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탐하라! (수 2:1~24)

  • 잡초 잡초
  • 327
  • 0

첨부 1


본  문 : 여호수아 2:1~24, 6:25(2:8~13)
제  목 :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탐하라!

1.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마음, 탐(貪)

“탐(貪)”이라는 말은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은 마음’을 일컫는 명사 말이요, 이것이 동사가 되어 “탐하다”라고 하면, ‘어떤 것을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어 지나치게 욕심을 내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과 비슷한 말이 “욕구, 욕망”인데요. 욕구(欲求·慾求)는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원하는 욕망’을 뜻합니다. 그리고 욕망(欲望·慾望)은 ‘무엇을 하거나 가지고 싶어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욕망과 관련된 단어로는 ‘바라고 또 바란다’는 희원(希願), 간절히 열렬히 바란다는 ‘열망(熱望)’,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이 간절히 바란다는 뜻의 ‘갈망(渴望)’, 늘 생각하고 간절히 바란다는 뜻의 ‘염원(念願)’, 그리고 ‘기구(冀求, 몹시 바라고 원함), 갈구(渴求, 애타게 구함)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욕심과 관련된 말들이 많은 이유는 욕심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욕심, 혹 욕망과 관련된 어군(語群)에서 “탐욕(貪慾)”은 지금 말씀드린 것들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말입니다. 탐욕은 ‘지나치게 탐내어 만족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심’을 뜻하는 것으로, 이른 바 ‘지나친 욕망’, ‘과도한 욕망’이 곧 ‘탐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탐욕에 대해서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탐심 때문에 거짓말이나 도적질 등, 여러 가지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탐심은 곧 우상숭배"(골3:5)라고까지 하면서 철저히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저는 설교 제목을 이 탐욕이나 탐심과 관련된 “탐(貪)”이라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이 이 “탐”, 아니 어쩌면 이보다 더 강한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무엇을 탐했을까요? 그리고 그 뭔가를 탐낸 그의 삶과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2. 변화와 축복을 부르는 탐(貪)

1) 욕된 이름, 수치스러운 인생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서 2장은 소위 “라합 장(章)”으로 유명합니다. 라합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라합은 무엇으로, 혹 무엇 때문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라합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이방인인 아모리 족속이라는 것 외에, 그녀의 이름과 직업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이름과 직업만으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많습니다. 우선 “라합”이라는 이름은 ‘널찍한’, ‘넓은’, ‘큰’, ‘자유로이’ 등의 뜻을 가진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말로 치면 ‘넓을 광(廣)’자를 쓰서 ‘광식이, 광호, 광숙이’라는 이름으로 쓰일 수 있는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라합”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라합”이라는 이름의 구약 히브리어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뜻은 기생이라는 수치스러운 그녀의 직업과 어울려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여인’,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 많은 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라합”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성적이고 질펀한 뒷골목의 분위기를 전달해 주는 욕된 이름이라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이 이름은 그녀의 본명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기생이라는 직업을 가지다 보니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입니다.

라합은 기생으로서 선술집이나 주막, 혹은 오늘로 치면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곳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보낸 두 사람의 정탐꾼이 들어가 묵게 되었습니다. 거기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낯선 젊은이들이 들어가도 의심을 사지 않았으며, 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다보니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 라합의 입장에서 볼 때, 그녀의 집으로 이스라엘의 정보원들이 찾아든 것은 그녀의 이름과 함께 그 직업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처럼 오는 손님이라면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였습니다. 즉 자기 집으로 찾아드는 사람은 국적이나 인종을 가리지 않고 환영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그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말이지요. 만약 그녀가 자신의 이름처럼 아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정탐꾼들이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오고 가는 나그네와 상인들이 자신의 집에 편하게 드나들었기 때문에 40여 년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일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녀가 이방인이라는 것, 그녀의 직업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의 이름 역시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점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라합을 향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혹은 직업적으로 볼 때, ‘어떻게 이런 여자가 메시야의 족보에 오를 수가 있느냐?“라고 물을 수밖에 없지만, 그 점만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라합을 보실 때, 더 우선적으로, 더 귀한 것으로 보신 것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라합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2)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탐하다

❶ 여호수아는 사해 위쪽,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 요단 동편의 ‘싯딤’이라는 곳에서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하여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조심스레 여리고로 숨어든 두 사람이 음식과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으며, 여리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비교적 안전한 <모텔 라합>으로 가서 거기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정탐꾼은 그 집의 주인 여자인 라합으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들을 따뜻하게 영접해 준 일과, 그들의 잠입이 발각되어 여리고의 군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자신들을 보호해주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찾았다는 정보를 들은 여리고 당국은 가장 가능성이 많은 라합의 집으로 군인들을 급파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자신의 집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을 별 탈 없이 돌려보냈습니다. 정탐꾼들이 자기 집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던 것이죠. 그리고 라합은 만약에 여리고 군인들이 자기 집을 조사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정탐꾼들을 옥상으로 숨겨둔 상태였습니다(6). 그녀는 말리기 위해서 지붕 위에 줄지어 벌여 놓은 삼대로 그들을 가려 발각되지 않게 함으로서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이렇게 여리고 군사들을 속여서 그냥 돌아가게 함으로서 정탐꾼들을 안전하게 보호했을 뿐 아니라, 더 이상의 수색과 추적이 생기지 않도록 ‘정탐꾼들이 달아났다’는 것과, ‘지금이라도 추격해가면 따라 미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그들을 보내었습니다(4,5).

