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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가 알아야 할 4가지 (엡 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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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알아야 할 4가지 (엡 1:15-19)

오래 전의 이야기다. 시골 마을 외딴 곳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외아들은 미국으로 유학가서 성공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가 병들어 눕게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아들을 욕했다. 의사가 왕진을 왔다가 벽에 붙여 놓은 이상한 종이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아들에게서 매달 꼬박꼬박 부쳐온 수표였다. 할머니는 이상한 쪽지가 수표인 것을 알지 못하고 아들을 원망하면서 가난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가장 불행한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고도 그 복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들이 보내준 수표를 종이 쪽지처럼 여긴 할머니와 같은 것이다.

사도 바울은 앞서서 4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신 신령한 복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1)하나님의 선택 2)양자삼으심 3)죄사함 4)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심 5)기업으로 삼으심
6)성령으로 인치심

이 놀라운 복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을 감출 수 없어 터져나오는 감격의 표현이 3절의 말씀이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그러나 문제는 신령한 복보다 육신의 복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기도의 내용이 17-19절의 말씀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기도는 4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하나님을 알게 하소서!(17절)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1)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아는 방법 - 자연계시 -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
2)하나님이 알려 주셔서 아는 방법 - 특별계시 -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하나님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에 요청했다. “선생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요14:9,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예수님이 육체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오늘날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간구대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았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논리적 증거를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만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요 하나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큰 사랑과 그 은혜를 더 많이 알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박윤선목사,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반 영적 지식에서 더 밝은 영적지식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지 않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열망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주님을 사랑한다면,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성경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어찌 예배 참석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어찌 헌금드리는 일을 아까워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 식어진 증거일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베푸신 신령한 복의 가치는 세상적인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 복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복을 누리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에 비례한다. 얼마나 친숙한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깊이 알 때 우리는 더욱 더 깊은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 방법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내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더 알게 하옵소서.” 구하는 자에게 주실 줄 믿는다.

찬송가 506장,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에 소원 내 평생에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2.소망!(18상)

(엡 1:18상)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부르심의 소망이란 - 하나님께서 택하사 불러내시고 불러 내신 자에게 주실 미래적 소망을 뜻하는 것이다.

마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 비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더 쓰기 위해 낮에 장터에 나갔다. 가서 보니 대낮에 노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주인이 일꾼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있소?” 일꾼들이 대답한다.
“우리를 불러주는 사람이 없나이다.”

일하고 싶은데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실업자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면 그 인생은 실업자와 같은 불쌍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 부르심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르심의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디도서에서는 “복스러운 소망”이라 불렀고, 사도 베드로는 “산 소망”이라고 불렀다(벧전1:3).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부르심의 소망”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은 불행해 진다. 왜냐? 그의 마음과 생각이 땅에 있기 때문이다. 땅에 있는 것은 영원하지 못하다.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성도의 소망은 하늘에 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가를 알면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을 능히 감당하고도 남게 되는 것이다.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는 이유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도록 기도해야 한다.


3.기업(18절하)

(엡 1:18하)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기업이란 말은 상속이란 뜻이다. 상속은 자녀들만이 받을 자격이 있다. 사도 바울은 앞서서 우리가 받은 신령한 복 중에서 자녀됨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자기의 아들들 - 성도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받게될 상속 - 그 기업의 영광스러움과 풍성함이 어떠한가를 알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구속함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죄사함 받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감사한다.

청년시절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후 종종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뜨겁다. 찬송가 495장을 부르면 그때의 감격이 되살아나 감사가 넘친다. 구속함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 땅에서도 구속함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감사와 찬송이 넘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기업, 그 영광스러움과 그 풍성함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장차 성도들이 받을 그 영광스럽고 풍성한 기업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1)완전한 몸
(고전 15: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2)거룩한 인격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3)상급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4)처소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5)권세
(계 20:4)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이 놀라운 기업들을 알면 현재 내가 당하는 여러 가지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현실의 고난과 부족함으로 조급하게 불평 원망하지 말자. 인내하며 장차 우리가 받을 천상의 영광스러운 기업들을 알기 위해 기도하라. 그렇게 할 때 현실의 나의 삶도 소망으로 충만해질 것이며 풍성해질 것이다. 조급함은 불신앙이다. 인내하며 기도할 것을 결단하라.


4.능력(19절)

(엡 1: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사람들이 다 물러간 후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에게 와서 물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쫒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 17:20)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많은 사건과 인물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빈부귀천을 떠나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다 응답받았다. 자신의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믿음이었다. 예)소경 바디매오, 문둥병자들, 수로보니게 여인, 혈루병 걸린 여인, 로마의 백부장

마 14장, 밤 중에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실 때 배에 있던 제자들이 “유령이다”고 외쳤다. 그때 베드로가 용기 있게 말을 붙였다. “만일 주시거든 나를 물 위로 걸어 오라 하소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바람소리에 놀라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주여 살려주소서!” 예수께서 즉시 베드로의 손을 잡아 주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

(마 14:3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의 능력은 예나 제나 변함이 없으시다. 그분은 이미 내게 오셔서 나를 만지셨다.
여러분, 이 자리에 나온 것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20년 걸린 사람, 30년 걸린 사람, 그 이상 걸린 사람도 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제는 그 능력의 어떠하심은 알고 사용해야 한다.

문제는 나를 죄악에서 건지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그 분에 대하여 믿지 않는 불신앙에 우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려는 불순종 때문이다. 이것을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내 속에서 주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도록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한다. 입술로만 주님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도록 회개와 함께 의심과 불순종의 악행을 버리고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오래 전에 학생들과 함께 가나안농군학교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은 적이 있다. 설립자인 김용기 장로님은 일제강점기의 치욕을 당한 것은 백성이 무지한 탓이라 했고, 백성들의 나태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농군학교 안에는 돌들도 누워 있는 것은 다 세워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농군학교의 구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알도록 배우자! 알도록 배우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이미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들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택하셨고, 그의 자녀로 삼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셨고, 그의 비밀을 알리시고, 그의 기업을 삼으셨으며, 성령으로 인쳐 주셨다.

성도에게 베풀어 주신 이 놀랍고도 풍성한 복을 얼마나 누리고 살고 있는가?
만약 누리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세상에 매여서 구걸하듯 처량하게 살고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무관심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주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작기 때문이다.

1)하나님을 더 알도록, 2)부르심의 소망 3)성도에게 주어진 기업 4)베푸신 능력이 어떠한지 알도록 기도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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