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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과거와 미래의 차이와 일치 (사 43:16~18, 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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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의 차이와 일치  [ 사 43:16 ~ 18, 히 13:8 ]

  1985년에 개봉된 ‘백투더퓨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미국에 있을 때 본 기억이 납니다. 30년 전으로 돌아간 마티는 옛날에 살고 있는 브라운 박사를 현재로 다시 돌아오게 한다는 영화입니다. 30년 전에서 현재를 보면 미래입니다. 그러나 30년 후에서 현재를 보면 과거입니다.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면서 현재의 기억 속에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기대 속에서 미래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의 사전적 의미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 미래로 움직이는 비공간적인 연속체라고 합니다. 시간 속에서 늘 살면서 시간이 무엇인가를 알지만 시간의 의미가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재를 가장 알뜰하고 멋있게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를 사흘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벌써 한 해가 다 가고 이제 3 주간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새해라던 해가 벌써 헌 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금년의 몇 날을 알뜰하게 잘 살아서 마지막을 잘 장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서 1:9-10에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고 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다시 있습니다.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새 것이란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과거는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가질 권리가 없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역시 내 것이 아닙니다. 오직 현재만이 내 것입니다. 가질 권리가 있고 사용할 권리가 있는 것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사용 정지된 부도수표, 써먹을 생각 말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미래는 지불 날짜가 되지 않은 어음, 써먹을 생각 말 것”이라는 말도 됩니다.

  과거는 괴로운 것보다 좋은 것만 말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미래는 성공과 행복만 약속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현재만이 진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순간에 불과합니다. 현재는 순간이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 가능한 시간은 없습니다.

  에베소서 5:16에는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지혜의 마음을 가져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더 지혜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과거를 보고 미래를 판단할 줄 아는 자입니다. 현재를 보고 미래의 비전을 가지는 자가 가장 지혜 있는 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아십니까? 과거와 미래의 일치점을 아십니까? 이것을 아는 사람은 가장 지혜 있는 자입니다. 전도서 1:4에는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땅도 영원히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입니다. 자고 나면 바뀌고 섬이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지고 세계 지도가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 한 평생에 살 안 끼는 팔자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평생 화가 없이, 태평한 날만 보내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평생 살 안 끼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언제나 현재로 사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그리스도 더불어 시간을 초월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귀한 비결을 배워,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올해를 “벌써 다 지났구나”하는 절망이나, “에라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살자”하는 포기가 아니라 알뜰하게 현재를 만들어가는 지혜로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과거와 미래는 시간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 43:18에는 “너희는 이 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전 일을 이미 지나갔습니다. 기억하거나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과거는 시간적으로 다시 오지 않습니다. 단지 기억 속에 현재로 살아있는 것이 과거입니다. 과거와 미래와 시간적 차이는 항상 클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갑니다.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과거는 흘러가고 내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새 것은 낡은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과거가 아닙니다.

  우리는 물리적 시간으로는 과거를 돌이킬 수 없습니다. 흔히 교회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시간적 초대교회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시간적 교회가 아니라 정신적 교회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물리적 시간으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시간으로 과거로 돌아가서 초대교회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시절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몰라야 합니다.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우리가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된 다음에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 회상적으로 사는 것은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과거는 절대로 집착할 대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과거가 아름다워도,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과거는 지나간 시간입니다. 과거의 행적이 미래의 수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과거 때문에 보장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시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전혀 다릅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현재의 것을 즐길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3:13에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달려가는 자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뒤를 보는 자는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앞으로 가는 자는 뒤를 보지 않습니다.

  달리기를 하다 2등을 제쳤습니다. 그럼 몇 등일까요? 이등을 제치면 이등입니다. 어떤 분은 일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등이 아니지요. 제 아내가 옛날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에 달리기를 하면 옆에 있는 나무가 쌩쌩 지나간대요.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머리카락이 날린대요. 그런데 골인 지점에 들어가 보면 항상 꼴찌래요. 우리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빠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돌아보아야 할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한 관광객이 택시를 타고 워싱턴 DC 국립문서보관소 건물을 지나면서 건물에 새겨진 글을 보았습니다. “과거는 서막에 불과하다.” 관광객이 운전자에게 “저것이 무슨 뜻인가요?”하고 물었습니다. 택시 운전자는 “제 생각엔 ‘당신이 지금까지 본 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더 기대되는 미래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교적 책을 많이 읽으려고 애쓰고 있고, 책을 많이 저술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이 물어봅니다. “책을 쓰고 몇 번이나 보십니까?” 미안하지만 저는 제가 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책을 읽을 시간에 또 다른 책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책도 다시 읽어본 책이 성경 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래를 바라보고 계획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홈런왕이었던 행크 아론은 절대로 공을 친 다음 담장 너머로 가는 공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루를 향해 열심히 달리기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친 공이 홈런이 되는지 구경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 만해도 바쁩니다.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해도 분주한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그것이 사탄이 가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에 과거만 고집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다릅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과거 때문에 현재나 미래를 망치지 마십시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과거를 거울삼고 나아가십시오. 우리에게 얼룩진 과거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아닙니다. 루터가 말했습니다. “과거 없는 성자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

둘째, 과거와 미래는 삶의 틀이 일치합니다.

