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행복에 이르는 길(9) : 장애물(8) 고독↔친교 (딤후 1:13-18)

  • 잡초 잡초
  • 308
  • 0

첨부 1


행복에 이르는 길(9) : 장애물 8-고독↔친교 (딤후 1: 13-18)

<사람이니 외롭습니다>
아내에게 꼭 잡혀 기를 못 펴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참다못해 정신과 의사에게 찾아가 상담을 요청했더니만 작은 책 한 권을 주며 읽으라고 했습니다. 자기 주장을 확실히 하고 살라는 책이었습니다. 다 읽은 다음 남편은 집으로 가자마자 아내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큰소리를 쳤습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이 집의 대장이므로 당신은 무조건 내 명령에 따라야 하오! 당장 맛있는 저녁상부터 차려 오시오. 식사가 끝난 뒤 당연히 디저트도 준비해야하오. 내가 식사 상을 물린 뒤에는 몸을 담가 푹 쉴 수 있도록 욕조에 뜨거운 물을 준비해놓으시오." 이 정도로 큰소리를 친 뒤, 남편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가만 있자. 목욕을 끝낸 뒤 내 옷은 누가 입혀주고 내 머리는 누가 빗겨주지?" 중얼거렸습니다. 그 때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톡 쏘아 부쳤습니다. "누구겠어요. 장의사에서 염하는 사람이지!"

    이 세상에서 외롭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정한 아내와 남편 사이라고 할지라도 서로가 알지 못하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있어도 외로움은 찾아옵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모임 한 가운데 있어도 외롭습니다. 그래서 '군중 속에 고독'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우러러보는 최고의 권력과 인기를 한 몸에 누려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권력이 높을수록 고독은 더 심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지하철에 누워 있는 노숙자들보다 백악관이나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이 훨씬 더 외로울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에 외롭습니다.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이라도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존스 합킨스 의대의 제임스 륀치(James Lynch) 교수는 미국에서 심장병이나 암에 걸려 죽게 하는 넘버 원 킬러가 외로움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냉담합니다. 심지어 노부모를 버리다시피 하고 한 번도 찾지 않는 자식들이 늘어만 갑니다. 노인들 가운데 자살하는 분들은 대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그럽니다. 특히 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뒤 외로움은 더더욱 심해졌습니다.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어버리고 컴퓨터만 껴안고 사는 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외로움이 최고조에 이른 21세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외로움을 이기는 법>
행복에 이르는 길을 막고 선 여덟 번째 장애물은 '고독', 즉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은 무엇일까요? 누군가 외로움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외로움은 이웃과 의미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느낌이다." 참 좋은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외로움은 그냥 홀로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웃과 함께 있어도 그 관계에 의미가 없다면 외롭습니다. 남편하고 혹은 아내하고 살을 맞대고 살아도 아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외롭습니다.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누리는 스타들 가운데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팬들과 주변 동료들에 의해 둘러 쌓여 있지만 그 관계가 의미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다 순간적인 기분이나 자기 이해관계 때문에 찰싹 달라붙었다가 쉽게 떠나갑니다. 자기를 향해 진정한 사랑과 이해심을 가진 올바른 이웃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 쌓여있어도 외로운 법이지요.

여러분,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까? 외로움을 이겨야만 합니다. 외로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친구들을 많이 사귄다고요. 수백 명의 친구들을 사귄다고 해도 쌍방 간의 관계가 형식적이고 어떤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극장이나 파티에 간다고요. 그냥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즐긴다고 해서 외로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파티가 끝난 뒤 찾아오는 허전함과 외로움은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술이나 담배나 마약, 도박, 쇼핑, 인터넷 등에 손을 대서 외로움을 잊는다고요.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런 것들에 몰두해보지만 외로움은 잘 가라앉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이웃과 의미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이런 것들에 기대보지만 까딱 잘못하면 그 결과는 중독증이라는 무서운 질병만 불러올 뿐입니다. 외로움을 달래보려고 이런 것들에 지나치게 의존하다보면 어느새 그것들을 하지 않으면 괜스레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중독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외로울 때 무엇에 의존하는가를 잘 살펴보세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누군가와 교류하며 의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최초의 교류와 의존 대상은 엄마입니다. 아동 교육학에 '분리 공포증'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최초의 의존대상인 엄마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면서 엄마로부터 점차 자연스럽게 분리되어가야만 합니다.

