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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의 성읍 예루살렘(I) (슥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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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성읍 예루살렘(I) (슥 8:1-13)

  한 십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나라 사랑 운동'의 일환으로 "I LOVE KOREA"라는 문구의 스티커를 자동차 따위에 붙이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IMF로 인하여 온 국민들이 자신감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때에,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새로이 하고 서로 격려함으로써 다시 한 번 멋있게 일어서 보자는 의지의 발로였습니다.
  또한 그 문구를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라고 우리나라말로 하지 않고 영어로 쓴 것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여전히 조국에 대하여 긍지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사람 앞에 당당히 알린다는 의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별 것 아닌 종이 한 쪽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 명예가 실추된 조국의 이름을 다시금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회복시키고야 말겠다는 신념을 우리 국민 스스로에게 일깨워 준, 매우 의미 깊은 스티커 한 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새 예루살렘을 건설하려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그런 바람이 간절했었습니다.
  이전의 예루살렘은 정말 영광스러운 도성이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잇는 전성기 때의 예루살렘은 그 이름을 듣기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무언가 뭉클 하는 것이 절로 솟아오르게 만드는 도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 눈앞의 예루살렘에서는 그 과거의 영광스러운 모습이란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영광은커녕, 오히려 저주, 멸망, 그리고 수치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폐허로만 남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예루살렘이 다시 한 번 이전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거리가 되며 영광의 대명사가 될 수 있도록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한결같이 손꼽아 바라는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이 스가랴 8장에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을 향한 소망이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예언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다시 한 번 과거의 영광,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크고 높은 영광의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윗과 솔로몬 같은 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훨씬 위대하신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이름으로 세우실 새로운 왕국 곧 교회를 통하여 성취될 미래를 가리켜 약속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교회가 이 세상 앞에서 영광스럽게 들리는 교회, 이 불신사회 앞에서 실로 자랑스럽게 성별되는 교회가 될 수 있는지 오늘 이 시간에는 우선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그 첫 두 가지 조건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영광스러운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을 받아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 성도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본문 1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1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6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미래가 시작되는 제일 첫 단계를 두고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노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으로부터 당하는 고난을 도무지 참고 보지 못하심을 뜻하는, 구약의 특별한 표현입니다.
  '분노함으로 질투한다'는 말이 그 뜻을 더욱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인데, 이것은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이방 민족을 보시면 그 누구든지 간에 분노를 발하실 정도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볼 때 사실 "질투(jealousy)"라고 번역된 말은 '열정(zeal)'이라는 의미에 더 가까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게 되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 즉 예루살렘의 시온산은 "성산"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전에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징벌을 받게 되었던 예루살렘이 이제는 한번 택하신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구원의 언약'이 다시금 선포되는 도성이 될 것이며, 그런 구원역사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가 뚜렷이 나타나는 곳이 되리라는 뜻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이 그같이 바뀌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일방적인 '열정' 곧 무조건적인 사랑이 넘쳐흐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용서해 주셨고 "시온에 돌아오셨으며"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 먼저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진리의 성읍'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서 당신의 주권적인 구원을 신실하게 베풀어 주신 까닭에 그곳은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작동하는 '성산'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진리의 성산' 새 예루살렘에는 많은 백성들이 거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예루살렘 길가에 "늙은 지아비와 지어미"가 앉을 것이고 그 거리와 골목에는 "동남과 동녀" 즉 어린아이들이 장난하며 노는 장면이 보이게 될 것이었습니다.
  한 공동체가 풍요하고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노인들의 경험과 지혜가 그 사회를 리드해야 하고, 그 공동체가 계속 안정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그 미래를 이어받을 어린 세대가 건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나라가 멸망당했을 때의 이스라엘은 이 양자를 다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예루살렘 성에 다시 노인들이 장수하고 아이들이 와글와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은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한" 즉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기적처럼 여겨질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 눈에는 어찌 기이하겠느냐"라고, 즉 하나님의 당신의 눈에는 지극히 당연한 일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그처럼 많은 백성들이 모여 살게 되는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작정하시고 이루실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실"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내 백성" 즉 당신의 백성이 바벨론 아니라 이 세상 끝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 안으로 이끌어 들여 살게 하실 것이니, 그 예루살렘은 자연히 길거리마다 사람이 넘치는 성읍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처럼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심을 체험할 때, 그 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백성들은 바로 그 하나님이야말로 "성실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라고 절로 고백하며 믿게 될 것이었습니다.

