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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를 찾는 양 (행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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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를 찾는 양 (행 10:1-8)
   
  여러분은 결혼하실 때 누가 청혼을 하셨습니까? 전통적인 개념은 남자가 청혼해야 된다는 것이지만 이런 전통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여자가 청혼을 하면 왜 안 됩니까? 남자의 자존심이 상합니까? 오히려 고마워합니다. 요즘의 남자들은 배짱이 적기 때문에 여자가 좋아하는 티를 내고 또 주도적으로 나오는 것을 사실은 고마워합니다. 이것은 수만 년 동안 인간이 해 온 것이기 때문에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마는 여자는 자기가 결혼하자는 말은 안 하더라도 좋아하는 티를 내지요. 여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표시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를 바라보고 또 그 남자의 말에 쉽게 웃는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썰렁한 농담을 하더라도 누가 웃으면 관심을 갖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남자는 굉장히 단순한 동물이기 때문에 칭찬해 주면 무조건 좋아합니다. 칭찬해 주고 또 말을 들어 주면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목자가 양을 찾아가야 되는 것이지만 양이 목자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에게도 먼저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라든가, 바디메오라든가, 열 명의 문둥병자라든가, 예수님이 그들을 알고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고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이지요. 열 두해 혈우병 걸렸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예수님과의 첫 번째 만남의 순간이 기적의 순간이요, 응답받는 순간이요, 병이 낫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오기도 전에 믿음을 준비해서 오는 사람도 있고 교회를 오랫동안 다녀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도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같은 집에서 자란 형제라고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 형제이지만 그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격이나 인격, 이런 것만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하는 방법도 달랐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 수 있는 인물이었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믿고 사모하고, 그래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믿음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도 다 똑같은 말씀을 듣고 똑같은 훈련을 받았지만 다 똑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의 부활을 잘 못 믿는 사람도 있고 또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다양합니다. 우리의 손가락 지문이 다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또 입맛이 다른 것처럼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인데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은 믿음, 또 우리가 지향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이런 것이 결국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것은 쉽게 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부모님의 사랑도 사람이 철이 들어야 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것은 쉽게 판단하고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 어느 교회가면 ‘서로 사랑하세요. 서로 안아주세요.’ 그게 사랑이 아니에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뭣 하러 안습니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 품에 안기고 싶으십니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것은 제스처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친숙함은 비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숙함에 맞는 표현이 있지요. 정말로 말을 안 해도 부둥켜안고 싶은 자식이 있고 그리고 민망하고 악수하는 것조차 불편한 사람이 있는데 ‘사랑하세요!’ 한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억지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제스처라든가 프로그램이라든가 이런 것으로 인간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사람의 마음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선지자를 열매로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은사로 아는 것도 아니고 능력으로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선지자 노릇을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할 때 내가 너를 모른다고 말씀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도 그 사람의 열매를 보아서 아는 것인데 열매라는 것은 단숨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에요. 열매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열매인지, 또 풍성한 열매를 맺는지 못 맺는지, 기운을 다른데 빼앗기는지, 아니면 아예 씨가 먹히지도 못하는지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도 시간을 두고 인간을 지켜보십니다. 하나님도 시간을 두고 당신의 백성을 지켜보십니다.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것은 기회요, 가능성이요, 시간이라는 것은 뭔가 어떤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자라나고 또 이루고 또 기다리는 인간의 행위의 순서와 기회를 뜻하는 것이지만 구속사적인 관점에서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고, 노아의 홍수 때처럼 죄인들을 멸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시고 기다리시고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게 하시고 왜 하나님이 이러한 시간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행하시느냐? 그것을 말하는 것이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결국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상당히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 이후에는 우리가 아는 시간이나 역사는 끝납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마지막이라면 그 이후에는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개념의 시간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마지막이니까, 그것은 역사의 마지막이고, 시간의 마지막이에요. 왜 마지막이라는 말을 쓰느냐?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세상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것을 행하시는 그 과정을 시간으로 표시하는 것이고 그것이 끝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알지 못하는 다른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것을 성경은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고 알파요 오메가라’고 말씀하셨는지 그때가면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든 또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이든 또 서로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인내라는 것입니다. 기다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부모는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자라나기를 기다리고 철들기를 기다리고 그리고 멀리 간 자식이 명절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또 농부는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나기를 기다리고 풍성한 수확 맺기를 기다립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투자한 것이 수익을 거두기를 기대하고 멀리서 오는 배가 무사히 도착해서 그래서 물건을 가지고 오고 좋은 소식 가져오기를 기다립니다.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절반 이상은 기다리는 데 소비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기다리십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아버지가 기다리는 것처럼, 또 멀리 갔던 정탐꾼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기다리십니다.

