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의 가족관 (막 31-35)

  • 잡초 잡초
  • 462
  • 0

첨부 1


예수님의 가족관 (막 31-35)

이규태의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 ‘하우스’가 있고 ‘홈’이 있다고 합니다.
둘다 영어로 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이 둘이 같은 말같지만 의미가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첫째 하우스는 물질적인 집이요 홈은 정서적인 집입니다.
둘째 하우스는 제도중심의 집이요 홈은 인간중심의 집이다.
셋째 인체로 비교하면 하우스는 골격이요 홈은 피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미국 사람들은 하우스보다 홈에 초점을 모으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홈보다 하우스에 더 비중을 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는 가족이라는 형식을 굉장히 강조하지만 사실은 내실은 없다는 것을 꼬집는 것입니다.
다른 어느나라보다도 우리나라는 가족중심의 혈연문화를 강조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혈연을 중심으로 한 자녀들을 강조합니다. 그래서인지 가정이 대부분 부부중심이기보다는 아이들중심입니다.미국과 같은 나라는 이미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독립시키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가족이 구성되고 혈연을 맺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피가 섞이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선민사상이 투철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이 특별하게 선택한 민족이라고 하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자부심으로 여기면서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세대간을 이어가면서 교육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대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주후 70년경에 로마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전세게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948년에 그들은 나라로 귀환하게 됩니다. 무려 유대인들은 2000년만에 자신의 땅으로 돌와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각기 흩어져 다른나라에서 각기 살았지만 그들은 사상과 습관이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이유가 바로 투철한 가족의식 투철한 공동체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 이런 모습은 대단히 존경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유대인들의 잘못된 가족의식을 깨뜨렸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족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가족의식은 그리스도안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편협한 가족을 넘어선 큰 가족의 관점을 갖기를 소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비성경적인 가족관을 버리기를 원합니다.
먼저 가족우상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물론 부모는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우리 가족은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내가족이 소중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소중하고 귀한 만큼 하나님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종 가족이 소중하기에 집착하고 서로 의존하면서 망각하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바로 가족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상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나사이에 끼어드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안보이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대로 예배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하지 못한다면 바로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가족과 관련하여 우상이 되지 않기를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가족은 우리에게 분명 중요하지만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없습니다.
다음 가족 무시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족의 선물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을 통해서 신앙을 전승하기를 원하십니다. 축복이 전승되기를 소원하십니다. 좋은 유산들이 전승되기를 기대하십니다. 부모를 나몰라라 하고 효도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내를 남편을 신앙의 명분아래 섬기지 않고 소홀히 여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두가지 극단을 극복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가족관을 갖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가족관이 어떠해야 하는지 잘 보이고 있습니다.
주님은 정상적인 가족 속에서30년동안 삶을 사셨습니다. 육신의 아버지 요셉도 있고 어머니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에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사실때에 혈연중심의 가족에 매이지 않고 사역에 집중하신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인륜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초인륜적인 분이셨습니다. 오늘 자신을 찾아온 가족들을 알리는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주님의 분명한 가족관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어떤 특성이 있습니까?

1. 예수님의 가족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영적인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4절에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주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의 가족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로 고백이 되십니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분명히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십니까? 저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순종합니다.
여기 모인 찬양대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기도합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 아버지로 순종하고 고백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한 가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한가족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의 가족은 혈통을 초월합니다. 민족을 초월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산다는 것 그분의 아들이 된다는 것 그분의 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럽고 가슴벅찬 일입니까?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가족 주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나와 하나님이 가족이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유일한 체험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육신적으로는 내가 누구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사건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대통령의 아들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하여 태어난다면 좋겠지요.그러나 농부의 아들로 장사하는 아버지의 아들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내가 육신의 아버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선은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우리는 오직 거듭남의 체험을 통해서 비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만남이 소개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인이요 유대인의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는 큰 지도자였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를 향하여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면 입구에 간판이 있는데 그곳에 틀림없이 이렇게 쓰여있을 것이다. 오직 거듭난자”.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고 모시고 살 수 있습니까? 거듭난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거듭나셨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씀으로 하면 당신은 정말 구원받았습니까?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사람들은 분명한 영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거듭나는 과정의 체험은 특별한 체험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체험은 독특한 체험이 아닙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되고 가족이 되는데 똑같이 일어나야 할 체험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한가족이 될 때에도 같은 체험을 합니다. 반드시 엄마의 배를 통해서 10달 잉태하고 때가 되면 해산하여 피를 흘리고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우리 중에 다른 방법으로 이땅에 태어나 한 가정의 가족이 되신 분이 있습니까? 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한가족이 되기 위한 체험이 같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거듭났습니까?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합니다. 거듭나는 영적체험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마음에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합니다 .
요한복음 5장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여야 한다고 하십니다 . 하나님의 가족은 믿음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생에 한번의 경험입니다. 내가육신으로 일생에 한번 태어나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내가일생에 한번 거듭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듭나셨습니까? 하나님의 가족이 되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의 영적인 체험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경험합니다.

