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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를 깊이 체험한 자의 고백 (롬 7: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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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깊이 체험한 자의 고백(로마서 7장14-25)

- "오호라"의 절규와 은혜 -

◈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

우리들의 옛 남편은 폭군과 같은 율법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이 휘두르는 주먹에 완전히 쓰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오히려 그 속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러한 율법의 정죄 하에서 신음하는 우리들에게 새 남편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새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을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신 이 놀라운 은혜에 사로잡히게 된 자들은 억지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 들어와서 엄청난 고민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24절에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고민은 보통 고민이 아니라 죽음과 연관되어 있을 정도로 심각한 고민이었습니다. 이 고민의 내용은 한마디로 바울 자신 안에 두 사람이 있어 서로 싸우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자기가 이기고 싶은 사람이 항상 진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큰 모순이 아닌가’라고 말하면서 본문에서 이 점을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바울의 이러한 고민과 몸부림을 볼 때 여러 가지 면에서 깨닫는 점이 있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이야말로 훌륭한 신앙의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신앙의 인격이 얼마나 고상하고 겸손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왠만한 사람 같으면 그렇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을만한 위치에 있다고 하면 저렇게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가 그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만 그는 「외식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직한 신앙의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게 탄식의 소리를 발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탄식이야말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탄식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있지만 이 탄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탄식이라는데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저와 여러분들에게 바울의 탄식은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오호라"의 절규와 은혜 

저는 오늘 설교의 부제목을 잡아보기를 “오호라”의 절규와 은혜라고 정하였습니다. 과연 이 절규와 은혜가 여러분들의 심령에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첫째, 사도 바울이 가졌던 세 가지 갈등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갈등을 가지게 마련입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을 느끼기도 하고 또한 신앙적인 갈등을 가지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갈등은 신앙적인 갈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첫 번째가 15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원하지도 않는 일들, 그것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들을 자기도 모르게 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악한 성향이 선한 성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모순이며 이것 때문에 바울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말씀을 들으면서 사랑하기를 원하고 주님께 충성하고 싶고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싶은데 그대로 되고 있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였는데 사랑하기는커녕 미워하였습니다. 그렇게 성도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기를 원하였는데 나 혼자 편리한대로 살았습니다. 정말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하기를 원하였는데 원치 않은 세상적인 일에만 얽매여 살았습니다. 이러한 고민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 둘째, 새 사람과 옛 사람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두 번째 갈등은 새 사람과 옛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7절을 보시면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한 지붕 밑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판이한 두 개의 법이 자기 안에 공존하는 모순입니다.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은 성격상 도저히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인데 바울 안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하여 갈등을 느꼈던 것입니다. 어디 바울뿐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 두 사람, 즉 옛 사람의 성향을 가진 죄의 법과 새 사람의 성향을 가진 하나님의 법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성령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인간의 부패성이 남아 있습니다. 죄악의 쓴 뿌리가 독버섯처럼 남아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우리 몸은 죄의 작업장과 같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부패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고로 늘 불안하며 죄가 항상 우리의 몸을 주관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결심을 하였는데 너무나 쉽게 허물어지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볼 때에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은 이러한 갈등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언제나 마음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지만 언제 슬그머니 들어왔는지 죄란 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우리 각자 가지고 있는 그 죄악의 쓴 뿌리, 우리 각자에게 독버섯처럼 도사리고 있는 그 부패한 습성이 언제 나를 짓밟고 일어날는지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랍비는 말하기를 “죄는 손님으로 들어와서 주인으로 들어 앉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죄악의 노예가 된 근성이 남아 있어서 벌써 저 쪽에서 죄의 유혹이 있으면 마음이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마음속에 휘발유 통이 있어서 저쪽에서 불이 보이고 성냥 긋는 소리가 들리면 벌써 마음에 불이 활활 붙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정욕이라고 하는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마치 휘발유에 성냥을 긋는 것처럼 확 불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싶어 하는 욕망이 순식간에 일어나서 도적질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숨어있는 죄악의 독초가 무섭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갈등을 느끼는 자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자기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직분자가 되었다할지라도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대로 조심하지 아니하면 비참한 존재로 타락하게 됩니다. 저는 가끔 신앙생활 잘 하다가 타락한 자들을 보는데 너무도 불쌍한 모습입니다. 그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만하면 됐다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알고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한눈 팔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혹시 영적 각성 특별 새벽기도회다, 예수 초청 큰 잔치다 하면서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불평이 있습니까?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는 데도 순간순간 넘어지는데 어찌 육신이 하자는 대로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고 전진하기를 바랍니다.

