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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누더기를 입고 오신 사랑 (눅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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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를 입고 오신 사랑 (눅 2:3-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빨리 전화를 끄라고 했습니다. 조금 후에 또 전화가 울렸습니다. 그래서 조금 짜증 섞인 음성으로 “전화를 빨리 끄라, 예배 전에 전화기를 꺼 놓고 들어오는 것이 예배자의 예의가 아니냐” 하면서 타 이르셨습니다. 이 같은 현상은 종종 우리들이 겪는 일입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또 전화가 울렸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화는 설교하시는 목사님의 주머니에서 울렸습니다. 그 목사님은 태연히 전화기를 꺼내서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아 하나님이세요, 지금 예배중이니까 예배 끝나는 대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끊었습니다. 우스개 소리지만 하나님과 이런 직통 전화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사건이 상당히 많습니다. 도저히 생각해도 이해 안 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 때 이 같은 전화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불가사의한 사건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면 얼마나 신비하고 놀랍고 영광스럽게 오셨겠습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데 아주 빈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빈약한 사람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대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직업이 목수였고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수와 목자는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그렇게 가난한 대상에게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또 예수님이 태어나는 시점도 불가사의 합니다. 고향으로 가던 여행 중에 도중에 태어났습니다. 오늘도 택시 안에서 버스 안에서 태어나는 아이들도 있기는 합니다. 어떤 이는 병원에 다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분만한 산모도 있습니다. 간호사가 빨리 뛰어나와 미안해하는 산모에게 “미안해 말라, 몇 년 전에는 병원 마당에서 분만한 산모도 있었다”고 위로했습니다. 그러니까 산모가 갑자기 울면서 “그게 바로 나예요”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여행 중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그 형편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여관을 찾으니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나 강보로 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강보라는 말은 “보잘 것 없는 포대기”라는 말입니다. 갑자기 여행 중에 아이가 태어났으니 무슨 준비를 제대로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어찌 그런 모습으로 와야 했습니까.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누더기 옷을 입고 비천한 사람에게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아주 구차하게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이해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오셨습니까.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심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누더기 옷을 입고 세상에 오시게 했습니다. 그 오신 목적은 순전히 세상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의미도 모르고 성탄을 즐기는 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혹시 기분이 고조되도록 눈이 안 오나 기대하면서 선물을 주고받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오심과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제는 성탄의 의미를 되찾아야 합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성탄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귈 수가 없고 하나님의 영원과 인간의 유한이 서로 만날 수가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과 영원히 친구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이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얼마나 심오하고 신비하고 은혜적이고 인간에 대한 배려입니까. 그런데 오늘 사람들은 성탄절 만 되면 선물부터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산타가 우상입니다. 그래서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성탄절 때가 되면 성탄은 잊어버리고 산타만 생각하게 됩니다.

영국에서는 어느 교사가 “산타는 가짜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다고 파직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왜 아이들에게 주어진 동심의 꿈을 깨버렸느냐”는 뜻에서 파직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아이들은 성탄절 때만 되면 산타를 기다리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속여먹는 재미로 산타를 등장 시킵니다. 어떤 부모가 성탄 때 산타가 주고 간 선물이라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그 선물을 받아들고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이 선물을 분명 산타가 주고 간 것이냐”, 부모가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또 물었습니다. “이 선물을 산타가 주었다면 왜 포장지가 우리 아파트 앞 가게 이름이 쓰여 있는 포장지로 쌌느냐”고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성탄의 의미를 빼고 프로그램에 치중하다 보니까 이런 웃지 못 할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 어디에 성탄의 뜻이나 의미가 들어 있습니까.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을 되새겨 보는 날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종이 됨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시되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오셔서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종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이 누더기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제자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왕자가 세상에 와서 종이 되었고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우리들에게 섬김의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아이들이 찾아왔을 때 제자들이 아이들을 시끄럽다고 내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정색을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저들의 것”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안수하셔서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까지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섬김의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거반 죽어가고 있는데 그를 보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면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소개하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섬김의 삶입니다. 예배를 “워쉽 서비스”(Worship Service)라고 합니다. “워쉽”은 예배라는 뜻이고 “서비스”는 봉사 또는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예배 후에는 섬김의 삶이 있어야 그것이 예배생활인 것입니다. 어떤 여 성도가 예배가 끝났는데 헐레벌떡 뛰어 왔습니다. 예배 후에 청소하고 있던 사찰에게 “벌써 예배가 끝났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찰이 대답했습니다. “예배는 끝났지만 봉사는 이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배는 워십과 서비스라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면 반드시 서비스 즉 생활에서 섬김과 봉사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의 삶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는 섬기는 봉사생활이 뒤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만 드리고 휙 가버리면 안됩니다. 