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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헌신함으로 다시 부흥하는 교회 (시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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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함으로 다시 부흥하는 교회 (시 110:3)

(시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교육하며 선교하고 봉사하는교회기 1907년 처럼 다시 부흥 하기를 원하며 헌신함으로 다시 부흥 하는 달입니다.
시인은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라고 노래 합니다.

  언제 -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권능의 날"은 '당신의 군대를 인도하여 낼 때'(on theday you lead your host-RSV)로  '주의 힘을 발휘하시는 때' 이며 특별히 '주의 군대의 날'을 의미하는 바 '주께서 주의 군대를 소집하여 전투를 위해 정렬시키시는 날'을 가리킵니다.[현대인의성경]은 주의 능력의 날에 [표준새번역(개정)]은 임금님께서 거룩한 산에서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시는 날에,로 번역합니다.

  주께서 정복을 위해 나아가시지만 혼자 가지 않으시고 뒤에는 신실한 추종자들이 뒤따르는데 그들 모두는 자발적인 심령과 담대한 용기로 무장하고 있습니다.(알렉산더 맥라렌  Alexander MacLaren, 1871).
나아가 복음 시대를 가리키며, 특별히 회심의 시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 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영적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멸망으로 치닫는 죄인에게 복음이 임할 때에는, 말로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기 때문입니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그 권능은 압도적인 권능입니다. 죄인과 맞닥뜨려, 그의 그릇된 이력을 과감히 중지시킵니다.
다소의 사울이 바로 그러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확신케 하는 권능으로서, 죄인에게 그가 모든 면에서 훼손된 존재임을 가르치며, 간수로 하여금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 하고 외치게 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는 권능입니다. 그것은 죽은 영혼들을 소생시키고, 마침내 죽은 몸도 무덤으로부터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더욱 주의 권능의 날은 주님의 재림의 날로도 이해 합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기다리며 집 맡은 청지기로 달란트대로 므나대로 충성하며 헌신 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 주의 백성이

주의 백성은 주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자들, 그리고 복음의 기치를 내세움으로써 주께로 모으신 자들입니다.
주의 백성은 아버지께서 주께 주신 자들이며, 주로 말미암아 구속되고 값으로 사신 바된 자들이고, 주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며, 군사로서의 맹세를 통해 주께 헌신한 자들이고, 또한 자발적이고 흔쾌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며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주의 백성은 주께서 항상 살아 계시듯이, 주의 교회인 주의 백성도 영원히 번성할 것이요, 주의 힘이 결코 쇠함이 없으므로, 주의 참된 백성도 늘 한결같을 것입니다.

  어떻게 -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주께서 제사장 왕이시듯이, 주의 백성들도 모두 제사장이요 왕이며, 거룩한 아름다움이 예복이며 영광입니다.
주의 백성은 신성한 옷을 입은 경건한 제사장의 무리와 같을 것은 "거룩한 옷을 입고" 나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처럼 거룩한 예복을 입고서. 전사이자 제사장으로서, 왕이요 제사장이신 분을 섬기기에 적합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이 같은 두 가지 특성들 간의 연관성에 대해 하나님의 군사들은 오직 제사장적 자아 성별을 통해서만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낼 수 있으며, 또한 역으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부단한 전투를 통해서만 '자신의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네안더 Neander).

"거룩한 옷"은 종종 성직자 의복, 즉 여호와의 제사장들이 입는 거룩한 예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정복자 되시는 왕께서는 영원한 제사장이시며, 제사장의 무리가 그분을 뒤따릅니다. 소집하는 날에 군사들은 담대한 용기와 자발적인 헌신의 마음으로 모여들며, 자신의 목숨마저 기꺼이 바칠 각오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갑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제사장 예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들은 싸움터로 나아가는 자들이라기보다는 마치 제단 앞에서 수종드는 자들 같으며, 깃발 대신 법궤를 앞세우고 무기 대신 나팔을 들고서 여리고를 에워쌌던 자들 같습니다.

