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구를 세울 것인가? (삿 9:7-21)

  • 잡초 잡초
  • 437
  • 0

첨부 1


누구를 세울 것인가? (삿 9:7-21)

  이번 주 수요일(19일)은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일입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는 민족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 지도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죠.

좀 더 세월이 흘러가야, 보다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그 동안 정말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했다는 데 민족적인 안타까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훌륭한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12명이나 되는 후보가 출마를 했으니,
그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결정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들 쟁쟁한 분들인데 그 중에 한 사람만 선택해야 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인가요?

  이런 정치적인 얘기만 나오면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침을 튀기면서 혈기를 올리며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얘기를 해 보면, 도대체 그 많은 정보를 어디서 모았는지, 정말 아는 것도 많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 정보들이 다 맞는 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Behind Story가 너무나 많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후보가 많은데도 찍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출마한 분들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데, 유권자들은 찍을 사람이 없다니 이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상관없이
그 12명의 후보들 중에서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후보들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성인군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지도자를 뽑는 것이니
좀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을 뽑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사 기드온이 죽고 난 다음에
그를 대신하여 나라의 지도자를 세우는 과정에서
아비멜렉이 세워진 것에 대한 요담의 우화(삿9:8-15)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우화는 나무들을 의인화해서 왕을 세우는 내용입니다.
왕이 될 만하다고 생각되는 나무들에게 가서 ‘너는 우리 왕이 되라’고 부탁합니다.
감람나무 -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무화과나무 -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포도나무 -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 고유한 임무를 감당하는 일로 인해
왕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왕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나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거절하자, 가시나무에게 가서 부탁을 합니다.
‘너는 우리의 왕이 되라.’

가시나무 -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가장 자격도 없는 자가 가장 큰 소리를 지르고 있는 형국입니다. 

  여기서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에 있는 기드온의 첩의 아들(서자)입니다.
기드온이 죽자 아비멜렉은 자기의 외가댁인 세겜 사람들에게 친척감정에 호소하여
그들의 지지를 얻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삿9:18)

요담은 기드온의 말째 아들로서
그 때 간신히 숨었다가 살아나서 그리심 산 꼭대기에 가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보다는 혈연의 인정에 이끌리어 (형제가 된다고 하여)
정당성이 없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우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요담의 예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만일 아비멜렉을 지도자로 세운 것이 진실하고 의로운 일이라면 아비멜렉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것이지만,
그렇지않다면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서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메렉을 사를 것이다”(삿9:19-20)

  이러한 요담의 예언은 결국 성취되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의 칼날에 멸망을 당하였으며(삿9:48-49)
아비멜렉은 높은 망대에서 어느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머리를 맞아 비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삿9:53-54)

  본문은 이러한 비참한 죽음을 통하여 죄악의 결과가 어떤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의 아버지 기드온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300명으로 13만 5천명의 미디안 군대를 격파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삿8:28에 보면, ‘기드온의 사는 40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이것이 올바른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가 사라지게 되자, 그 땅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있게 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치러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선거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정치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위한 것입니다.
정의가 파괴되면 약자가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결국 약자에게 무관심하게 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약자의 손해를 덜어줄 수 있다면
정치참여는 오늘날의 자선이요 구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참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손봉호 박사는 이 점에 대해서 협의의 정치와 광의의 정치를 말했습니다.
협의의 정치는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요,
광의의 정치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손 박사는 아직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협의의 정치참여는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광의의 정치는 시민운동과 같은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권력을 잡지 않기에 비도덕적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대선을 위해서 우리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선출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딤전2: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다스리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임된 명령입니다.


둘째,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효율을 따지자면 가장 비효율적인 제도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뭔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소수 전문가의 의견이 더 옳을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판단이 모든 백성들의 의견보다 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힘의 견제라는 차원에서는 탁월합니다.
“모든 힘은 부패하고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패를 막는 길은 견제하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계는 있지만, 그래도 민주주의가 가장 좋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교회도 민주주의가 가장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신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괜히 부패를 막는다는 미명 아래
교회에서 늘 비판적인 세력이 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기도 많이 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가는 영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투표는 근대 시민사회에서의 국민의 당연한 권리요 의무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빛과 소금이 되는 방법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찍든 자유지만, 투표 그 자체가 크리스천들의 애국심의 반영일 수 있습니다.
힘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commitment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omission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지 말하는 것을 범하는 것도 죄이지만, 할 일을 하지 않는 태만도 죄입니다.
투표는 국민의 4대 의무 중의 하나요,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투표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뚜렷하게 찍고 싶은 최선의 사람이 없을지라도
차선의 후보가 당선되도록 투표를 해야 합니다.

  투표할 때 이런 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의, 평화, 기쁨 등을 사회에 실현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
2)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올바른 관점과 소신을 갖춘 사람
3) 안정된 복지사회를 이루어갈 경륜과 능력을 갖춘 사람
4) 이 땅에 약하고 눌린 사람들의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
5) 복음 전도에 유리한 사회적 상황을 보장할 수 있는 사람
6) 세계 선교에 유리하도록 민족의 세계화를 위해 Vision을 줄 수 있는 사람
7) 정치인이 성자일 필요는 없지만

리더십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적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사람


셋째, 선거과정과 개표절차가 공의롭게 진행되도록 기도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저한 한 특징은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자라면,
선거과정에서의 공의의 실현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지도자를 세울 때,
그 사람이 그런 자격이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피지 않고
지역감정과 혈연, 학연 등으로 뽑는다면
결국 아비멜렉같은 사람을 세우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대선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모두가 투표에 적극 참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동참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