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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상식(常識) (행 2:22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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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상식(常識) (행 2:22 ~ 36)

상식(常識)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인들이 가져야 하는 보편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정의합니다. 일반인에게 공통되는 의견이나 판단이라는 점에서 상식도 지식의 일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과학이 비판과 탐구를 본질로 삼는 이유와 원인에 관한 지식이라면 철학은 과학이 전제로 삼고 있는 문제를 규명하고 그 근원을 밝히는 지식체계를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 상식은 단순히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일반적이고 감각적인 지식이라는 점에서 과학과 철학과는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상식은 우리 생활의 편리를 부담 없이 제공해 주는 인지작용이므로 사회적 지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상식이 사회적 지식이 될 수 있으려면 사회가 안정된 상태이어야 합니다.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상식은 무너지고 다른 이데올로기들이 상식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이게 됩니다. 이렇게 상식이 무너지고 사상적으로 혼재 상태가 오면 잘못된 윤리와 도덕을 가진 철저히 주관적이고 신화적(神話的)인 지식이 상식을 대변합니다.
상식의 기준은 객관적인 지식을 거쳐야 하고 어떤 지식이 객관화 되려고 하면 오랜 검증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 본문 36절에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라고 하는 말을 직역하면 '확실히 알아라' 고 하는 명령형입니다. '확실히 알아라' 고 하는 말은 객관화된 지식과 객관화된 체험과 객관화된 가치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객관화된 지식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객관화된 체험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객관화된 가치는 무엇인가?

여기서 객관화라는 말은 주관성과 반대되는 말로 전혀 주관적 성질이 없는 보편타당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객관적인 진리입니다. 성경 자체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식이 되었습니다. 이 상식은 사회적 혼란과 무관하게 그리스도인들의 절대 불변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의 상식이 된 진리를 풀어 설명하므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상식화(常識化)하여 그 상식이 우리의 삶을 지배케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상식은 무엇인가?

Ⅰ.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우리의 주(主)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2장 22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인성을 입으신 예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을 입으시고 예언대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30년 사생애와 3년의 공생애를 통하여 그가 받은 그의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가 행한 이적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세례요한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바로 오실 그 메시야라는 의미로 대답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4-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사람의 모양을 가지시고 구약의 예언에 따라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이십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야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선지자 미가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미가 5장 2절에『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소요리 문답(22)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사람 되신 것은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을 취하사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셨으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워필드는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되고 완전한 인성에 너무 강하게 치중할까 두려워하지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Ⅱ.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의 주(主)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2장 23절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예정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법 없는 자들이란 이방인들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로마서 2장 14절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과 의의 요구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람이 의인을 위하여 죽기도 어려운데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5장 7-8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가치가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없이 하시려고 자신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드리신 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사장직과 제물의 사역은 놀랍게도 연합되었습니다. 그는 한 번 드려진 제사로서 속죄의 영원한 효력을 이루신 제사장입니다.
찰스 하지는 말하기를 "대리적 수난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곧 그의 자리를 취하여 견디는 수난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적 속죄와 대리적 속죄의 차이를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쉐드(Shedd)는 말하기를 "자신적 속죄는 가해자가 행할 것이나 대리의 속죄는 피해자가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자신적 속죄는 영구히 진행 중에 있고 구속을 가져오지 못하나 대리적 속죄는 화목과 영생에로 인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킨'바 되고 그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이 모든 인류에 미치는가에 대해서 다소 논란이 없지 아니하나 이 문제에 대해서 애써 고민할 가치는 없습니다. 일반인 즉 보편적인 인류에게 미치는 보통 은혜의 행복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 때문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이 천사세계에도 미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말하기를 "천사세계는 사탄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 머리를 잃었더니 그리스도 머리아래 재조직되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피조세계에도 역시 미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9-21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이 모든 인류와 천사세계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친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입니다.

Ⅲ.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 신 승리의 주(主)시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2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망의 고통』은 '해산의 고통', 헤벨( )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망의 고통을 해산할 때의 고통을 뜻하는 오디나스(wjdi'na")로 표현한 것은 예수님의 당하신 사망의 고통이 부활을 해산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고통과 사망의 실체가 예수님을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예수는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이 사망에 매여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 자신이 사망의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은 속죄사역의 확실한 증거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의 완전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의 본질을 밝혀 주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신 것을 감안할 때 영 뿐만 아니라 육까지 살게하여 주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0-32절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Ⅳ. 예수는 산 채로 하늘로 올리우시고 성령을 보내신 영광의 주(主)시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2장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이제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심으로 본래의 지위로 회복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 냅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승천을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그렇다고 부활과 승천이 서로 독립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을 확실히 믿는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무엇보다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은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4-5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모든 유대인들에게 요엘서를 인용해서 설교했습니다.
요엘서 2장 28-32절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일으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빌 2:8-11). 예수님은 메시야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시므로 예수는 만유의 주가 되셨습니다.

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장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란 말은 인간 역사상에 나타난 예수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야로서 구세주를 의미하고 주( )는 주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의 주인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당신이 곧 그리스도시요'라는 말입니다.

마가복음 8장 29절에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했고 누가복음 9장 20절에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땅에 계셨을 때도 주와 그리스도의 칭호를 받으심이 마땅했지만 부활 승천하신 뒤에는 더욱 합당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 되심을 확증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높이셔서 주와 그리스도 곧 메시야가 되게 하셨습니다. 건축가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 얻을 이름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1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는 사흘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우리의 구세주시며 우리의 영원한 주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신분을 의인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새 세계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구별된 생활로 얻어지는 행복이요 내세에서 그와 함께 누릴 천국의 영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낮이 지나면 밤이 온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입니다. '바닷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의 사고 속에 은닉되어 있던 상식입니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는 말도 역시 대중적 활용성을 잃고 숨어 있던 상식입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자기 스스로 버리지 않는다'는 말은 격언입니다.
'쌀뜨물에도 아이가 서는 수가 있다'는 말은 속담입니다.
성경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자연적인 사건의 기록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통한 믿음이 상식화를 가능케 합니다.

상식이 통하지 아니하는 세계는 답답한 세계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합니다. 미친 사람은 상식이 통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상식화되지 아니한 사람은 교회에서 정함이 없습니다. 이 상식은 바로 행동화되어 현장감 있게 나타납니다. 바보들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신구약 성경 모든 말씀이 우리들의 상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의 집과 우리의 생업과 우리의 자손들과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역사(work)하는 것을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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