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서주일] 삶을 변화시키는 성경 (히 4:12~13)

  • 잡초 잡초
  • 480
  • 0

첨부 1


삶을 변화시키는 성경 (히 4:12~13)

1977년 소련의 천재 수학자인 아나톨리 슈차란스키(Anatoly Shcharansky)는 이스라엘로 망명을 시도하다가 비밀경찰(KGB)에 체포되었습니다.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13년 동안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지옥같은 끔찍한 환경에서도 그가 버틸 수 있던 비결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히브리어로 된 시편을 읽고 또 읽으며 연구했습니다. 슈차란스키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시편을 읽고 연구하는 것으로 인해 엄청난 상실감과 슬픔에 대한 감정이 밝은 희망으로 점차 바꾸어지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시편은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늘 시편을 곁에 끼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시편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는 눈밭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어죽을 각오를 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간수가 시편 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아내는 구명운동을 전개합니다. 어느 대학에서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에 명예학위를 수여하게 되었습니다. 수락연설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감옥의 독방에서 다윗의 시편들과 함께 갇혀 있으면서, 수 천 년 전 이스라엘의 왕에게 넘쳐흐르는 감정을 발견하였습니다." 슈차란스키는 독방에서 다윗의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매년 지키는 주일이지만 성경의 가치를 다시 일깨우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을 가지게 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는 "성경이 있다는 것이 인류 최대의 축복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기독교는 성경이 중심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있던 성경의 진리를 다시 발견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성경이 가진 생명력을 발견한 것입니다. 통계에 보니 일주일 내내 주일 외엔 성경을 펴보지 않는 성도들이 많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보다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성경의 가치를 다시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성경을 삶의 기본으로 삼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담고 있으며, 삶을 변화시키는 책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이유는,


첫째로 살아 있기에

어떤 사람이 비행기에서 식사할 때 바퀴벌레를 발견하게 됩니다. 화가 난 그는 즉시 항공사 사장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며칠 후 사장의 정중한 사과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손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문제의 비행기 운행을 취소시켰습니다. 비행기의 모든 좌석 커버와 카펫을 다 바꾸려고 새 것을 주문했습니다. 또한 손님에게 불량음식을 제공한 스튜어디스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우리 비행기를 이용하여 주십시오.”편지를 받고 그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봉투 안에 자신이 보낸 편지도 같이 들어있었습니다. 사장의 비서가 실수로 함께 보낸 것입니다. 편지 제일 위쪽에는 사장이 비서에게 쓴 메모가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 친구한테 바퀴벌레로 인한 사과에 대한 표준형 샘플 편지를 보낼 것." 그 글귀를 보고는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매우 상투적인 편지임을 알고 그는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여기의 '살았고' 는 '조온' 이라는 현재분사 단어입니다. 즉 지금 현재 살아 꿈틀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원문에는 이 단어를 문두에 둠으로써 더욱 생생히 나타냅니다. 말씀은 단순히 공기를 파동 시키는 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이며 인격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구절에 의하면 말씀이 살아 있는 인격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운동력이 있다' 는 말은 '말씀이 움직인다' 는 말이 아니라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 가운데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고 놀라운 생명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왜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를 일으키지 못합니까? 그것은 말씀에 대한 상투적인 태도 때문입니다. 말씀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살아나게 됩니다. 상투적인 말씀은 말씀을 살아 있는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상투적인 말씀은 하나님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대할 때 상투적으로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살아 있는 인격으로 믿고 대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예리하기에

황해도 풍천에 안 서방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산에 들어가 도사로부터 축지법과 변신술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도사인 스승이 외출했습니다. 그 사이에 방에 있던 도술서를 읽고 그대로 하자 순식간에 짐승도 되고 새도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도통했으니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귀가했습니다. 귀가 즉시 변신술을 사용해 이마와 가슴에 변신 주문을 써 붙이고 우물가 버드나무에 올라앉아 아내가 나오길 기다리며 '뻐꾹, 뻐꾹' 하고 울었습니다. 아내가 나와 보고 '여보, 뭐해요?' 라고 묻자, 안 서방은 '여보, 내가 뻐꾸기로 보이지 않소?' 하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내가 '당신 미쳤어요?' 라고 했으며, 그 후로 동네 사람들은 안 서방을 '안 뻐꾸기'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남보다 기도 조금 더 하고 성경 조금 더 읽으면 당장 무엇인가 변한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만 남보다 무엇인가 잘한다고 해서 마음이 높아져 영적으로 높은 사람처럼 행세하면 오히려 풍천의 안 뻐꾸기처럼 놀림감이 될 뿐입니다. 말씀을 통해 신기한 사람으로 변신하려고 하지말고 말씀이 나를 수술하게 함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변화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여기에서 '혼과 영' 은 영혼을 뜻하고 '관절과 골수' 는 육신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도 수술하고, 육신도 수술하는 칼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말씀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질병도 치유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육신은 원래의 질서를 잃어버릴 때 병이 생깁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되면 마음에 평안이 임하면서 잃어버린 질서가 회복되며 치유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영혼과 육신에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말씀이 심령을 찔러 쪼개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자신을 찔러 쪼개도록 하기보다는 자신이 말씀을 찔러 쪼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신기하게 잘 해석하는 사람을 '말씀을 잘 쪼개는 사람' 이라고 불렀습니다. 대개는 종말론을 강조하고 다니엘과 요한계시록과 같은 말씀을 깊이 쪼갠다고 하면서 이상하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마음대로 쪼개다 많은 교회와 가정들이 쪼개지고, 영혼과 인격과 신앙이 쪼개졌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쪼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통전적으로 보면서 말씀 앞에 자신의 심령을 쪼개야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쪼개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그때 그 말씀을 깊이 파헤치고 엉뚱하게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닙니다. 항상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찔러 쪼개는 것은 사망의 길이고, 말씀이 나를 찔러 쪼개도록 하는 것만이 생명의 길임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감찰하기에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어거스틴(Augustin)입니다. 신학자로서 영성가로서 교회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동안 이방 종교에 심취하기도 했고, 성적으로 심히 타락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믿음의 사람으로 회심하게 됩니다. 참회록에 보면 그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해 어거스틴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한 아이의 노래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주 단순한 가사였습니다. "집어서 들고 읽어라, 집어서 들고 읽어라(Tole lege, tolle lege- Take it up and read it, take it up and read it)". 순간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저절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노래가 거룩한 명령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성경을 펼쳤을 때 첫 번째 나오는 성경 구절이 노래에 대한 해석이라고 믿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성경을 재빨리 펼쳐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선이 닿는 첫 번째 구절을 읽었습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입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경 구절을 접하자마자 마음은 확신의 빛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의심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여기의 '드러나느니라' 의 '테트라 켈리스메나' 는 '목을 뒤로 젖히다' 란 의미로 레슬링선수가 상대방의 목을 감아 뒤로 젖히는 행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떤 것도 은폐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감찰하여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치유하기 위해서 입니다. 마치 환자가 병원에 갔을 때 엑스레이나 초음파를 통해 나타난 것을 확인 한 후 수술하여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은 여지없이 잘못을 드러내어 지적합니다. 그리고 회개시킴으로 치료하여 줍니다. 어떤 문제라도 드러내어 해결시켜 줍니다. 혹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말씀 안에 길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 속에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치유되는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가장 귀한 책인 성경을 바로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아무리 귀한 성경이라도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무용지물입니다.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만이 생활의 지침서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이 삶을 주장하게 될 때에 위대한 삶이 펼쳐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디 들고만 다니는 성경, 책상 위에 놓아두는 성경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성경으로 삼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