  참된 교회는 이처럼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역사'를 전적으로 믿고 앞세워야만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택자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을 발동시켜 주심으로써 죄인 된 우리를 찾아와 주셨다는 여기에 바로 구원의 출발점이 있음을 정확하게 선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도를 깨닫게 되어서 이 땅의 교회가 복음을 간직하는 '진리의 성읍'이 된 것이 아니며 사람이 스스로 착한 생활을 해서 교회가 경건한 삶을 사는 자들이 모인 '성산'이 된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먼저 주심으로써 교회는 이처럼 진리와 거룩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숫자가 늘어가고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배출되고 교회를 섬길 차세대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이 '기이한 일'들은,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반드시 교회로 '인도하시고 그 안에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역사의 섭리로 인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하면 할수록, 크게 외치면 외칠수록, 교회는 그 본래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더더욱 자랑하고 하나님의 깊고도 오묘하신 구원 계획과 능력을 최고로 소중한 보화처럼 지키게 때, 그런 교회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가 사람의 요소를 강조하면 자연히 그 빛을 잃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사람의 선행을 종교의 본질인양 강조하고 사람의 쌓은 덕이나 깨달은 도를 추앙하고 높이면, 그런 교회의 영광이란 결국 사람의 영광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보다도 사람의 구제사업을 더 아름답게 여기고, 기록된 하나님의 직접계시의 말씀보다도 중과 사제가 마주 앉아 서로 이해되고 공감된다는 도를 더 귀하게 여긴다면, 그런 교회의 영광이란 아무리 기를 써 보았자 사람이 낼 수 있는 최대한도를 결코 넘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부자나 유력한 인물이 많이 모이게 되면 그 교회가 자랑스러워지겠습니까?
  그것은 교회의 영광이 아니라 상류사회의 고급 사교클럽에서나 신경을 쓰는 영광입니다.
  아니면 무슨 구제품 많이 나누어주고 무료 서비스 많이 해 준다고 해서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이는 교회가 진정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 같습니까?
  그것은 참된 교회의 영광이 아니라 사회사업단체가 추구하고 얻어야 할 영광입니다.
  반면에 '구원의 확신을 얻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 너나 할 것이 없이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겸손히 고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천당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기쁨이 충만한 신자들이 모인 교회 - 정말 기가 막히게 멋진, 정말 이 세상의 다른 단체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영광스러운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교회에 이처럼 '구원 받은 택자'들이 모이게 된다는 사실은 목사의 눈에는 언제 보아도 정말 '신비'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직 '기적'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으로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며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벌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구속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재주나 인기로 모으거나 사람의 필요와 욕구를 따라 모이게 됨으로써 자연히 '사람의 영광'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구원의 역사가 벌어지며 하나님만 내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구원의 체험과 확신을 나눔으로써 이 경향의 공동체를 더욱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며 그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교회로 함께 세워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영광스러운 교회는 신행일치의 충성된 삶을 통하여 열매를 맺고 역사(役事)를 성취해 가는 교회입니다.

  9절 이하 13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9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10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11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12곧 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13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처럼 주권적인 사랑을 퍼부어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당연히 그 다음에 따라 나와야 할 단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여 완수해 내라는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성전 건축 "지대를 쌓던 날" 즉 성전재건 공사가 시작될 무렵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바로 "이 때에" 다시금 되새기고 손을 견고히 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왜 "이 때"가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욱 힘을 내고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까?
  이유는 그 "이 때"는 "그 날 전(those days)"과 정 딴판으로 다른 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그 날 전"이란 바로 성전재건 공사가 시작되기 전을 가리킵니다.
  그때는 사람이 일을 해도 "삯을 얻지 못하고" "출입도 평안치 못했던" 때였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징벌로 인하여 아직까지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든 것이 불안한 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11절에 보면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이제는 모든 산업에 소출이 풍성하고 생활에 평안이 계속되는 때로 바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그 날 전'과 '이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반대가 된 것입니다.
  바로 13절에 나와 있는 대로 이스라엘의 과거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던 때였지만 이제 이스라엘의 미래는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 있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새 삶을 누리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연히 나타내어야 할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명령된 사실이 바로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언약 안에서 안전보장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이방 민족이나 세상 권력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고 또한 두려워해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들의 손을 견고히 하여 그 예루살렘의 미래를 소망하며 성전재건 공사에 전력을 쏟아 붓고 그것을 완수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막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예루살렘의 미래의 축복을 현실화시켜 나가는 데에 그들의 모든 영적 육신적 에너지를 다 집중시켜야만 했던 것입니다.

  정말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자라면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그 전 날' 곧 예수 믿기 전의 과거와 비교할 때 얼마나 극적인 변화를 입게 되었는지를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는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당연히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저 먹고 사노라고만 바빴지만 만족할 만한 '삯'을 벌지 못해 늘 불만에 찬 인생을 살고 있었으며, 죄인들끼리 '서로 치고' 싸우는 사회에서 한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불안의 연속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죄의 저주 아래에서 망해 가고 있던 우리들을 구원해 주심으로써 그 저주가 바뀌어 '축복이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중생의 새 삶을 누리게 된 것을 깨닫고 있는 성도라면 그 사는 방식이 어떻게 이전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장망성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구원해 주시고 교회 안에 거하게 해 주신 이 놀라운 은총과 장차 천당영생까지 누릴 수 있도록 약속해 주신 이 엄청난 소망을 진정으로 믿고 감사하는 자라면, 그 '여호와의 집을 쌓고 건축하는 사명'에 있어서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며 겁낼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내게 구원 얻는 복음을 전해 주셨고 이 교회를 통하여 앞으로의 남은 현세의 삶을 인도하시고 내세의 영원한 축복에까지 이르게 해 주시는 것을 정말 확신하는 성도라면, 이제 오직 그 교회를 중심으로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신행일치의 삶을 나누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세상 앞에서도 더욱 영광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교인이라는 사람이 자기 교회를 사랑하는 자세를 전혀 보이지 않고 혹 교회를 섬기면서도 억지로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불신자들 눈에는 교회라는 것이 더욱 부정적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아무리 큰 회사가 할지라도 그 사원들부터가 애사심이 없고 항상 노사분규만 일으키고 파업만을 일삼는다면, 소비자들의 마음 역시 그 회사에 대한 불신만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작고 혹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회사라 할지라도 일단 그 사원들부터가 끝까지 자기 회사를 사랑하고 일으켜 보려는 마음을 모으고 희생적인 자세로 뭉치면, 그 회사를 보는 외부의 시각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짜 은혜 받은 성도들이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길 때에는 불신자들도 교회를 괄목상대하게 됩니다.