2. 예수님의 가족은 아버지의 영적인 뜻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가족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진정한 자녀는 아버지의 뜻을 압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해합니다. 그 아버지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인생에 새기면서 살아갑니다.여러분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아버지의 말슴을 듣고 이해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머리가 좋아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지식이 많아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의 문제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도 건드릴 수 없는 넘어설 수 없는 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그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 앞에 두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그 무리들은 이상하게 그 당시에 죄인들 무식한 자들 약한자들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그 말씀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당시에 사회적으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엇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엇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니고데모는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하자 그는 그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거듭나다는 말을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벳새다 광야에서는 무려 남자 장정이 5천명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몰려들었습니까? 예수님이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실 분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행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내가 하늘나라에서 온 떡이다.나를 먹는 자는 영생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들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저사람이 자기를 잡아먹으래,제살을 먹으라고 하는데 어떻게 먹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엇습니다.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물리치시고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귀신들렸다’고 한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복음에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재미를 경험하여 보셨습니까?
이 말씀을 밤을 새워보면서 뜻을 구하는 감동을 경험하여 보셨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지거나 이 말슴의 감동으로 눈물흘리신 경험이 있습니까? 저는 거듭나고 이 말씀을 읽다가 너무 가슴이 뜨겁고 기쁨이 넘쳐서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너무 세상이 황홀한 경험을 한적이있습니다.

그 감격은 저의 인생을 변화시켰습니다. 대학다닐때에 경험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하숙하던 집의 하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하숙집에서 함께 가정예배를 매일 아침마다 드렸습니다. 하숙집의 화장실에 말씀을 걸어두었습니다. 하숙방에도 말씀을 걸어두었습니다. 책갈피에도 말씀카드가 꼽혀잇습니다. 학교도서실에 저의 지정좌석에도 항상 성경말씀으로 무장했습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행동을 하고 삶을 살아가자 친구들 눈에는 교수님들 눈에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친구가 저에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교수님이 ‘너가 군대갔다와서 좀 머리가 돈 것같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군대를 대학 2학년을 마치고갔는데 가기 전에는 잘 놀았습니다. 시 좋아하고 음악 좋아하고 체육좋아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신앙은 그냥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대갔다오면서 거듭났고 그러면서 말씀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뜻을 이해하면 들리고 보이고 느껴집니다.
제가 요즘 사진을 좀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배우는 사진 선생님은 사진의 고수입니다. 한번은 사진전이 있다고 하여서 구경을 갔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기술이 좋은 사람들이 찍은 사진이고 좋은 작품인데 저의 눈에는 그것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사진을 감상할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진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은 그 뜻을 알기에 사진이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사진을 잘 볼줄 모릅니다.

몇 년전에 미국 교회탐방을 가면서 거금을 들여서 미국 뉴욕맨하탄에서 유명한 뮤지칼을 관람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거금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을 냈습니다. 다들 가는데 안가는 것이 왠지 자존심이 상해서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제 눈에는 제 귀에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고전2장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집니까?
여러분 그것은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되었고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은 서로 통해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이 서로 통해야 합니다. 자녀와 부모가 서로 통해야 합니다. 우리 영적인 하나님의 가족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서로 통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의 나의 뜻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꿈이 나의 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욱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아가시는 삶으로 승리하기를 축복합니다.

3. 주님의 가족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합니다.
주님의 가족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자 그때부터 그 뜻이 목표가 되어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예수님에 대한 뜻은 바로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를 사실때에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고난 중에 돌아가실때에도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면서 결국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에수님께서 그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죽으시는 것이 뜻이었습니다. 그 뜻을 순종함으로 결국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엇습니다.

오늘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우리가 행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 중에 가장 하나님이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 있습니까?
어느날 예수님 앞에 한 율법사가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예수님께서 말슴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셧으니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가장 큰 계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바울은 로마서13장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행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목숨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뜻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최선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의 사랑은 분명히 세상의 사람들의 이기적인 사랑의 삶과는 구별되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래도 아직 우리나라 교회는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특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되어야합니다.

요즘 서해에 기름 1만톤이 유출이 되엇습니다. 최소 그 피해액은 수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앞으로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데 1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횟집 양식업자들 바다를 근거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의 생존의 문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이 필요한 자리에 그래도 가장 먼저 사랑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이런 일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몸으로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물질로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다음 하나님의 최대의 뜻은 바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최대의 명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세워가는 그 뜻 그 목표가 우리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위하여 복음을 정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이 세상에서 살기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루 하루 그냥 먹기 위해서 일하고 살기 위해서 먹지 마십시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구하고 살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울수록 현실을 뛰어넘은 꿈을 갖고 목표를 갖고 주님의 자녀답게 천국시민답게 살아가시는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종종 비행기를 타면서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비행기가 뜰때 온통 하늘이 흐리고 비가오고 날씨가 궂습니다. 비행기를 탈때만 해도 굉장히 마음이 걱정이 되고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원만하면 비행기는 출발합니다. 그런데 바람과 폭풍우를 뚫고 구름을 뚫고 비상하여 높이 올라가면 저 아래의 구름 비와는 상관없이 청정한 평화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름위에는 놀라운 새세계가 펼쳐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꿈이 있는 백성이요 목표가 있는 백성들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늘의 백성으로서 자긍심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뜻을 갖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낙망하고 좌절하고 있습니까? 다시 일어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도전하시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