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대림절]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 : 주(主) (고전 8:5~6)

  • 잡초 잡초
  • 316
  • 0

첨부 1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 : 주(主) (고전 8:5~6)

스스로 종이 되다

지금으로부터 30년이 넘었으니 꽤 오래 전 일입니다.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라는 미국 작가가 쓴 소설 '뿌리'(Roots)가 100만부 이상 판매되자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어 우리나라 TV에서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이 드라마를 감동적으로 본 기억이 나는데 아마 여러분 중에도 기억나는 분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저자 알렉스 헤일리는 실제로 자기의 7대조 할아버지인 쿤타 킨테가 1767년 고향인 아프리카 감비아 쥬플레 마을에서 노예로 잡혀 미국으로 끌려온 후부터 그 후손들에 대해 조사해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래 전 이 드라마를 볼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붙잡혀 미국의 한 농장에 팔려간 주인공 쿤타 킨테가 끝까지 도망을 치다가 잡혀오는 장면입니다. 농장 주인은 쿤타 킨테에게 '토비'라는 노예의 이름을 붙여주고 다른 농장주에 비해 제법 잘 대해줍니다. 그런데도 쿤타 킨테는 끝까지 도망을 치다가 결국 붙잡혀와 잔인한 노예 감독에게 발이 잘리게 됩니다. 그가 그토록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자유'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누군가의 말처럼 자유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는 끝까지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 탈출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자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우리를 종으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쿤타 킨테는 발이 잘려도 끝까지 자유를 찾아간 것이요 우리 조상들도 일본 식민지 시대에 독립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노예 생활에서 가까스로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를 일부러 반납하고 스스로 노예요 종이 된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음과 같은 네 단계를 거친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단계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유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 즉 우리가 '선악과'라고 부르는 것만은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선악과' 하면 못 먹게 한 것만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자유를 죄 짓는 일에 잘못 사용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두 번째 단계인 '죄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부터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자유를 다 잃어버리고 마귀사탄의 종이요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뿌리'의 주인공 쿤타 킨테가 고향마을에서 사로잡히는 순간 모든 자유를 다 잃어버리고 노예가 되어 백인의 종노릇을 하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단계는 이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짓고 죄의 종노릇 하게 된 인간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 것입니다. 쿤타 킨테 같이 노예로 팔려간 사람이 자유를 얻는 방법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마음씨 좋은 주인이 노예를 돈 주고 사서 "너는 오늘부터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다."라고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속량'(贖良)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드라마 '뿌리'에 보면 쿤타 킨테의 손자인 치킨 조지가 닭싸움을 잘 해서 돈을 벌고 주인에게서 속량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와 똑같은 원리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데 하나님께서 죄의 종노릇, 마귀의 종노릇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속량하여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속량을 해주려면 반드시 대가가 필요합니다. 즉 노예의 몸값을 지불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값으로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값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삯을 치루고 우리를 속량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구속'(救贖) 혹은 '대속'(代贖)이라고 부릅니다. 이 십자가의 구속, 대속을 통해 우리는 죄의 종노릇, 마귀의 종노릇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지요(요 8:34, 롬 6:6,16,17,20, 8:21, 갈 4:8, 5:13, 히 2:15).

그런데 이 세 번째 단계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그 다음에 네 번째 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값으로 자유인이 된 우리가 스스로 종이 되는 단계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얼마나 소중한 자유인데, 이 목숨보다 소중한 자유를 왜 스스로 포기하고 또다시 남의 종이 된다는 말이냐? 말이 안 되지요. 쿤타 킨테가 그토록 목숨 걸고 자유를 얻었는데 왜 스스로 남의 종이 되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은 바로 '주'(主) 혹은 '주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 주 혹은 주님이라고 부를 때가 참 많습니다. 지난 주간 부흥회를 하면서 또 부흥회를 준비하는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면서도 우리는 꽤나 '주여' 삼창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이 도대체 그 뜻이 무엇인지 알고 부르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를 때 그 '주'는 주인 주(主)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반대로 말하면 "저는 예수님의 종이요 노예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 앞에서 설명한 대로 죄의 종노릇하다가 자유를 얻은 우리가 스스로 다시 종이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단, 전에는 죄의 종이요 마귀사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주인을 바꾸어서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때 이 한 글자 속에는 이런 깊은 뜻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저의 주인이시고 저는 예수님의 종입니다."하는 뜻입니다. 자, 이제 누군가의 종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종이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그 뜻을 정확히 안다면 아마 한 사람도 종이 되겠다는 말을 안 할 것입니다.