뭔가 한 가지 부분에 참여해서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헌신과 섬김을 교회에서 해도 좋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하는 것도 좋습니다. 또 직장에서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섬김과 봉사는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에게서 진정한 예배의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에게 버림받아 죽임 당함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낮고 천한 세상으로 직접 내려 오셨습니다. 오시는데 가장 화려해야 할 분이 가장 초라하게 누더기 옷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시려고 친히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유감스럽게도 짝사랑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누구하나 그를 존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무시했습니다. 쫓아다니며 방해했습니다. 가르칠 때 마다 힐난했습니다. 마침내는 그를 재판했습니다. 그리고 채찍질 했고 결국 사람들은 그를 죽였습니다. 그 죽음도 아주 초라하게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은 협착하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은 어느 정도 편하고 쉽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타협도 안하고 정도를 걸어 살아가려면 참 외로움이 많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버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도 적당히 타협하고 살았더라면 그런 무시를 당하거나 고난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협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무시당하고 불이익 당하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점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입니다. 적당히 타협하면 사업도 쉽게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왜 다 포기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와서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되 일방적으로 마음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일방적으로 다가가서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하면 무엇이 돌아 올 것이다”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냥 주는 것입니다. 주면 상대방이 좋아합니다. 받는 기쁨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또 주는 자신도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주면 받을 때 보다 더 흐뭇하고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주고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에서는 오후에 우리의 이웃들에게 연탄을 직접 배달해서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돈으로 치면 얼마 안 되지만 직접 나가서 나누어 주면 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우리의 이웃들이 보잘 것 없는 것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생각도 달라질 것입니다. 행복은 큰 것을 주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주었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그냥 줌으로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행복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것도 제물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받았기 때문에 또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주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많이 주기도 하고 사랑도 많이 하는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사랑을 주면서 너무 표를 많이 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랑이 반감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오셨더라면 하나님이 세상에 오심에 흠집이 많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 왔기 때문에 성탄이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도움과 섬김과 사랑에는 이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어느 어린 한 학생이 늘 가난하여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못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미술 시간만 되면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반 선생님이 소풍을 갔을 때 보물찾기 시간에 크레파스가 적힌 쪽지를 찾을 수 있도록 그 아이에게 은밀하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냥 좋은 크레파스를 사서 아이에게 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사 주면 그 아이의 영혼과 인격에 상처를 줄 까봐 직접 사주지 않고 그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그 마음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겨울에도 여름 슬리퍼를 신고 아이를 등에 업은 채 구둣방 앞에서 떨고 서 있는 여인에게 자기의 생일 케이크, 집에 갈 차비, 그리고 신고 있던 양말까지 벗어서 그 아이 엄마에게 슬며시 밀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누가 이것을 두고 가셨네요” 하고 말하자 “그것은 제 것이 아닌데요”라고 배려하고 돌아서는 마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상대방의 인격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마음이 들어있고 배려가 들어있고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에게 상처도 주지 않고 미안함도 주지 않고 그 마음을 흐뭇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장에서 주어온 유모차를 아내는 부끄럼 없이 몰고 다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유모차가 얼마나 되냐, 새로 하나 사주지” 라고 말하는 남편의 말에 “그 돈으로 차라리 고아원 아이들에게 통닭 몇 마리 사다 주는 것이 낫죠”라고 말하는 아내가 있다면 그 마음이 진정 예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 아내는 사람들 눈치 보는 것 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먼저 생각하는 아내입니다. 그러기에 그 아내는 누구의 눈치도 안보고 가난한 삶에도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아주 조용하게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빈천한 집에 보내셨습니다. 또한 그 아들에게 누더기 옷을 입혀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너무 화려합니다. 오늘은 자식들에게 너무 화려하게 해 줍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에게 손이라도 조금 대면 당장 쫒아가서 선생님을 세워놓고 닦달을 합니다. 내 자식 내 손자녀를 그렇게 키워놓아도 별수 없는데, 오히려 그 손자녀들이 크면 그 아이들에게 외면당할지도 모르는데 오늘 부모들은 그렇게 자식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엊그제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할머니가 어린 손자인 듯싶은 초등생을 데리고 탔습니다. 그래서 “이 근처 학교에 다니나 보죠”라고 말을 걸었습니다. 그랬으면 “예”하든지 “네 이 근처 학교에 다녀요”라고 말하면 될 것을 굳이 대답하기를 “모 사립학교에 넣었는데 떨어져서 할 수 없이 이 근처 학교에 다녀요”그럽니다. 또 “이 아파트에 사시는 군요” 하고 인사하면 “네” 하면 될 것인데 “압구정에 큰 아파트가 있는데 두 내외만 있기에 작은 집에서 살아요”하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창조주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아무도 모르게 보내셨습니다. 여행 중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헌옷을 입혀 보내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니고 마침내는 그 아들로 하여금 고난 받게 하고 죽게 해서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대강절에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탄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알아야 그 앞에 머리를 숙여 죄를 고백하고 순종하게 되고 헌신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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