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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의 본분 (전 1-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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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본분 (전 1-12장) 

전도서는 명료한 해석이 힘든 책입니다. 특히 “해 아래” 살아가는 타락한 인생들의 헛된 삶을 표현하는 도중에 간혹 등장하는 긍정적인 표현들은 지금도 해석상 논란이 많습니다. 그러한 부분들은 일단 피하기로 하고, 오늘은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는 전도서의 기본적인 가르침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전도서에는 “해 아래”라는 표현이 27번 정도, “헛되다”는 표현이 35번 정도 발견됩니다. 여기서 ‘해 아래의 삶’이란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의 삶, 곧 하나님과 관련 없는 삶을 뜻합니다. 그 삶에 대한 총평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어로 “하벨 하발림 아마르 코헬레트 하벨 하발림 하콜 하벨”이라 읽습니다. 시작부터 힘 빠지고, 맥 풀리고, 기운 없게 하는 소리지요. 한편으로는 인생의 절망스러움을 맛본 철학자의 절규처럼 들리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집착과 번뇌에서 해탈한 구도자의 도튼 소리 같기도 합니다.

이후의 말씀들은 왜 인생이 이처럼 허무한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실례를 기술합니다. 전반적으로 요약해보자면, 첫째로 자연과 인생은 끊임없이 순환할 뿐이어서 해 아래 새것이 없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둘째로 지혜와 지식, 소유와 명예 업적 등의 추구들이 끝이 없고 결국은 무익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좀 더 나아 보이는 삶이 있으며, 성취와 획득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들은 고달픈 광야길 같은 인생살이의 갈증을 달래는 잠깐의 오아시스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파도 같이 덮쳐오는 죽음은 그 모든 즐거움을 모래성처럼 쓸어가 버리므로 결국 아무 차이가 없게 만듭니다. 셋째로, 인생의 패턴이 수학공식처럼 권선징악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종잡을 수 없어서 바람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 말씀들은, 안간힘을 쓰면서 끝까지 포기치 않고 버텨보려는 사람에게,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아 보입니다. 힘든 인생이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은 면만 바라보며 살려는 희망을 여지없이 빼앗아버리는 것 같고, 일곱 번 넘어졌으나 여덟 번 일어서보려는 불굴의 의지를 사정없이 짓밟아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치고 피곤한 마음에 위로를 얻고자 읽었다가는 낙심하기 십상입니다. ‘너희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고, 애쓰고, 지혜를 다 짜내어봐라, 결국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삶에 대해 비참하게 묘사하면서 절망적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전도서가 정경이 맞는지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신약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로마서 8장 20절에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을 보시기에 좋도록 결함 없게 창조하셨습니다(창 1).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사람을 정직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많은 꾀를” 내어 스스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3:11, 7:29).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 그저 해 아래 있는 삶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연인이 허무에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의 비참함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였기 때문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이기도 합니다(요 15:5). 성경은 참 소망을 말하기 전에 언제나 인간이 철저한 절망 상태에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어떤 지혜로도 벗어날 수 없고,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비참함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의로워져보려고 하다가 철저히 절망 했습니다. 열 한 제자들도 인간적인 의리로 주님을 따르려다가 철저한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치기까지 그들의 삶을 몰아가셨습니다. 인생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인간은 기대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해 아래 있는 어떤 것을 의존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참으로 허무한 것임을 처절하게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해 아래의 삶’에서 잠시 잠깐 느끼는 만족을 추구하지 않고, 영원한 만족이 있는 ‘해 위의 삶’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철저한 절망이 비로소 경건의 시작인 셈입니다. 참 선지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먼저 선포한 후에 회복을 예언함으로써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했습니다. 반면에 거짓 선지자들은 언제나 ‘괜찮다, 괜찮다’하며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게 하고, 근거 없는 희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참으로 절망하여야 할 때, 절망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사람들입니다. 해 아래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희망들을 제시함으로써 그것들을 향해 젊음을 불태우고 정신없이 달려가도록, 헛된 것에 바쁘게 함으로써 삶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해 아래의 삶에 대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철저한 절망의 고백을 빼앗아버렸고, 해 위의 삶에 대한 갈망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인생의 헛되고 헛된 삶 가운데서 유일하게 헛되지 않는 것, 유일하게 의미가 있고 유익한 삶이 무엇입니까? 전도서의 결론인 12:13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람의 본분”은 직역하면 ‘사람의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5:58절은 같은 맥락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여기서 “주의 일”이란 종교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특별한 종교 활동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존재로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가는 삶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주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성도들 역시 해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주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해 아래 있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도 해 아래의 삶이 주는 만족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만족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조차 주 안에서 살아가다가, 장차 주님의 재림 후에는 해조차 필요 없는 완성된 천국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게 될 사람입니다(계 21:23). 그곳은 우리 주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한 곳입니다(계 21:4).

그렇다면 사람이 마땅히 해 아래서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켜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전도자는 마지막 장인 12장에서 하나님을 3가지 이미지로 소개합니다. ‘창조주’(1)와 ‘목자’(11)와 ‘심판자’(14)의 이미지입니다. 첫 번째 이미지는 나의 삶을 의미 있게 창조하신 내 삶의 주인 이미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려는 목적을 두고 나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정하신 인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각기 제 길로 가는 양을 품에 안아주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의 이미지입니다. 사람들은 뭔가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에게 투자합니다. 밀어주면 될 만한 사람을 후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절망적인 존재를 구속하셨습니다. 원래 자신의 소유였던 것이 절망적으로 망가졌음에도 독생자의 피 값으로 사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단지 창조하시기만 하고 나 스스로 알아서 살도록 두셨다면 우리네 삶이 어떻겠습니까? 당면한 절망적인 문제 속에서 모든 해결을 나 스스로 해야 한다면 능력이 부족하고 지혜가 부족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부담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잘못 살아온 인생, 실패한 인생, 못난 인생, 있으나 마나한 인생을 품에 안아주시며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하신 뜻대로, 인도하신 뜻대로 살아왔는지 평가하시는 심판자이십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은 다 화장실 두 개짜리 집을 장만하는 동안 너는 전셋집 하나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을 했느냐?’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많이 소유하고 성취하는 동안 너는 고작 그것밖에 못했느냐?’고 평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의 본분대로 그분을 경외하면서 그분의 뜻을 좇아 살았는지 평가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 저는 평생 수고하고 애써서 화장실 세 개 있는 집을 장만했습니다.’ 할지라도,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헛되고 헛되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사회에서도 이만큼 성공하고 업적을 남겼습니다.’ 할지라도, 그에게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태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헛되고 헛되도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답은 “생사간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생사간에 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나의 몸과 영혼이 모두 다 신실하신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성도는 이중으로 주님의 소유입니다. 창조주의 소유이며 구속주의 소유입니다. 주인이시므로 그의 소유된 우리의 존재와 필요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고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헛되고 헛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유일한 위로가 됩니다.

‘휙’하고 지나가버리는 한 해를 마감해가면서, 우리의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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