이렇게 아이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인격체로 자라나가는 과정 속에서 엄마 대신 무엇인가를 의존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인형이나 장난감, 아니면 특별한 옷이나 담요 등에 유달리 집착합니다. 엄마에게 의존했던 것이 이와 같은 물건에 대한 의존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학원을 운영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들이 학원에 올 때 인형이든 장난감이든 핸드폰이든 간에 반드시 무엇인가를 하나씩 손에 쥐고 온다는 것입니다. 엄마 대신 그 물건에 의존한다는 말이지요!

외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반드시 무엇인가에 의존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의존하는 대상이 무엇입니까? 돈, 담배, 술, 인터넷, 도박, 쇼핑, 운동, 등산, 무엇에 의존하든지 간에 그것만으로 외로움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 말씀에 의거해서 세 가지 단계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는 대로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13-14절).
하나님은 '여호와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겔 48: 35).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는 곳마다 거기에 계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고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엄청 신경을 씁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항상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조금만 이웃의 눈초리가 이상하다 싶으면 고민합니다. 혹시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가치를 하나님께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본문 13-1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타이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첫째, 바울로부터 전해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건전한 말씀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성경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무엇 무엇 때문에" 우리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둘째,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맡은 바 선한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대하여 어떻게 말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자녀라는 사실이 아닙니까?

중세의 어떤 유명한 수도사가 시기심에 가득찬 사람들로부터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부당한 공격을 받았던 것이지요. 어느 날 실의에 찬 표정으로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개 한 마리가 아무 이유도 없이 빨랫줄 위에 걸린 깔개를 향해 짖으며 또 물고 뜯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 수도사에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지금 저기 개 한 마리가 하는 짓이 너의 명성에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네가 나를 믿으면 너의 명성은 물론이고 너의 모든 것을 지켜주마."

그렇습니다. 우리의 명성이나 인기나 환경에 우리의 행복이 달려있지 않습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나 내 이웃이 나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도 전부가 아닙니다. 항상 나는 하나님이 끔찍이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의식을 잊지 말고 이것을 꼭 붙들고 지킬 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둘째로, '고독'을 '독거'로 바꾸십시오(15절).
15절에 보면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바울을 버린 대표적인 사람들이 부겔로와 허모게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외로움을 느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이 그를 버렸더라도 그는 하나님과 여전히 교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버렸다고 할지라도 그는 고독에 빠진 것이 아니라 '홀로 있음의 영성'인 독거 상태에 들어갔던 것이지요. 

'고독'(loneliness)과 '독거'(solitude)는 비슷한 말 같지만 다릅니다. 둘 다 혼자 있다는 사실에서는 같지만 그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고독한 상태에 있으면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독거 상태에 있으면 평안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고독은 내적으로 비어 있는 상태이고 독거는 내적으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고독은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으면서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심리적 상태이지만 독거는 홀로 하나님의 은밀한 목소리를 듣는 영적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홀로 계셨을 때에는 틀림없이 독거 상태였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홀로 계셨습니다(마 4: 1-11). 12제자를 선택하시기 전 밤을 새우며 홀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눅 6: 12).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마 14: 13).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다음에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셨습니다(눅 5: 16). 이와 같이 독거야말로 예수님의 영성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여전히 외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독거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도 말했습니다. "독거할 줄 아는 사람만이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day together)와 '홀로 있을 때'(day alone)를 잘 구분해야 합니다. 디이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말했습니다. "독거 없이 교제만 원하는 사람은 말이나 감정이 공허해질 수 있고, 교제 없이 독거만 구하는 사람은 무상과 자기황홀, 실의의 심연에 빠져들 수 있다."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는 어울려야 하고, 홀로 물러나 명상에 침잠해야할 때에는 홀로 있을 줄 알아야 합니다.

