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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그 이름은 모사(謀士)라 (사 9:6, 눅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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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그 이름은 모사(謀士)라   
◇ 본 문 : 이사야 9:6, 누가복음 5:1~7

온 세계인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성탄절이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한사람의 생일을 두고 온 세계가 기뻐하며 축하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성탄절뿐입니다. 성탄절 분위기를 가장 먼저 조성하는 곳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의 가정이나 아니면 예수님을 전하며 그분께 예배드리는 교회가 아니라 상술에 밝은 상가나 유흥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일찍 성탄트리로 장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성탄절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신(信)불신(不信)을 막론하고 모두가 기뻐하는 명절, 온 세계가 기뻐하는 명절은 성탄절뿐입니다.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하시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죄 많은 세상에 왜 오셨을까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오셨습니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본문은 몇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 9:6)하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모사라”하신 말씀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므로 함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모사에 대한 사전적인 의미는 “지혜를 내어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 남을 도와 그를 위해 지혜를 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의미로 본다면, 일반적인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구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세우시고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하셨습니다. 모사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땅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입니다. 또한 그 지혜대로 이루시는 것이 사람의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사란 어떠한 것입니까? 실패를 성공으로 바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에게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5:1~7말씀에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고기잡이로 살아가던 어부 베드로가 겪은 경험을 기록한 것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만선(滿船)의 꿈을 안고 자기의 지혜와 경험을 총동원하여 그물질을 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안타깝게도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상한 마음, 지친 몸으로 그래도 내일을 위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 곁에 오셔서 베드로의 배를 잠시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밀려들므로 설교를 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시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몹시 피곤하여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때였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바다에서 작업을 한 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요구에 응하여 배를 내어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배를 이용하여 육지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에 들어 가셔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한 설교의 방해를 피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다 전하신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말씀은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에 벗어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평생을 보낸 전문가였으나, 예수님은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내륙지방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와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문외한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분입니다. 전문가가 비전문가의 말을 듣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 한 마리의 고기도 잡히지 않은 바다였습니다. 더욱이 물고기는 낮보다 밤에 잘 잡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밤에 잡지 못한 물고기를 밝은 낮에 그 자리에 그물을 내려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상식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사(謀士)이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제시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에 대한 자신의 경험, 바다에 대한 상식,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이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이 말씀은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내 모든 경험 다 버리고  모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방법을 따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인간의 상식 밖의 일이 나타났습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바다였습니다. 수없이 그물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말씀을 따랐더니 잡힌 고기가 너무 많아 자기의 배로는 물고기를 다 끌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곁에 있는 동무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두 배에 채우매 배가 잠길 만큼 되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만선(滿船)이었습니다. 대성공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가족들은 또 얼마나 좋아 했겠습니까? 이 광경을 지켜보는 주위 사람들은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모사이신 예수님의 명령을 따름의 결과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사이신 예수님의 기적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몇 가지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一. 모사이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곁에 오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 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원리입니다. 베드로만 아니라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께서 먼저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주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한복음 6:44)하셨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경우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밖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조선이 그 사람 곁에 가서 건져준다면 그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혼 구원의 이치가 이와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죄악의 거센 홍수에 떠내려가는 힘없는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건저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건질 힘이 없습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같은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베드로 곁에 오신 것이 베드로의 성공의 시작이었습니다. 베드로만 아니라 우리 에게도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남달리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二. 베드로가 예수님께 배를 내어 드린 것입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고자 애쓴 베드로가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 실의는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를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베드로는 배를 내어 드렸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의 청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의 육신은 편안 했을지 모르지만 모사이신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의 기적은 체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한 순간 물고기를 잡은 것만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베드로의 일생의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직접 밤을 새워가며 고기를 잡는 것을 볼 때, 그의 집안은 가난했음이 분명합니다. 고기잡이로 살아가는 것을 보니 그는 배움도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재산도, 배움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베드로를 누가 알아주었겠습니까? 베드로라는 사람은 삶의 실패자의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필요로 하실 때 배를 내어드린 것이 그의 일생의 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초라하게 끝마칠 그의 인생이 대 성공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종종 우리들에게 주님의 필요하신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눈과 귀가 밝은 사람은 이러한 주님을 보게 되고,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세상욕망에 가득한 마음으로는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어떤 모습으로 계실까요? 교회를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교회가 곧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8 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로 구원을 이룩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시면서 유일하게 남겨 두신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시던 그 거룩한 일을 그대로 이어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려면 교회관이 올바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하되 개인의 감정에 따라 말도하고 행동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진리를 분명하게 까달을 때, 두려운 마음, 경건한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공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길 원하십니까?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길 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욕심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길 소원하십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위해 헌신하시며, 기쁨으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사랑과 복과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전달되듯,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필요하심을 따라 배를 내어드렸듯,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필요는 곧 그리스도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요구에 기꺼이 응하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시편 122:6~9에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예루살렘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인 영혼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축복도 주님의 몸인 교회를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 배를 내어 드린 것처럼 우리들도 베드로의 마음을 본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三.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상식에 맞지 않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겪은 경험, 상식 모두 다 버리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가난함에서 풍요로움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무능함에서 유능함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모사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임금이 신하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세 신하들을 불렀습니다.“신들은 못의 물을 길어 다가 각자의 항아리에 채우라.”고 했습니다. 항아리는 모두 깨어진 것이기에 두 신하는 포기했고, 한 신하만 상감의 어명이기에 끝까지 퍼다 부었습니다. 못의 물이 없어져 바닥이 드러났을 때 번쩍이며 빛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임금에게 그 금덩어리를 드리며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임금은 기뻐하면서 이 금덩이는 충성되게 순종하는 신하에게 주기 위해 내가 물속에 던져 넣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록 내 생각과 내 경험과 맞지 않을 지라도 베드로처럼 순종하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것은 모사이신 예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5:8~9에 기록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베드로에게 오셨듯, 우리들에게도 주님께서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배를 필요로 하셨듯,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교회를 통해 주님의 필요로 하신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시간이 있는 분에게는 시간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있는 분에게는 그의 강건한 힘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재능이 있는 분에게는 그 재능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물질이 있는 분에게는 그 물질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대가는 더 귀한 것, 더 많은 것으로 되돌려 주시는 주님이심을 베드로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하셨듯, 우리들에게도 순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모사이신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삶의 보람이 있습니다. 넘치는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승리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복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사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지혜인지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에게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베드로처럼 내 경험, 내 상식 다 뒤로 미루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때에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성공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풍요로움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보람된 삶과 행복의 모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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