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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간증 (행 26: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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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간증 (행 26:1~32)

해명과 변명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민중 국어사전에서는 해명은 “까닭이나 내용을 풀어서 밝힘”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변명은 “사리를 분별하여 똑똑히 밝힘, 잘못이 아님을 사리로 따져 밝힘”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양주동 박사의 국어사전에서는 해명을 “의문되는 곳을 잘 설명하여 분명히 함”이라고 했고 변명은 “시비를 가려서 밝힘, 죄가 없음을 밝힘, 잘못이 아닌 점을 따져서 밝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만으로 보면 둘의 차이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볼 때는 해명은 보다 긍정적으로 느껴지는데 비해 변명은 부정적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어떤 오해를 받을 때 그것이 오해임을 밝히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떤 누명을 쓰게 될 때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잘못을 해 놓고 어떤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잘못하게 된 것처럼 이야기할 때는 이를 해명으로 받아드리기 보다는 그 누구라고 다 변명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변명하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그러한 변명을 하는 것을 더 나쁘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사람이 솔직하게 잘못했으면 그냥 미안하다 잘못했다 하면 될 것을 가지고 구구하게 변명한다고 나무라는 경우를 그래서 흔히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잘못을 한 것이 아닌데도 잘못한 것으로 상대방이 알 때 그를 바로 밝히고 싶은 마음이야 누구든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받아들이기에 따라 해명으로 보기는 사람도 있고 변명으로 보는 사람도 있기에 차라리 내가 잘못했든 아니면 오해로 잘못한 것으로 여기고 있든 상관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습니다.

한데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히려 모든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 상대방을 아주 못된 사람으로 여길 수도 있기에 말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애매한 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은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더욱 우리에게는 우리의 대변인이 되시는 성령님이 함께 계시기에 기회가 주어지기 전까지는 비록 그로 인해서 더욱 오해를 받을지라도 입을 다무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오직 하나님께서 모든 억울함을 풀어주시도록 간구하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다윗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께서 사랑스럽게 보시고 이윽고 모든 억울함이 다 풀려지도록 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당신 자신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주겠다”고 함으로서 바울이 드디어 입을 열어 자기의 억울함과 더불어서 예수를 전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바울을 고소한 이후 지금까지 사실 바울이 자기가 아무런 죄가 없음을 설명하고자 하였지만 바울이 입을 열기만 하면 무리들이 아우성을 치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기에 해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무리들은 바울이 하는 말을 단지 변명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것은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해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해서 바울이 자기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말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바울은 속 시원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게 됩니다. 오늘은 그 바울의 해명을 통해서 예수님을 전해나가는 그 내용을 함께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바울은 자기가 고소를 당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끝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아그립바 왕에게 “아그립바 왕이시여, 저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이 고소한 것에 대해 오늘 왕 앞에서 해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왕께서 유대인의 관습과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문제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아그립바 왕을 칭송하면서 정중하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제 말을 끝까지 들어 달라는 것입니다.”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드디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하는데 먼저 자기가 왜 고소를 당하게 됐는지부터 설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자기 동족들도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자기 종교의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 사람이고 바리새파 사람으로 생활하였음을 말하고 나서는 그럼에도 자기가 여기 서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한 소망 때문인데 이 소망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이나 낮이나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약속은 바로 메시야가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아그립바 왕은 메시야를 부정하면서 마음을 닫아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이 소망 때문에 고발을 당한 것이라고 하면서 슬쩍 “여러분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이 믿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그리고는 얼른 다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합니다. “자기도 처음에는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도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그들을 죽이는데 찬성도 했으며 회당마다 찾아다니면서 여러 번 그들을 처벌까지 했고 강제로 예수님을 저주하게 했노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기회를 얻어서 예수님을 전하고자 할 때 간증을 통해서 예수를 소개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 믿기 전의 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너무 자세하게 말하다보면 오히려 예수를 전하는데 지장을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상대방은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데 막무가내로 내 말을 시작하다 보면 상대방은 마음을 닫아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상대방을 칭찬해주기도 하면서 기분을 좋게 만들어 내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요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게 될 터인데 만약에 그날이 오늘이라고 한다면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하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도 상대방이 흥미를 가지고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 대해 상대방이 어떤 답변을 하든 그 상대방의 말이 동의를 해주고 나도 전에는 그런 마음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리고 나서 내가 예수 믿기 전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전해 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내가 생각하던 것도 상대방과 다를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살았던 모습 역시 상대방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알림으로 상대방이 우리의 말을 더 마음을 열고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마음에 도발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되고 시비조로 이야기를 해서도 안 됩니다.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그러한 상대방을 칭찬해가면서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하면서 “저도 예전에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하면서 예수 믿기 전의 나의 모습을 간략하게 설명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에게로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기 바울의 간증은 아주 모범적입니다. 바울이 말을 시작하면서 먼저 아그립바 왕을 칭찬한 것도 바로 아그립바 왕의 마음이 열려서 그 말을 끝까지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최고라고 하는데 그것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상대방의 말을 다 인정해주고 당연하다고 하는데 누가 마음을 닫겠습니까?