❷ 여리고 군인들을 돌려보낸 후,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숨어있던 "지붕으로" 가서, 겁에 질려 있던 그들을 안심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왜 자신의 성인 여리고를 정탐하여 침략하려는 정탐꾼들을 숨겨주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여리고 군사들을 속였는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소문이 여리고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10). 최근 이스라엘이 요단강 건너편에 위치한 아모리 족속의 국가들을 점령하여 승리한 것에 대해서 뿐 아니라, 애굽에서 나올 때의 그 놀라운 구원과 홍해를 건넌 위대한 역사, 그리고 지난 40년 간의 광야 여정 등, 그 모든 것이 그대로 여리고 성과 인근 가나안 지역에 전해졌다고 말했고, 누구보다도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라합은 이러한 일들의 소문이 가나안 민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9)",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11)."

❸ 그러고 나서 오늘 읽은 본문과 같이 라합은 아주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이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고백 속에 라합의 거룩한 욕심, 제가 탐심이라고 표현한 것이 들어있습니다.

라합은 11절에서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배를 믿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의 하나님이시며, 만군의 주로 섬김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그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 속에는 이스라엘이 예배하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 나시며 그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라는 고백도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또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약속을 그가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대로 될 줄로 믿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리고의 왕을 비롯한 주변의 종족과 국가들, 그리고 이스라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정말 많았지만, 그 중에서 라합과 같이 믿고 행동한 사람들은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스라엘에 대항해서 자신들의 땅을 움켜쥐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단지 들었을 뿐인데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이스라엘의 장로들마저 불신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믿고 확신하여 우리가 앞에서 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라합이 만난 위험은 상당히 크고 중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의 믿음이 틀려진다면, 그는 자신의 목숨만이 아니라 온 집안과 친지들의 목숨까지 내놓아야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믿음이 살아서 움직이는 산 믿음이 되어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고백과 함께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신과 친척들이 여리고의 멸망의 날에 멸망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을 약속받았습니다(12,13).

우리가 여호수아 2장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라합의 믿음은 정말 순전하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도 누가 와서 믿으라고 권고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갖가지 소문만으로 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면에서도 대단한 것이지요. 이러한 라합의 믿음에 대해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31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2장 25절에는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라합은 히브리서의 “믿음 장”과 야고보서의 “믿음의 행함 장”에 동시에 기록된 구약의 인물이라는 명예를 가진 믿음의 사람으로서 오늘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3) 은혜를 탐한 결과

그렇다면 라합이 ‘무모한 모험’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했을 때,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이스라엘에 의해 여리고 성이 정복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과 가족들과 친지들의 구원을 위해 표식을 했습니다. 그것은 창에 붉은 줄을 달아내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이러한 그의 믿음과 실천으로 그녀와 그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6:22~26). 전부가 멸망한 여리고 성의 유일한 생존 가정이라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 않습니까? 살아남아 구원받은 감격은 라합의 가족들에게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그녀에게 주어진 복은 더 크고 놀랍습니다. 라합은 두 정탐꾼 중의 하나였던 유다 지파 사람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마태복음 1장 5절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롯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라합이 <다윗 왕가의 여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른 여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이방인이라는 것, 그리고 직업이 기생이라는 것 등을 생각해 보면, 이만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그 말씀과 장차 하실 일을 믿고 그대로 행동에 옮긴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라합이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복을 보았고 그것을 탐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그것을 차지하려고 모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을 얻었습니다. 아니 그 복만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중심에 서는 복까지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이와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탐하라!

알베르 까뮈가 쓴 《오해》라는 희곡 작품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두 모녀가 여인숙을 운영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던 두 모녀는 어느 날부터 죄를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여인숙을 찾아온 손님 중, 혼자이거나 부유한 인상의 사람을 골라 독약을 먹이고 짐을 턴 후, 시체는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한 청년이 그 여인숙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오래전 집을 떠났던 그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자신을 밝히지 않고 그 여인숙에 투숙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 리 없는 두 모녀는 그를 죽이기 위해 독약을 타서 먹였습니다. 그러나 그 손님을 죽이고 그의 가방을 열어 그의 신분증을 본 그들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바로 그들의 아들이자 오빠인 ‘쟝’이었기 때문이지요. 쟝의 모친은 아들의 시체를 버린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하고, 그 딸 마르타도 죽음을 택합니다. 탐욕이 그들에게 안겨준 것은 자신들의 피붙이를 죽이고 자신들도 죽어가는 끔찍한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 탐심을 물리칠 것과 탐심에 사로잡힌 것은 곧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탐심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비록 탐심이 부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로서는 거스르기 어려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골치아픈 우리의 본성인 탐심에 대한 아주 놀라운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탐심을 선하고 거룩한 쪽으로 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미 이것을 입증해 보여주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탐심이나 욕망을 거룩한 것, 선한 것을 향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탐심을 ‘거룩과 선과 우리 주님을 향한 탐심’으로 바꾸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은 예가 바로 오늘 본문의 라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라합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탐하시기 바랍니다. 즉 여러분의 본성적인 탐심을 거룩한 데로 향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마11:12)”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거룩한 것, 우리 주님과 주님이 주시는 것들을 탐할 때, 여러분은 라합처럼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탐하여 거룩을 소유하고, 선한 것을 탐하여 선을 소유하고, 신령한 것을 탐하여 신령함을 소유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각양 은사와 선물을 탐하여 그것을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