✦ 셋째, 내 속에 있는 악한 것이 나를 포로로 사로잡고 있다

사도 바울의 세 번째 갈등은 내 속에 있는 악한 것이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를 포로로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죄의 소원에 결국 굴복하고 만다는 말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 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여기에 두 가지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죄를 짓고 싶어 하는 육신의 소욕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의 법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싶어 하는 성령의 소욕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번번히 내 몸에 있는 죄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누르고 이긴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유심히 자신을 관찰할진대 내 속에 악한 것이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나 자신을 포로로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싶은데 선이 안 됩니다. 착한 일을 하고 싶은데 착한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리라 단단히 결심하고 나왔는데 막상 그 사람을 보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모습이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14절에서 “죄 아래 팔렸도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죄에게 팔렸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바울이 다시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에게 팔렸도다’고 하는 표현은 자신의 무력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을 보면서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도 또한 이러한 감정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빌립보서 2: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갈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인내로 기도하면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 사도 바울의 탄식과 승리의 외침이 주는 의미

사도 바울의 탄식과 승리의 외침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이 어찌 육신에 지는 생활을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정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24절에서 이렇게 탄식을 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사도 바울의 절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심각하게 내적인 투쟁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침은 단순히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세타령을 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조금만 방심하면 여전히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힘이 여지없이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는 말속에는 잠시라도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내 혼자의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철저한 무능력을 고백하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법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호라”의 탄식은 은혜를 깊이 체험한 자의 고백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지중에 죄를 범하였을 때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을 때에 오는 갈등과 고통과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바울도 처음에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말하더니 나중에는 성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하였고(엡3:8) 순교하기 직전에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였습니다(딤전1:15).

이것을 보면서 저는 성화의 단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점점 은혜의 도가 깊어갈수록 느끼는 것이 자신의 죄성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느끼는 감정이 나는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성화의 높은 수준에 들어간 사람들은 보통 사람은 죄로 여기지도 않을 것을 가지고 죄로 느끼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목격하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탄식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꼭 죄를 지어서 이러한 탄식을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보니까 자신의 추한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더럽게 보였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탄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기 안에 있는 더러움과 잘못이 크게 보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은혜에 깊이 젖어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는 철저하고 민감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고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하였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아주 민감한 사람도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작은 바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바로 그와 같은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정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탄식으로 끝나지 않고 승리의 감사로 마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탄식만 하지 말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소망이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니까 새 힘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니까 소망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로 넉넉히 이기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다시금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설령 내가 죄를 이기고 무슨 일을 좀 했다손 치더라도 스스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 성경을 읽고 듣고 믿고 순종하는 자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고3 아들에게 대학에 합격만 하면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 아들은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보따리를 쌓아 학교 기숙사로 떠나는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성경을 한 권 주면서 “매일 쉬지 말고 읽어라.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빌립보서 4장을 꼭 읽도록 해라”라고 말했더니 아들은 실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4년 동안 읽지도 않은 채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장을 들고 나오는 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아버지는 “너 내가 읽으라고 준 성경 어떻게 했니?”하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책장 어딘가에 있겠지요”하고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성경을 찾아 빌립보서 4장19절을 읽어 보아라”하시는 것입니다. 그는 그 날 밤, 편치 않은 마음으로 먼지 묻은 성경을 찾아 빌립보서 4장19절을 찾아 읽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하는 말씀과 함께 봉투하나가 끼워 있었는데 그 봉투를 뜯어보니 “대학 합격을 축하한다”는 아버지의 글과 함께 자동차 교환권이 한 장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라면 4년 전에 자동차를 가질 수 있었는데 4년간 그것을 모르고 지낸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증수표입니다.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 주인의 음성

신학자 에밀 브루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인의 음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언어로 기록되고 수천 년을 두고 여러 형태의 문화를 거쳐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어 오는 동안 사람들의 지식과 이해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잡음이 섞일 수 있고 설교자의 제한된 지식과 주장과 경험에 따라 잡음이 섞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잡음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인의 음성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각이 발달한 개는 어떤 잡음 속에서도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 성도들도 어떤 잡음 속에서도 주인의 음성을 식별할 수 있는 영적 청각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영적 청각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천사가 와서 말씀을 전해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형태는 【계시된 말씀】인데 계시된 말씀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둘째 형태는 【기록된 말씀】인데 기록된 말씀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셋째 형태는 【선포되는 말씀】인데 선포되는 말씀이란 설교 말씀입니다. 계시된 말씀과 기록된 말씀이 오늘의 언어로 해석되어 전해지는 설교입니다. 성경은 읽고 듣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성령님의 인도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하고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과 영생과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보증수표입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읽고 듣고 믿고 행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시편 33편 6-9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는 이유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 하셨기 때문이고, 그의 계획은 영원히 변함없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셨고, 앞으로 행하실 일을 위해 찬양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 첫째, 계시된 말씀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희랍사상의 형식을 빌려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말씀을 “로고스”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논리, 이성, 계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기독교 안으로 들어와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계시된 말씀이십니다. 이 계시된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 둘째, 기록된 말씀