사랑은 기다림을 요구합니다. 사랑이 속성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뭡니까? ‘사랑은 오래 참는다.’ 왜 참습니까? 이 세상의 일들은 참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이 많아요. 단숨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적어도 좋은 일은. 음식도 인스턴트 음식이 몸에 나쁘지 않습니까. 라면, 맛은 좋은데 몸에는 나빠요. 인스턴트 음식치고 몸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좋은 음식일수록 시간을 두고 조리하고 요리하고 그것이 몸에 좋은 것처럼 이 시간에 단숨에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오래참고 기다려야 됩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오해든 사람들이 욕하는 것이든 핍박하는 것이든 그것도 참아야 됩니다. 그것 참지 못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정치인들이 본인의 영광을 위하여 본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후보로 뛰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벌써 옛날에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욕을 많이 먹으니까. 너무 사람들이 욕하고 대적하고 비판하고 세상에 일평생 먹을 욕을 선거 때 다 듣습니다. 만약에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라면 누가 정신 나갔다고 그 일을 하겠습니까. 차라리 자기 돈을 가지고 편안히 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을 극복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명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국가를 위한 것이고 국민에게 필요한 것이고 이 시대가 나에게 준 사명이고 그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믿으면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 아니고 우연히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우연히 태어난 사람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또 목적이 없이 그저 어떻게 살다가 죽을 그런 인생이 아니고 우리는 모두 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고 다 하나님이 뜻이 있어서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생명은 선물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선물입니다. ‘내가 태어나겠습니다. 나를 낳게 해 주세요.’라고 한 게 아니지요.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것을 내 마음대로 버릴 수 없습니다. 내가 불편하기 때문에, 내가 괴롭기 때문에, 또 살기가 힘들기 때문에, 장래가 무섭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을 포기할 없고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인내하고 믿으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줄을 믿어야 됩니다. 내 인생에 반드시 선한 뜻이 있고 선한 결과가 있을 것을 믿어야 됩니다. 이것은 신앙의 차원입니다. 신앙 없이 사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살고 또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인지 저는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아마 ‘내일은 죽을 테니 오늘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렇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는 그런 선한 뜻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많은 것 중에 가장 귀중한 계시는 하나님이 선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God is a good God-좋으신 하나님. 왜 그것이 새삼스럽게 중요하냐? 하나님은 무관심한 것도 아니고 무서운 것도 아니고 좋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도 선한 선물이고 하나님의 뜻도 선합니다. 하나님은 선한 결과를 이루십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을 닮은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것은 마귀를 닮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마귀는 악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도적이 오는 것은 오직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고 그리고 생명이 더 풍성합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 병자가 낫고 죄인이 돌아오고 망가진 인생이 고침을 받고 좋은 일이 일어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됨됨이대로 행동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의 생각대로 그것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는 착한 척 할 수 있지만 결국 사람은 자기의 생각대로 삽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점은 선하다는 사실이에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악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착한 사람이 약해 보이잖아요. 착한 사람은 악독하게 뭔가를 못하지요. 독하기가 힘들지요. 그래서 선한 것이 때로는 약해보입니다. 왜 하나님이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번성하도록 내버려 두느냐? 왜 죄인이 당장 심판을 받지 않고 죄인들이 세상에 번성하는 것처럼 보이느냐? 왜 하나님은 당장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느냐?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하시기 때문에 믿으시는 것입니다. 탕자가 돌아올 것을 믿으십니다. 죄인이 회개할 것을 믿으십니다.

  당장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얼마든지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귀도 하나님 앞에 대적하지 못합니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심판할 수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심판을 늦추시는 것입니다. 천년을 하루처럼 기다리면서 예수님은 ‘내가 곧 오리라-I will comeback soon’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천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지요. 그러나 주님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말은 모든 민족과 모든 나라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이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복음, 이 천국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종말이 임박했다는 증거 중의 하나는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는 것인데 우리가 아는 바로는 아직은 땅 끝까지 증거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아마 그 땅 끝은 지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안에도 땅 끝 같은 사람이 있어요. 전혀 예수님 안 믿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전혀 신앙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땅 끝에도, 다시 말하면 가장 힘들고, 아골 같은 골짜기, 소돔 같은 거리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임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고’ 주님은 믿으시고 바라시는 것입니다. 가장 먼 데 있는 사람, 가장 힘들어 보이는 사람, 그 사람도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십니다. 돌아오기를, 회개하기를. 왜냐하면 예수님에게는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풍성한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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