이는 계19:14의 내용을 곧바로 연상시킵니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희고 깨끗한 세마포"는 칼이나 창과 비교할 때 참으로 기이한 무기입니다.(알렉산더 맥라렌)

거룩 곧 경건은 우리의 영적 아름다움입니다. 영혼에 있어 경건이란 세상에 있어 빛과 같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빛나게 하고 단장시켜 줍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은 우리의 위대함이 아니라 선함입니다. 성결함은 천사들의 아름다움이기도 합니다. 경건은 성령의 기이한 작품이요 공교한 자수품입니다. 경건한 영혼은 마치 아름다운 무늬를 입히고 순수함으로 채색된 작품과 같습니다. 경건은 천상의 왕께서 우리에게 애착을 느끼시게끔 만드는 황금 옷 입니다. 경건은 성도들에게 영광과 광채를 비추어 줍니다. 그리스도의 비둘기를 빛나게 하는 은혜란 경건이라고 하는 황금 깃털입니다(시 68:13)

대적들과의 전투시에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전쟁 (성전 聖戰)에 임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춘 거룩하고 위엄있는 모습이요 주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이 의와 옳은 행실로 단장하는 광경을 암시 합니다.

'거룩한'(코데쉬)은 원래 분리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떨기나무 불꽃을 보고 가까이 가려고 하자 하나님은 그곳이 거룩한 땅이니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출 3:1-5).

또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인 하늘은 땅과 분리되어 있어 거룩한 곳으로 말씀합니다(신 26:15).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속죄받고 구별된 교회는 그들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거룩해져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즐거이는 '자발성'이라는 뜻이며,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자들이 주께 "낙헌제"를 드릴 것임을 나타냅니다.
(시 119:108)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그들은 자발적일 뿐만 아니라 '자발성' 그 자체입니다. 주의 백성이 너무도 흔쾌히 그리고 자발적으로 주께 헌신하며 주의 통치에 복종하고 주께 합당한 제사를 드릴 것이며, 또한 주의 나라를 위한 전투에 자발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인도하심은 있지만 강압은 없고, 지시는 있지만 강요는 없습니다"(고라누스<Gorranus>). 결단이 있지만, 강제력은 전혀 개입되지 않으며 의지의 자율성도 전혀 침해되지 않습니다. 주의 백성은 자신을 인도하시는 분을 자발적으로 따릅니다.

성령의 효과적인 은혜는 자연적인 자율성을 전혀 파괴하지 않습니다. 죄인들이 자발적이지 못한 경우에, 성령께서는 감미로운 방법을 통해 그들로 자발적인 심령을 갖게 하십니다. 성령의 인도마저도 그 인도하심을 받는 자의 자유 의지에 맞추어 행사됩니다. 그분이 이끄시지만, 사실 그 이끄심이란 기꺼이 따르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분명 존재합니다. 이는 개신교도들의 확고한 교리이며, 성경이 분명히 말씀합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즐거이 함은 다른 사람들이 거부하는 데 반해 그들은 자발적입니다 즐거이는 시련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자 하는 피조물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냅니다. 즐거이는 자신 속에서 하나님께서 소원을 두시고 행하시기를 원합니다. 즐거이는 모든 죄에 대해 '기꺼이' 죽고자 하며, 옛사람이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자신 안에 새사람이 이루어지거나 혹은 그리스도께서 사시기를 갈망합니다. 즐거이는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목적을 '기꺼이' 단념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목적이 자신 안에 실현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즐거이는 자연적인 방식으로부터 하나님의 방식에로 '기꺼이' 전환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믿음, 사랑, 순종, 이 세상에서의 경건하고 의로운 삶 등에 있어 자발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즐거이는 법이나 위협을 통한 강요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즐거이 헌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 -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 도다

이슬은, 사람들이 잠든 캄캄한 밤중에 조용히 생겨나, 죽은 나무 위든 초라한 풀잎 위든 그 어디에나 기꺼이 진주처럼 매달려 아름답게 치장합니다. 각각의 이슬 방울은 자그마하고 쉽게 사라지지만, 저마다 빛을 반사하고 나름대로 완벽한 구형(球形)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개별적으로는 연약하지만, 전체적으로 모이면 온 초장을 신선한 생기로 반짝이게 한다. 이슬이 보이지 않는 영향력에 의해 조용히 생겨나고, 연약하지만 무수한 무리를 이룰 때에는 강하며, 가장 낮은 자리에도 기꺼이 찾아가고, 또한 천상의 빛을 밝히 비추듯이,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이슬과 같아야 합니다.