  히브리서 13:8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동일하실 수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미래나 예수님께는 동일합니다.
  과거와 미래는 왜 일치합니까? 그리스도는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은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t)입니다. 우리의 현재는 순간이지만 그리스도의 현재는 영원입니다. 예수님의 시간은 무한하고 장구합니다. 그분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동일합니다.

  우리말에 ‘팔자’란 말이 있습니다. ‘팔자’는 한국에서는 좋은 운명을 실어주는 숫자이며 행운의 숫자입니다. 팔자가 오랜 기독교의 전승에는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세례반을 8각형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8자를 옆으로 눕혀 놓은 글자(∞)의 의미를 아시지요? 무한대입니다. 끝이 없는 수입니다. 영원을 상징하는 숫자인 팔자가 누워 있으면 무한대가 되는 것입니다.

  바사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죄목으로 사자굴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사자굴에서 목숨을 건진 다니엘을 발견한 다리오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떨며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다니엘서 6:26에는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다리오왕이 직접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현재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무한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과거가 있어서 늙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미래가 있어 젊은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코 변치 않으실 분이십니다.

  성경이 이를 증명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시간적 차이는 약 2,000년입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보면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모든 구약의 말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입니다. 환생이라고 하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과거와 미래의 일치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백투더퓨처’가 아닙니다.

  미래학자들은 말하기를 미래 현상은 이미 현재 속에 있다고 합니다. 미래는 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재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내세는 가장 많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는 이런 식의 사람의 미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 시간에 사시는 분이십니다.

  칼뱅은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신다. 왜냐하면 그분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언제나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하나이며 현재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와 미래는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미래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대부분 유태인들입니다. 허만 칸, 다니엘 벨, 피터 드러커, 앨빈 토플러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시간을 아는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를 압니다.

  마샬 맥루한이란 학자는 ‘지구촌’이란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미래의 미래는 다시 현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은 돌아갑니다. 물리적 시간은 선처럼 흘러갑니다. 그러나 시간의 질은 반복됩니다. 인류역사의 흐름은 과거를 회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돌아가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메타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어디로 돌아갑니까? 교회의 본질적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또 최근에는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새로 생겨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현대 문화를 수용하지만 내면으로는 진실성과 보수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입니다. 현대 음악도 사용하고 현대 개념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적 내용인 영성과 신비와 복음을 회복하려고 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고대미래 교회’를 말합니다. 미래는 고대와 패러다임이 절묘하게 일치하며 그 패러다임의 핵심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고대가 가지고 있던 신비로운 교회로 돌아갑니다. 고대가 가지고 있던 엄숙하고 예전적인 교회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런 교회의 변화와 더불어 ‘오순절 주의’가 다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는 1960년대에 ‘세속도시’라는 책을 썼습니다. 콕스는 지성주의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교회가 세속화하고, 탈종교화가 두드러지게 되고 교회가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근 ‘하늘에서 내려온 불’(Fire from Heaven)이라는 책을 통하여 자신이 쓴 세속도시에 대한 반성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쇠퇴하고 탈종교화 현상이 나타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의 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미래는 더 이상 세속주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주의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5억 이상의 사람들이 열정, 은사, 신비를 회복하는 오순절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오순절주의 교회를 통하여 세계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현재 세계 교회의 성장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오순절주의 교회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교회들은 한 결 같이 복음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성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고대교회를 보면 미래교회를 압니다. 교회의 가장 원형적인 교회는 광야교회입니다. 제가 쓴 ‘세상을 바꾸는 미래교회’라는 책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우리교회는 다시 고대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미래 교회에 적합한 교회입니다.

결론

  최근에 나온 얘기 가운데 세 가지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둘째는 앙드레김 검은 옷 입히기입니다. 셋째는 노무현대통령 입 다물게 하기입니다. 앙드레김이 문상 갈 때 흰 옷을 입을까, 검은 옷을 입을까 하는 것도 젊은이들의 퀴즈에 나옵니다. 그런데 더 불가능한 것이 실제로 있습니다. 시간을 물리적으로 되돌리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현재를 잘 살면 미래는 아름다워지고 시간의 질은 절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우리의 남은 날의 첫째 날입니다. 우리의 매일은 날마다 새로운 날입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날입니다. 미래가 실현된 날입니다. “독수리는 까마귀에게 배우기 위하여 시간을 낭비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배울 가치가 없는 일을 위하여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온고이지신’하는 지혜를 배우고 미래를 여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미래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방법은 과거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잃지 않고 회복하여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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