요한복음 1장 2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의미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복음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로마서 10장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23절에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하였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길이 있고,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생명의 말씀이라 하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스텐퍼드 호텔에서 방마다 성경을 놓아두었는데, 15년간 단 한권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어사전을 놓아두었더니 한 달 사이에 14권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호텔사장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말에는 훔쳐 갈 정도로 관심이 많다”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먼지 속에 파묻혀 가는 성경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 셋째, 선포되는 말씀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으나 죄로 어두어진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상황에서는 복음이 세상에 선포되지만 세상이 복음으로 받지 못하는 영적 무지를 지적한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빛은 복음으로 어두움은 죄로 비유되어 왔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에 의해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고 교회가 성장해 가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은 넓어져 가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세상적인 지식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얼마나 읽으셨습니까? 지금까지 완독을 못하신 분은 오늘부터 시작하여 완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 90세가 넘으신 어느 노 장로님은 벌써 완독을 여러 차례 하셨고, 지금도 계속 하나님나라에 가실 때까지 성경을 읽어가고 계십니다.

팀 라하이 목사님은 뛰어난 교육가요, 성공적인 목회자요, 베스트셀러의 작가인데 그가 쓰신 [성경공부의 비결]이란 책은 정말 은혜로운 책이요, 실제적인 책입니다. 그는 “기하학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헬라의 수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성경을 알려고 하면 ‘노력하지 않고’는 별 방법이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하루 15분이 영어를 정복한다”는 광고 문구를 보고는 그 말을 성경공부에 적용하였습니다. 하루에 아침 15분만 일찍 일어나서 맑은 정신에 성경을 읽으라고 합니다. 하루에 15분, 일 년 365일이면 5,475분, 이 하루의 15분이라는 시간은 약 4일 정도의 시간이 됩니다. 팀 라하이 목사님의 경험으로 하루 15분이면 성경을 완전히 통독하고, 성경 중에 중요한 부분은 여러 차례 읽을 수 있고, 중요한 진리, 약속, 계명들이 마음속에 뿌리박게 되며, 가장 중요한 말씀들은 묵상하게 되며, 요절을 깨달을 수 있고, 성경말씀에 해박하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비행기가 공중을 날고 있는데 교신이 끊기는 것은 치명적인 일입니다. 항공기 사고의 상당부분이 교신이 잘못된 경우입니다. 관제탑으로부터 정확한 정보와 지시를 받을 때 안전 운항과 착륙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교신이 끊어지는 것은 정말 치명적입니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망망한 하늘에서 얼마나 당황스럽고, 얼마나 위험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꼭 이와 같습니다. 인생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가 ‘불확실성’ 혹은 ‘불가예측성’입니다. 내 인생이라고 큰 소리를 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갈팡질팡 할 때가 허다합니다. 중요한 순간일수록 그렇습니다.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과 해야 되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있나,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 해야 되나 나중에 해야 되나, 어떤 업종을 택해야 되나, 누구하고 손잡고 하나, 대학에 진학을 해야 되는데 어느 대학에 가야 되나, 전공은 뭐로 해야 되나, 정말 고민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다가 답답하면 처음에는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다가 너무 너무 답답하면 심한 경우 점쟁이한테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합리적이라는 서양 사람들도 문명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점술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영적으로 무지하고 나약한 게 인간인 것입니다. 이럴 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인생길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면 얼마나 평안히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비유컨대 ‘하나님으로부터 교신이 끊어진 존재’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한 존재, 교제가 가능한 존재로 만드셨는데 죄로 인해 단절된 것입니다.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시지만 인간이 듣지 못합니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었고, 교신이 끊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결국 공중에서 교신이 끊긴 비행기처럼 허둥대다 추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교신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얻는 축복이 바로 이것입니다. 장차 우리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큰 축복이지만, 이 세상 살 동안 하나님의 인도를 받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승리의 길로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믿고 순종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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