종은 바로 노예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지금 노예제도가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집안에 종이 있었습니다. 종이나 노예는 어떤 사람인가요? 종은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도구입니다. 재산입니다. 사람 취급을 못 받았기에 이름도 안 붙여주었습니다. 사내종놈(반드시 '놈'자를 붙여야 합니다)은 그냥 마당쇠라고 부르거나, 계집종년(반드시 '년' 자를 붙여야 합니다)은 5월에 사왔으면 오월이, 10월에 사왔으면 시월이입니다. 종은 일하는 도구요 재산이기 때문에 주인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으며 마음에 안 들면 쳐 죽여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름도 없는 노예에게 인격이나 자존심 따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일해도 절대 재산은 못 가집니다. 노예가 가진 모든 재산이나 시간이나 심지어 생명까지도 모두 주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종은 그렇다고 치고, 신약이 쓰일 당시 노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브래들리(K.R.Bradley) 교수라는 분이 쓴 <로마제국의 노예와 주인>이라는 책을 보면 당시 노예란 한 마디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철학자는 "노예는 당나귀와 같다. 다만 당나귀는 말을 못 알아듣고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 것만 다를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노예는 신발도 옷도 없이 외양간 같은 곳에 지푸라기를 깔고 생활했으며 노예끼리 문제가 생길까봐 서로 말도 못 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말을 아예 못 배워 알아듣기는 하되 글을 읽기는커녕 말도 잘 못하는 노예가 많았습니다. 말을 잘 듣지 않으면 때리거나 죽이거나 팔아버리고 정 고약하다싶으면 길거리에 십자가를 세워 놓고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종보다 훨씬 못한 비참한 삶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의 종이요 노예임을 자청하는 것입니다. "나는 종으로서, 노예로서 한평생 예수님만 주인으로 섬기며 살렵니다. 내가 가진 시간이나 재물이나 가족도 다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이신 예수님 것입니다. 심지어 내 자신이나 내 생명까지도 다 예수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종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칭찬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저 죽어라고 일만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부터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종이 바깥에 나가 하루 종일 밭을 갈거나 양을 치다가 돌아오면 "너 하루 종일 수고했으니까 이리 와서 앉아서 밥 먹어라"고 말하는 주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 이리 와서 내 식사준비를 하고 내가 먹는 동안에 옆에 서서 시중들다가 나 다 먹고 난 후에나 먹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시키는 대로 다 했다고 해서 누가 종에게 "고맙다, 수고했다"고 하겠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종은 이런 일을 다 한 뒤에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5~10)라고 말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대로 내 모든 것이 다 주님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일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일한 뒤에도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저는 종이니 그저 일만 하렵니다. 칭찬도 필요 없고 누가 알아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자, 묻습니다. 여러분! 이래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시겠습니까? 혹시 그 동안 우리가 그 뜻도 제대로 모르고 예수님을 습관적으로 주여, 주여 부른 것 아닙니까? 남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아무 생각 없이 나도 그렇게 부른 것 아닙니까? 이제 그 뜻을 알면서도 우리가 지금까지처럼 그렇게 쉽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종의 올바른 자세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는 것은, 즉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종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았으니 이제 좋은 종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그분의 좋은 종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종의 올바른 자세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성경을 몇 군데 찾아보아야 합니다.

첫째, 다같이 마태복음 7:21을 찾아 읽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은 '주님'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습관적으로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입으로 '주여, 주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 즉 정말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여 주님의 다스리심과 지배를 받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늘 '주님'이라고 부르는 나는 지금 진정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말로만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분의 다스리심을 받고 그분의 뜻대로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고 있습니까?

둘째, 누가복음 19:31을 찾아 읽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고 들어가실 나귀를 구해야 하는데 어디서 구하느냐? 예수님은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거기 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테니 풀어 끌고 와라. 만일 누가 왜 끌고 가냐고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십니다. 정말 제자들이 가서 나귀를 풀어오려고 하자 주인들이 묻습니다. "왜 남의 나귀를 데려가느냐?"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하자 정말 주인들은 두 말 않고 내줍니다. 종은 주인이 쓰신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끝입니다. 더 이상 말하면 안 됩니다. 이유를 묻지도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해야 하며 내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나 자신과 생명까지도 두말없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나는 정말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정말 주님의 뜻이라면 두말없이 순종하고 "주가 쓰시겠다"고 하시면 무조건 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피하지는 않는지, 주님의 뜻이라는데도 내 인간적인 생각과 주장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요.

셋째, 고린도전서 8:5~6을 찾아 읽습니다. 오늘 함께 봉독한 본문 말씀입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세상에는 신이라 불리거나 주인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또한 많은 우상들이 자신을 주인 삼아 달라고 유혹하고 협박합니다. 돈이, 권력이, 욕심이 말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돈의 노예가 되어, 권력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너무도 잘 표현한 가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주님으로 모시고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내가 그동안 예수님 대신 주인으로 삼았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내가 그동안 예수님보다 더 사랑했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주님만 섬기고 주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대신 주인으로 섬긴 모든 것이 다 우상이요, 예수님보다 더 사랑했던 모든 것이 다 우상입니다. 이 모든 우상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만 섬기며 사랑하는 것이 참된 우리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외치는 자가 아니라 진정 예수님만 주님으로 섬기는 그 분의 참 종이 될 것이요 바로 이런 사람만이 천국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누가복음 2:11에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실 때 천사가 목자들에게 들려준 말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렇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구주(救主), 즉 구세주와 그리스도 주(主)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또한 우리의 참 주님이 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 셋째 주일에 예수님의 구원과 그 분의 주되심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며 나는 과연 예수님을 참 주님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분의 종이니 더 이상 내 것도 없고, 내 주장 내 생각도 없고, 나 자신은 다 사라지고 오직 주님만 드러나시며 주님께만 순종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것이 대림절을 맞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