  자기네들이 보기에는 당장 별 이득도 없어 보이는 일에 왜 그리 시간을 쓰고 물질을 바치고 땀을 흘리는지, 그것도 오히려 감사하면서 즐겁게 섬기는지 정말 그들로서는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집을 세우기 위하여' 온 성도들의 손들이 '견고히' 합력할 때 교회는 실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 특별한 공동체로 뚜렷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표어나 설교에서 날이면 날마다 '성도 교제'와 '이웃 사랑'만 강조하는 현대교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결국은 무슨 '인간관계 개선'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처럼 교인들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며, 결국 교회를 '영적으로 전투하는 산성'이 아니라 '노는 사교단체'로 전락시키고 있을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구원 받았다고 그저 '아멘, 할렐루야'만 시끄럽게 외치고 구체적으로 '그 손으로 견고히 하는 일이 없는' 교회 역시 결코 아름다운 교회가 아닙니다.
  입만 부지런히 놀리고 손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몸은 분명히 '불구의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몸은 일단 '살아 있고 건강해야' 아름답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 된 교회 역시 각 지체들이 활동하며 힘을 쓸 줄 아는 '유기체적인 공동체'가 될 때 정말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경향교회는 자신이 맡아 봉사하고 섬기는 일이 없는 교인은 교회에 와도 자기 설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교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이며 감동적인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모든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 자기가 할 일이 있는 교회, 자기가 기쁨으로 자원하여 섬길 직분이 있는 교회, 그래서 자기 자신이 이 교회의 한 지체 그 자체로 완전히 동화되어 있고 접붙여져 있는 교회, 정말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순전히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하는 비만증 교인들만 모인 '무력하고 병든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하여 나를 '죄' 가운데로부터 '구원'으로, '저주' 아래로부터 '축복'으로 이끌어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나 역시 바로 이 교회를 중심으로 '예수 목적, 내 삶 수단'이라는 새로운 인생 좌우명을 따라 충성함으로써 불신자들조차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교회, 실로 '온 세상 앞에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함께 건축해 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원래 이 지상교회들을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막'으로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러니 교회야말로 우리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교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부끄러운 꼴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살아 계신 위대한 하나님을 먼저 지극히 높이지 않을 때 교회는 자연히 '사람의 교회'가 되며 스스로를 격하시키게 됩니다.
  먼저 주인부터 제대로 모시지 않고 있으니 그 위대하신 주인의 영광을 덧입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생 구원받았음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에 따른 신행일치의 삶이 나타나지 않을 때 교회는 절로 세상 앞에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높은 주인 모시고 산다는 종이 저부터 게으르고 불충하면 그 주인의 명예와 권위는 당연히 실추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죄인의 구원주가 되신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이 양자가 함께 나타나야 합니다.
  즉 '바른 신앙'과 '충성된 생활'이 둘 다 교회중심으로 지켜지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연구하여 깨닫게 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 자체를 믿고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실과 정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심으로써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구원 언약과 그 베풀어 주시는 칭의의 은총이 각 신자에게 뜨겁게 체험되고 확실히 고백되는 교회가 되어야만, 교회는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구원 얻기 위하여 억지로 할 수밖에 없는 선행'이 아니라, 오직 '이미 받은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온 몸을 다 바쳐서' 교회를 중심으로 섬겨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저주로부터 축복으로 바꾸어 놓으신 이 변화된 생명의 힘을 가지고 함께 교회의 지대를 쌓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는 사명에 실로 즐겁게 섬기는 신자들이 교회를 계속 부흥시켜 나갈 때, 이 교회는 불신자들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택자의 무리 안으로 불러 주신 구원의 하나님을 항상 먼저, 그리고 최고로 높이며, 또한 바로 이 교회를 더 크고 강력한 산성과 요새로 건축해 가는 사명에 견고한 손을 합쳐 충성함으로써, 이 경향제단을 더욱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진리의 성읍'으로, 우리 스스로가 더욱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하나님의 성산'으로 함께 세워 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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