 생각,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대하시지만, 나에게만 철저하시고 까다로우시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입니다.

제 막내 아들에게서 나오는 듣기 싫은 소리가 있습니다.  “아빠는 나만 미워하죠?” “그래, 너만 밉다.  정말 밉다.” 그러면 아들은 바로 삐짐하고 웁니다.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철없는 소리가 바로 이겁니다.  “아빠는 왜 형아만 이뻐해요?”“아빠는 왜 나만 미워해요?”  어린아이들은 겉으로 드러나 부모의 행동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들은 아직 부모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헤아림과 고민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와 아빠가 나만 미워한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철 없음이 어린아이들에게 있듯이, 하나님이 내게만 이런 고난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열등감과 죄악이 모든 사람들에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뿌리 내리고 있는 그 오해와 불신을 교묘하게 이용하고자 합니다.

사탄은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천하의 욥이라도 대책이 안서지.  하나님이 자기를 저주하시고, 특별히 자기만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면 욥도 뒤집어 질꺼야.”

욥의 승리

그러나 욥은 달랐습니다.  욥은 사탄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사탄도 기대를 했을 것입니다.  욥은 그 소식을 듣자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밉니다.  겉옷을 찢는 것은 슬픔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머리털까지도 잘랐습니다.  머리털을 자르고, 수염을 자르는 행동은 가장 극단적인 행동입니다.  이전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머리카락과 수염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욥이 머리털을 자르는 것을 보고 사탄은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독이 오른 욥의 입술에서 금방이라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는 소리가 터져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욥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 칭찬하셨던 그의 순결과 정직을 잃지 않습니다.  함께 20-22절을 읽겠습니다.  욥이 일어나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승리의 비결 - 예배와 감사

우리는 욥의 모습에서 시련을 이기는 믿음의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의 능력

욥은 그 긴박한 순간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고 되어있지만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어감이 좀 다릅니다.  엎드렸다는 나팔이라는 단어는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배를 위하여 엎드린 것이 아니라 놀라서 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기억합니다.  사무엘 시대에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 읹아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의자에서 떨어졌다고 할 때의 단어가 바로 이 나팔입니다.  엘리만큼이나 욥도 놀라 의자 같은 곳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욥도 역시 사람입니다.  그도 역시 고난을 당하면 놀랍니다.  그리고 슬퍼합니다.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갖지 못한 한가지 비장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란 단지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정해서 드리는 특별한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예배란 관계를 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곧 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은 그 절망적인 순간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비극적인 소식을 들은 후 그는 예배당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간을 내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세를 가다듬고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그런 모습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떨어진 채,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의 경배는 우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짤막한 기도를 드립니다.  아니 어쩌면 기도라기보다는 자기 혼자의 웅얼거림, 독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21절에서 말합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그의 예배는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드릴 예물도 없었습니다.  함께 예배드릴 자식들도 사라졌습니다.  그는 스스로 혼자만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는 바로 입술의 예배, 감사의 예배였습니다.

  감사의 능력

욥의 독백은 그의 인생관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이 이 땅에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견딜만 하다고 말합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이 가져가시니 불평할 것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空手來空手去입니다.  불경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이 이런 표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딤전 6;7-8을 찾아서 읽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사도 바울도 욥과 같은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가지고 온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장례식에서 노자돈을 넣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 노자돈이 누구 노자돈입니까?  염을 하는 사람들이나 영구차 기사의 노자돈이지 결코 숨진 사람의 노자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아무리 비싼 옷을 입히고, 좋은 관을 써도 그것은 죽은 자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우리가 가졌던 무엇인가가 사라졌을 때 우리는 잃어버렸다고, 손해를 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과 바울은, 그리고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가졌던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그 동안 자격 없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동안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금전적인 손해를 보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재물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이 땅에 있었을 때에 얼마나 그로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에 불평하지는 않았습니까?

욥이 이 모든 시련과 고난을 견디며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그에게 이런 근본적인 원칙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욥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들은 단 하루 만에 허망하게 사라졌습니다.  많은 소와 나귀, 그리고 양과 약대는 은연중에 그가 신뢰했던 것들입니다.  욥에게 있어서 자식들은 어떤 존재였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렇듯이 욥에게 자녀들은 단지 내가 낳은 아들과 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욥에게 자녀들은 위로요, 자랑이었습니다.  최고의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이젠 의미가 없습니다.  남은 재산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 듯 얼마 지나지 않아 단 하나 남은 욥의 아내까지도 그의 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러나 이처럼 그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도 변함없이 그에게 남아 있는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 본 하나님을 향한 욥의 믿음과 감사함이었습니다.  1장은 이런 말로 끝을 맺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이 땅을 살면서 이것은 영원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믿음은 영원토록 욥의 것이었습니다.  욥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재산은 바로 이것,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예배와 감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일에 감사하며 예배하는 사람, 그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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