독거라는 영성훈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침묵훈련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이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말만 삼간다고 해서 침묵이 아닙니다. 침묵은 말할 때와 하지 말아야 할 때를 잘 분별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홀로 있으면 온갖 주의를 하나님께로 기울여 침묵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초조하지 않고 뭔가 세상적인 것에 대신 의존하지도 않는 독거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고독을 독거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서로가 위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십시오(16-18절).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 오네시보로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16-18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바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바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와서는 더욱 열심히 바울을 찾아 만나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에 하나님께서 넘치는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바울과 같은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는 오네시보로와 같은 위로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외로울 때 누군가 건네주는 따뜻한 말 한 마디는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힘에 겨워 땀을 뻘뻘 흘릴 때 누군가 내 짐을 함께 들어주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바울에게는 오네시보로와 같은 좋은 친구가 있어서 옥중에서도 외롭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외로운 이웃들에게 오네시보로와 같이 좋은 버팀목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어떤 간호사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몹시 바쁜 아침에 늙수그레한 신사 한 분이 엄지손가락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왔습니다. 그 신사는 자기가 아침 9시에 약속이 있기 때문에 빨리 치료를 해달라고 성화였습니다. 치료해주던 간호사가 그렇게 바쁘시면 왜 의사 선생님과 예약을 하시지 그랬느냐고 하면서 도대체 어딜 그렇게 바삐 가야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신사는 아내와 함께 아치 식사를 하기 위해 요양원에 가야만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간호사가 부인의 건강에 대해서 묻자 치매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손가락 치료를 마친 뒤 조금 늦었는데 부인이 걱정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자기 아내는 5년 동안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깜짝 놀란 간호사가 "아니, 그렇다면 부인께서 아저씨를 알아보지 못하는데도 굳이 서둘러 가셔야만 할 이유가 뭐지요?" 그 때 그 신사는 간호사의 손을 정답게 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내는 나를 몰라봐도 나는 내 아내를 알고 있으니까." 이 말을 들은 간호사는 "그래 내가 원하는 사랑이 바로 이거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런 남편 이런 아내, 이런 이웃들이 있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넘어>
세계적인 성녀 마더 테레사가 생전에 동료 신부들에게 쓴 서신이 발표되어 큰 충격을 던져준 적이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누구나 추앙했던 테레사 수녀가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서신 내용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주께서 제 안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둠 냉담 공허의 현실이 너무도 커서 제 영혼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저는 너무 큰 침묵과 공허함으로 보아도 보이지가 않고 들어도 들리지가 않습니다. 기도를 할 때 혀는 움직이지만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테레사 수녀도 신앙적인 회의와 번민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테레사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울부짖어도 철저한 침묵만 계속되었을 때 그녀 역시 잠시 흔들린 적이 있었던 것뿐입니다. 테레사도 인간이었기에 때로 너무 힘들고 외로웠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어둠과 번민과 회의와 고독의 순간을 16세기의 위대한 수도사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은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이라고 불렀습니다. 불러도 대답 없는 하나님의 절대 침묵, 철저한 방기(放棄)를 일컫는 말이지요. 그러나 위대한 성녀 테레사 수녀조차도, 아니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이와 같은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건강하기 위해 시퍼렇게 살아있는 몸에 칼을 대고 피를 흘리는 수술을 받아야만 하듯이 '영혼의 어두운 밤'을 통과할 때 찬란한 새벽빛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영혼의 어두운 밤'과 같은 절대 고독, 절대 침묵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마더 테레사가 하나님을 부인했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에 외로운 적이 있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고독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 고독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독거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둘러 쌓여 행복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외롭고 쓸쓸할 뿐 아니라, 홀로 있을 때에는 불안과 초조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고 항상 충만한 독거, 그런 홀로 있음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