반짝이는 아침 이슬에 비유된 것은, 그 왕과 전사들의 정복과 임재로 말미암아 기진한 세상이 그 활기를 회복하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에 관해 예언한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미 5:7)라는 구절도 그와 같은 상징을 나타냅니다.

성경에서는 이슬이 맺히는 것을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슬이 내려 땅을 신선하고 비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혜로 언급되며, 땅의 소출을 늘리기 위한 인간적 수단들과 대조됩니다.
욥은 "이슬 방울은 누가 낳았느냐"고 말했습니다(욥 38:28). 그리고 선지자 미가는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미 5:7)라고 선언했습니다.

시인이 '이슬'이라는 용어를,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써 낳으실 자들에게 적용했다면, 혈육이나 육신의 뜻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뜻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그분의 말씀과 성령의 강력한 권능에 의해 거듭난, 허다한 개종자들을 묘사합니다.

이슬이 매우 아름답듯이, 이 자발적인 회심자 무리들은 거룩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리스도의 영적 후손들이 무수하게 생겨나 온 땅에 퍼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유년의 이슬' 또는 '젊음의 이슬'이라는 표현으로써, 이슬 방울들처럼 무수한 청년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슬이 매일 아침 새롭게 맺히듯이, 회심자들 역시 부단히 생겨나게 합니다.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그 권능의 날이 실현되기를 부단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슬이 맺히는 목적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땅에 신선한 생기를 공급해 줍니다. 영적 이스라엘은 사람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게 하고 소성케 하는 이슬입니다. 또한 그것은 땅을 치장해 줍니다. 이슬은 마치 보석처럼 땅을 뒤덮습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낱낱의 자그마한 이슬 방울들이 아침 햇살을 반영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며, 하늘의 광채를 땅에 반사시킨 것입니다.

어느 프랑스 여행자가 유대 땅에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아침에는 마치 비가 내린 듯 땅이 이슬로 촉촉히 젖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슬이 신선함을 상징하듯이, 교회는 그들에 의해 새로워지고 크게 번성합니다.  엄청난 수효를 나타내기 위해 해변의 모래와 함께 이슬이 거론되곤 합니다. 수효 면에서, 셀 수 없을 정도인 새벽 이슬 방울들과 같을 것입니다.
메시아의 백성은 그 누구도 헤아리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수효이다(계 7:9).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입니다.(잠 14:28). 주의 백성은 적은 무리가 아니라 온 땅을 적시는 이슬처럼 중다할 것입니다. 이슬로 인해 땅이 축축해지며 생기를 되찾는 광경은 사람들을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이를 위하여 함께 해야 합니다
실력 있는 오르간 연주자이며 신학 교수였던 슈바이처는 여행 중에 우연히 벌거벗은 흑인 상을 보고서 남은 생애를 밀림의 불쌍한 원주민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아끼는 모든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의과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5년 뒤 의사가 된 그가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자 주변 사람들은 그가 사랑 때문에 그 동안 계획 해왔던 아프리카행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시었습니다. 마침내 슈바이처는 사랑하는 헬레네와 자신의 결심 앞에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녀와의 만남을 피하고 방황했습니다. 슈바이처가 자신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헬레네가 어느 날 그를 찾아왔습니다. 슈바이처는 헬레네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결심이 선 듯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헬레네, 난 누구보다도 당신을 사랑하지만 오랫동안 계획해 왔던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돕는 의사의 꿈을 버릴 수 없소. 당신의 남은 생애를 밀림 속에서 나와 함께할 수 있겠소? 만일 당신이 이러한 나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요.' 헬레네는 슈바이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핼쑥해진 모습은 그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헬레네는 사랑하는 슈바이처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습니다. '슈바이처, 그 동안 왜 혼자서만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셨나요. 저도 정식으로 간호 교육을 받은 사람이에요. 간호사인 저 없이 당신 혼자 그 일을 모두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요?' 그 뒤 헬레네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위한 간호사이자 슈바이처의 아내로서 평생 동안 헌신적인 봉사자로 살았다 합니다.

신랑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우리에게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헌신 할 것을 원하십니다.

교육하며 선교하며 봉사하며 주의 날에 주의 백성된 우리가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함으로 새벽 이슬 처럼 번성케하는 은총으로 함께 하심 믿고 헌신함으로  1907년 처럼 다시 부흥하는 역사에 동참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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