다음으로 바울은 자기가 변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저는 회당마다 찾아다니면서 여러 번 그들을 처벌했으며 그들을 향한 저의 분노가 어찌나 심하였던지 저는 다른 도시에까지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 다마스커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변하게 된 계기를 구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정오쯤 되어 하늘에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저와 제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저는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로 차 보아야 너만 다칠 뿐이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제가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라! 발을 딛고 서라! 내가 이렇게 네게 나타난 것은, 너를 나의 일꾼으로 삼아 네가 본 것과 앞으로 내가 네게 보여 줄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너를 이 백성과 이방인들에게서 구원할 것이며, 너를 이방인에게로 보내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겠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하고, 또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백성들과 한자리에 들게 하겠다.’ 아그립바 왕이시여, 저는 하늘로부터 받은 이 환상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함으로서 자기의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된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증을 통해 예수를 전할 때도 이렇게 내가 깨닫게 된 예수 내가 만난 예수를 구체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전하게 되면 듣는 이도 막연하게 들을 수밖에 없기에 구체적인 믿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가 예수를 믿게 되기가 그만큼 어렵게 되고 맙니다. 따라서 내가 어떻게 예수를 만나서 믿게 됐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보다 쉽게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듣는 이가 “아하 나도 저렇게 해서 예수를 만날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나도 천국 백성이 될 수가 있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어 보다 쉽게 믿음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이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전해 들었거나 아니면 바울처럼 어떤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들어서 아니면 어떤 책이나 간증문을 읽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어떤 특별한 계기를 통해 환상이나 주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큰 어려움이나 큰 병에 걸려 있을 때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은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됨으로서 그 예수님을 확신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내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깨닫게 됐는지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작정하시고 택하신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갈 때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그런다고 왜 믿지 못하느냐고 대들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런 그의 생각을 오히려 존중해주고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조용히 그리고 웃는 낯으로 떠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고 그러한 기회가 반복이 될 때 점점 그의 마음이 열려서 이윽고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때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회는 단 한 번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을 전할 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하는 마음으로 전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를 망설인다던가 거절할 경우라도 그냥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때는 다음으로 미룰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치열한 영적인 전쟁입니다. 전쟁이란 단 한번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오래 시간을 계속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미리 준비할 필요도 있습니다. 먼저 막힘없이 예수님을 전할 수 있도록 간증문도 미리 써보고 복음 제시의 과정과 내용도 미리 외워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결코 빼놓아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항상 친절해야 하고 계속해서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 내게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질 때 내가 전하는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 역시 관심을 가지고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 우리가 만난 예수를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 그리고 가까운 이웃들에게 끊임없이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변화된 자기의 모습에 대해서 바울은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다마스커스 사람들에게,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중에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한 모습을 행동으로써 보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유대인들이 저를 성전에서 붙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날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본 것을 이 자리에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앞으로 일어나리라고 예언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다는 것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실 것과 자기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포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할 때도 전에는 내가 이런 사람이었고 이런 삶을 살았는데 그때 내 마음 상태는 어땠는지를 간단히 전하고 그 다음에는 어떤 계기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됐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내 마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리고 그 다음 나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또한 구체적으로 전하면서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서 생겨진 변화임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예수님을 상대방도 믿고 이렇게 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까지가 간증을 통한 전도가 되겠습니다.

바울은 바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 이렇게 예수님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에 대한 반응은 결코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바울을 향해 큰 소리로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너의 많은 학식 때문에 네가 미쳐 버렸다”라고 말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렇지만 바울은 오히려 담대하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베스도 각하,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제가 드린 말은 다 사실입니다. 전부 맑은 정신으로 하는 말입니다. 아그립바 왕이 이 사실을 알고 계시므로 제가 거리낌 없이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왕이 모르실 리가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시여, 예언자들의 말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합니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바울이 대답합니다.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왕뿐만 아니라 지금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결박된 것 말고는 저처럼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버니게를 비롯해서 그들과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그 방을 나가버립니다.

지금 당장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사람을 놓고 바울은 지금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것도 재판을 받는 죄수의 신분으로 자기를 변호하도록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재판을 주관하는 입장에서 그것도 통치자의 입장에서 죄수의 말에 그대로 공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지켜보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그 예수님을 나도 믿겠다고 한다면 유대 나라를 통치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속으로는 그 예수님을 나도 믿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아닌 것처럼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의 의원이었던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그랬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나중에 보니 그들은 누구보다도 더 강한 제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의 결과만을 가지고 성공이다 실패다 하고 판단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망설이면서 뒤로 미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이미 우리가 예수님을 전했다는 것은 그 사람 마음속에 예수님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하게 될 때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사람이요 또한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보십시오. 이들이 바울에 대해서 핀잔을 하고 아닌 것처럼 하고 재판정을 나섰지만 그들이 무어라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은 사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힐 만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그립바 왕 역시 베스도에게 “이 사람이 황제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지금 석방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마음이 상당히 움직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들이 뒤에 어떻게 됐는지를 더 이상 언급이 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들이 분명 변화되었음을 믿습니다. 그것은 당시 아그립바 왕이 누이 버니게와의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는데 버니게가 결혼을 해서 오빠 곁을 떠남으로 소문이 잠잠해지게 된 것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다음 아그립바 왕은 로마로 가서 그곳에서 행정관으로 지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분명 그리스도인들과의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전하는 과정도 지켜보았습니다. 이 열정이 우리들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온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다 바울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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